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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대표가 7일 오전 부산시의회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대표가 7일 오전 부산시의회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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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당 안철수 의원이 13일 광주에서 세인의 입길에 오를 만한 표현을 했다.

광주전남언론포럼 대선주자 토론회에서 이런 문답이 오갔다.

- 4년 전 대선 당시 문 후보를 제대로 돕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이 있다.
"사실관계부터 말하겠다. '돕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3자대결로 가면 100% 진다고 생각했다. 이길 수 있는 확률을 1% 라도 높이는 방법은 제가 양보하는 것이었다. 후보 양보 이후 40회가 넘는 전국유세, 3회에 걸쳐 공동유세를 했다. 어떤 조건도 걸지 않았다. 대통령 당선 이외 지분도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했다. 선거 하루 전날 밤에 강남역 사거리에서 목이 터져라 외쳤다. 돕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생각해 보라. 양보한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사실은 고맙다고 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 아닌가? 동물도 고마움을 안다. 짐승만도 못한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이 "문재인 후보가 짐승만도 못한 것이냐?"고 확인성 질문을 하자 안 의원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제가 갈수록 (발언이) 세진다"고 답했다. 문재인 후보가 짐승이라는 게 아니라 문 후보의 입장에 서서 안 의원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그리 지칭했음을 밝힌 것이다.

'인간의 도리'를 말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짐승만도 못한'이라는 표현이 문제가 됐다. 정치를 하기 전 안 의원의 모습은 이렇지 않았다. "나는 남한테 화를 내지 않고 나 자신한테 화를 내고 샤워할 때 물을 크게 틀어놓고 한번 고함을 지르곤 하는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푼다"고 말했던 사람이 안 의원이다(2012년 7월 23일 SBS '힐링캠프').

'막말의 종결판'(더불어민주당 이석현 의원)이라는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독철수(독한 안철수)가 된 것은 잘했다고 본다"(박지원 대표),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그런 말을 했겠나"(주승용 원내대표)라는 지원사격을 받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안 의원의 뜻을 헤아리려는 소속정당의 논리일 뿐이다.

사실 안 의원은 최근에도 비슷한 말을 자주 했다.

설 연휴 기간이었던 1월 29일 페이스북 라이브방송에서 한 시청자가 비슷한 질문을 하자 "제가 안 도왔다는 건 정말로 흑색선전이다. 진실을 알면서도 흑색선전을 한다면 그건 인간으로서 도리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틀 뒤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는 "(문재인이 쓴 책에서) 지난 대선 때 제가 미국으로 간 것에 대해서 짧게 쓰신 내용을 봤다. 힐러리가 선거에서 졌다고 샌더스 때문에 졌다고 탓했느냐? 인류 역사상 누가 안 도와줘서 선거에서 졌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고 질타했다.

'안철수 투표일 행적' 잘못 파악한 문재인 대담집

그가 언급한 책은 대담집 '대한민국이 묻는다'를 의미한다. 그 책에는 '안철수'라는 이름이 딱 두 번 나오는데, 내용은 이렇다.

- 그때 만약 안철수 의원이 미국으로 가지 않고 함께 선거운동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식의 아쉬움을, 이랬더라면 저랬더라면 하는 많은 아쉬움들이 있지만 알 수는 없죠."

- 왜 붙잡지 못했습니까? 함께하자고. 그렇게 단일화를 해놓고 미국으로 가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제가 안철수 의원이 아니니까 그 이유는 알 수 없죠. 그건 그분의 몫이 아니겠습니까?"

문 후보는 2013년 저서 <1219 끝이 시작이다>에 "안 후보가 아픔을 삭이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 후 저의 당선을 위해 열심히 지원했다. 그것이 기존의 여의도 방식과 달라 소극적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저는 그가 자신의 스타일로 최선을 다해 줬다고 생각한다"고 기술했다.

그런데, 2017년 책의 질문자는 사실관계부터 잘못 파악하고 있다. 투표일이었던 2012년 12월 19일 안 의원이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한 시각은 오후 6시 이후였다. 그때는 투표도 이미 끝났고, 선거운동을 더하려야 할 수도 없는 때였다. 당시 안 의원을 수행했던 참모도 "성의껏 도운 게 맞다. 오전에 투표까지 다 마치고 비행기를 탄 건데 더 이상 뭘 해야 하냐"고 반문했다.

어쨌든 2013년 저서와 2017년 저서에서 드러난 표현 차이는 미묘하지만, 나는 둘 다 문 후보의 진심을 드러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안 의원은 "인류 역사상 누가 안 도와줘서 선거에서 졌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고 공격했지만, 문 후보의 책에는 대선 패배의 가장 큰 이유에 대해 "저 자신이 부족했던 탓이다. 제 확장력 부족이 패인"이라고 흔쾌히 인정한 대목도 나온다.

