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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에 신영복 선생님의 <더불어 숲>(신영복의 세계여행)을 처음 접했습니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문명과 사람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따뜻한 글과 그림 엽서.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는데 큰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며 그 감동으로 막연하게 세계일주에 대한 꿈도 품게 됐습니다. 인생의 반환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는 2017년, 배낭여행자가 되어 그 꿈을 실행에 옮깁니다. 당신이 보낸 첫 번째 엽서에 적혀있던 '언젠가 나는 당신의 답장을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문구에 무모한 용기를 얻어 여행지에서 편지를 띄웁니다. 이 여행기는 당신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당신들과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 기자 말

쿠스코의 아르마스광장. 낮부터 밤까지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는 옛 잉카의 중심부
 쿠스코의 아르마스광장. 낮부터 밤까지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는 옛 잉카의 중심부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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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지배했던 남미대륙에는 하나의 공통된 패턴이 있습니다. 도시나 마을 중심에 광장이 자리 잡고 있고, 광장을 중심으로 대로가 뻗어 나갑니다. 광장의 상부에 성당이 위치하고 중앙에는 분수대와 동상이 서 있습니다. 동상의 주인공은 대부분 19세기 초반 남미대륙 전체의 독립을 이끌었던 두 영웅 산 마르틴, 시몬 볼리바르 아니면 각국의 독립 지도자들이 차지하기 마련입니다.

페루의 쿠스코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스페인어로 '군대'를 뜻하는 아르마스 광장에는 바로크 양식의 대성당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장의 중심에 서있는 동상의 주인공은 백인 혈통의 인물이 아니라, 잉카의 9대 왕으로서 제국의 기초를 닦은 '파차쿠텍'이었습니다. 이곳 쿠스코가 과거 찬란했던 잉카제국의 중심이었음을 웅변하는 자존심이 느껴지는 광경이었습니다.

잉카제국의 초석을 다진 파차쿠텍의 동상
 잉카제국의 초석을 다진 파차쿠텍의 동상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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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 주변 작은 부족국가에 불과했던 잉카는 파차쿠텍 통치시절(1438년~1471년) 정복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히고, 종교의식 체계화, 조세제도 확립, 수도 쿠스코시 건설 등을 통해 제국의 면모를 갖추게 됩니다. 

무엇보다 케추아어를 공용어로 삼아 넓은 지역 다양한 부족을 잉카라는 하나의 공통된 문화권으로 묶어냈습니다. 그의 아들 투팍 유팡키와 손자 우아이나 카팍 시절에는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지금의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의 중앙 및 남서지방, 칠레 북부, 아르헨티나 북부, 콜롬비아 남부까지를 차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아이나 카팍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한 채 천연두로 갑자기 사망합니다. 이후 왕위 계승문제를 둘러싸고 파벌이 갈려 잉카는 극심한 내분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페인의 피사로가 등장합니다. 황금에 눈이 멀어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무자비하게 파괴하며 잔인한 살육을 자행하는 스페인의 참략자들 앞에서 잉카는 너무도 허망하게 몰락하게 됩니다.

침략자들은 잉카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자 했습니다. 잉카인들이 최고신으로 추앙한 태양신을 모시던 신전은 성당으로, 영광의 역사를 간직했던 광장은 군인들의 집합 장소로 바꾸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의식까지 바꾸고자 했습니다.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잔혹하게 처형했습니다. 

그 장소가 종이 한 장 들어갈 틈이 없는 석조 건축물로 유명한 사크사이와만 유적지 부근입니다. 하지만 잉카의 혼(魂)은 석조 구조물 이상으로 단단한 것이었습니다. 쿠스코와 그 주변부의 유적과 마추픽추, 그리고 잉카인들의 한(恨)이 담긴 노래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잉카의 신전이자 요새였던 사크사이와만. 종이 한장 들어갈 틈이 없는 정교한 잉카 석조기술의 극치를 볼 수 있습니다.
 잉카의 신전이자 요새였던 사크사이와만. 종이 한장 들어갈 틈이 없는 정교한 잉카 석조기술의 극치를 볼 수 있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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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는 도시 자체가 잉카의 박물관입니다. 