다만, 2013년에는 둘이 정치적으로 함께할 공간이 있었던 만큼 '미래의 동지'에 대한 각별한 후의가 남아있었지만 4년이 흐른 지금은 둘의 '재결합'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올해 나온 책에서도 안 의원에 대한 언급을 부쩍 줄였는데, 안 의원이 이 대목을 콕 집어서 계속 문제제기하는 것도 그 사이 달라진 정치 지형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2012년 대선에서는 어느 한 쪽의 우열을 가리기 힘든 형세였다면, 지금은 한참 앞서나가는 문 후보를 안 의원이 추격하는 기세이기 때문이다.
문 후보는 안 의원의 '짐승' 발언을 "그냥 넘어가죠"라며 대응하지 않았는데, 두 사람의 처지가 뒤바뀌었다면 안 의원도 문 후보처럼 대응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안 의원의 발언에서 주목한 부분은 문 후보를 겨냥하는 듯한 발언을 하면서도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명쾌하게 정리한 것이다.

정치에선 상대방 '사이즈'·상태 정확히 알아야 낭패 면한다

안 의원은 문 후보와 그의 열성적인 지지자들을 분리할 줄 알았던 것이다. 문재인 지지자들 중에서 까칠한 언사로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이 일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문 후보나 지지자 그룹 전체의 책임으로 등치시킬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자신의 비판이 문 후보를 정면으로 겨냥한 게 아니라는 점을 좀 더 분명히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그럼에도 정치의 세계에서 전체와 부분을 분리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덕목이다. 내가 싸울 상대방의 '사이즈'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엉뚱한 계책을 꺼냈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민주당 경선 국면에서 문재인 후보를 '기득권 세력'이라고 맹비난한 박원순 서울시장이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

박 시장은 예전 시장과 다른 잣대로 평가받을 만한 행정가였지만, 그것이 '대통령 감'이라는 평가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한때 그를 돕던 사람이 문재인 캠프로 간 것이나 문 캠프 참여인사가 그의 서울시장 경쟁자로 나서려는 것까지 문 후보가 책임질 부분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박 시장은 문 후보에게 이런 상황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고 했다. 박 시장은 자신의 생각을 대중들에게 이해시키는 데 실패했고, 급기야 경선 레이스를 포기했다(관련기사: 문재인은 기득권 세력", 박원순 시장은 왜 화가 났나).

민주당 싱크탱크의 개헌 보고서 논란 이후 '문자 테러'를 당한 의원들의 사례도 그렇다.

스마트폰 시대에 의원들의 전화번호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모바일 메신저로 몇 다리만 걸치면 알 수 있고, 어느 한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수천, 수만 명에게도 전할 수 있다.

대통령 탄핵소추를 앞두고는 탄핵안 표결에 미온적인 새누리당 의원들이 주요 타깃이 됐고, 개헌 보고서 논란 때는 민주당 지도부에 반기를 든 의원들이 "지금의 당이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부 누리꾼들의 표적이 됐을 뿐이다.

거의 모든 언론이 대통령 탄핵을 묵시적으로 지지하는 상황에서 새누리당 의원들이 당한 고초는 '민의의 표출'로 가볍게 치부됐다. 그러나 민주당 비주류 일부 의원들에 대한 '문자 테러'는 종편이나 보수언론들에 의해 '공포 정치'나 '겁박'으로 공격받았다. 이들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테러집단이라면, 이들의 리더는 누구일까? 그 리더를 밝혀내고 그를 꾸짖거나 압력을 가하면 테러 행위는 근절되거나 완화될까? 아무도 속 시원한 답변을 못하는 사이에 논쟁의 수레바퀴는 헛돌기만 할 뿐이다.

국회에서 만나는 정치인들을 보면, 정적에게 과대표성(過代表性)을 부여해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이들이 많다. 상대방의 비열함과 악독함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거기에 맞서는 자신의 정당성이 배가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상대방 공격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출구를 찾지 못하는 정쟁들은 대부분 자신에게 지나친 정의로움을 부여하면서 시작되곤 했다.

정치가 그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운동장인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2012년 제도권 정치 무대에 동시에 입문한 문재인과 안철수가 그의 선배들만큼이나 오염됐는지에 대해서 나는 여전히 '노'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문재인과 안철수가 대선 국면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 정치는 몇 발자국이라도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대선주자가 더더욱 말을 가려서 할 때다.


태그:#안철수, #문재인, #박원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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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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