시내 골목 골목의 담장 하단부에서 잉카시대에 쌓여진 석조 구조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유명한 산토 도밍고 성당도 잉카의 코리칸차 신전의 토대 위에 올려진 것입니다.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잉카의 석조기술이 얼마나 정교했는지, 1950년 쿠스코 대지진 때 스페인 지배 시절의 건축물은 거의 다 무너졌는데, 잉카의 건축물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쿠스코 인근의 모라이 유적지는 지금으로 비유하면 '농업기술 연구소'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척박한 산악지대에서 효율적인 농사를 짓기 위해서 층층이 높이를 달리하여 온도와 배수에 따른 최적의 재배작물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농업기술을 연구했던 모라이 유적지. 2~3m 간격의 층위 마다 온도와 배수를 다르게 하여, 최적의 재배작물을 연구했습니다.
 농업기술을 연구했던 모라이 유적지. 2~3m 간격의 층위 마다 온도와 배수를 다르게 하여, 최적의 재배작물을 연구했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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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발달한 석조기술, 농경기술, 수로기술의 흔적을 돌아보며, 잉카시대 쿠스코가 인구 100만에 육박하는 거대 도시였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뛰어난 기술을 지녔던 이 문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이며, 제국의 흥망성쇠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잉카의 흔적을 찾는 이들에게 일으키는 깊은 공감의 정서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습니다.

구름에 휩싸인 마추픽추의 전경. '자기의 이유'가 아닌 다른 힘에 밀려 떠나야했던 자들의 회한이 느껴지는 곳입니다.
 구름에 휩싸인 마추픽추의 전경. '자기의 이유'가 아닌 다른 힘에 밀려 떠나야했던 자들의 회한이 느껴지는 곳입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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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에서 마추픽추로 이동할 때 나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7시간 동안 구불구불 비포장 도로를 타고 첩첩산중의 마추픽추를 향해 가면서, 어떻게 400년 동안 이 '공중도시'가 역사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철저하게 잊혀질 수 있었는지 그 이유가 충분히 이해되었습니다.

우기의 마추픽추는 구름이 가득했습니다. 내가 머무는 동안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산을 넘어 올라가지 못하는 구름으로 마추픽추의 전경이 가려져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습니다. 이런 흐린 날씨가 회한이 서려 있는 이곳을 감상하기에는 더 적합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잉카는 매듭을 지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결승문자(結繩文字) 외에 글로 된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잉카의 유적과 유물을 설명할 때 유독 많이 쓰는 표현이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입니다. 아직까지 마추픽추가 어떤 역할을 하는 장소였을지 확실하게 나온 결론은 없습니다.

예상보다는 작은 규모의 마을에 제의(祭儀)와 관련된 시설이 절반을 차지하고 나머지 공간은 제의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생활과 관련된 시설임을 보았을 때, 나는 마추픽추가 일반적인 생활을 위한 도시가 아니라 태양신에 대한 신성한 의식을 지내던 소도(蘇塗)였다고 추정해 봅니다.

스페인의 침략군들이 쿠스코를 점령한 후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마추픽추를 지키고 있던 잉카인들에게 결사항전의 용기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그들이 가장 신성시 여기는 장소가 외부의 침입자들에 의해 겁탈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차라리 세월의 망각 속에 이곳을 묻어 버리고 떠나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나 짐작해봅니다. 가장 귀한 것을 지키기 위해 떠나야 하는 자들의 서러운 고뇌가 느껴졌습니다. 

저 산을 넘으면, 저 구름을 넘으면 자유의 새 콘도르를 볼 수 있을까
 저 산을 넘으면, 저 구름을 넘으면 자유의 새 콘도르를 볼 수 있을까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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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20년 전 이곳 마추픽추에 올라 사이먼 앤 가펑클이 노래했던 <엘 콘도르 파사>의 노랫말을 읊조리며, 개인적으로 수감생활을 통해 겪었던 공감의 정서를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달팽이보다는 참새가 되고 싶고, 못보다는 망치가 되고 싶다'는 자유에 대한 갈망을 이야기했습니다. 

굳이 수감생활이라는 특별한 경험이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더 이상 갈 곳 없는 마추픽추의 고봉에 서면 원치 않는 떠남에서 오는 비극적인 감정과 자유에 대한 열망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사이먼 앤 가펑클이 부른 <엘 콘도르 파사>는 페루의 전통 민요에서 가져온 노래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엘 콘도르 파사>가 <철새는 날아가고>로 번역되었지만, 사실 콘도르는 철새가 아니라 길이가 1m가 넘는 맹금류로 안데스산맥 바위산에 둥지를 틀고 사는 새입니다. 

잉카에서는 예로부터 그들의 영웅이 죽으면 이 콘도르로 부활한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으며, '콘도르'라는 말 자체가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 잉카인들에게 읽히기도 합니다.

스페인의 지배 아래에서 안데스 광산에서 일하는 원주민들은 노예처럼 혹사를 당합니다.  이에 1780년 쿠스코 출신 원주민 지도자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가 봉기를 일으킵니다. 스페인군에 대항하여 싸웠던 잉카의 마지막 왕족의 이름이 '투팍아마루'인데,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이 투팍아마루가 언젠가 다시 돌아와 그들을 고난에서 구원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콘도르칸키는 스스로를 '투팍아마루2세'라 칭하고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쿠스코를 비롯하여 남부 페루 및 볼리비아와 아르헨티나 북부까지 점령하는 위세를 떨칩니다. 사로잡은 스페인 총독에게는 녹인 금을 먹게 한 뒤 처형하여, 황금에 대한 탐욕을 상징적으로 응징합니다. 

그러나 그의 봉기는 이듬해 스페인군에 의해 진압당합니다. 콘도르칸키는 자신의 가족이 눈 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목격해야만 했고, 그 자신 역시 광장에서 사지가 찢기는 참형으로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 콘도르칸키에 대한 애잔한 마음과 잉카인의 슬픔을 담은 노래가 <엘 콘도르 파사>의 원형이 되는 민요입니다.

"오~ 하늘의 전능한 주인인 콘도르여, 우리를 안데스 산맥의 고향으로 데려다 주오.
잉카의 동포들과 함께 살던 곳으로 돌아가 마추픽추와 와이나픽추를 거닐고 싶어요."

팝송 가사보다 민요의 가사에서 훨씬 더 비장미가 느껴집니다.

당신은 언젠가 자유(自由)를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로 풀이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의 이유, 이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자부심이며, 자기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멀고 힘든 여정이라 하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쿠스코를 거쳐 마추픽추에 이르는 여정 동안 잉카의 흔적과 내가 느낀 공감의 단어는 '자유'였습니다. 자기의 이유,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이 밀려난 자들의 애환과 그 처지를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 그것은 비단 잉카인들만의 경험과 정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피사로 일행을 처음 맞이했을 때 잉카인들이 이 수염난 백인들을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전설 속의 구원자 '비라코차'로 착각하지 않았더라면, 잉카의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해봅니다. 

맹목적인 구원에 대한 바람과 스스로를 해방하기 위해 '투팍아마루'를 자처했던 콘도르칸키의 선택이 오버랩됩니다. 자유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평범한 역사적 진실을 마주합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20년전 이곳을 다녀간 뒤 달라진 이야기 하나를 전하며 편지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단순히 혈통과 피부색을 떠나 피사로는 자유를 억압하고 파괴와 학살을 자행한 인간 탐욕과 잔인성의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이런 피사로의 기마동상이 페루의 수도 리마 광장의 한복판을 장식하고 있음에 당신은 씁쓸한 심경을 가졌었습니다. 이 피사로의 기마동상은 2001년에 철거되었다고 합니다.

덧붙이는 글 | 2016년 12월 말부터 약 1년간의 일정으로 세계일주 인문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태그:#잉카, #쿠스코, #마추픽추, #콘도르, #투팍아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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