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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눈에는
▲ 제법 숙녀티가 난다, 엄마 눈에는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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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까꿍이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학교에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냐 물어보기도 전에 나에게 달려와 들뜬 목소리로 조잘거린다.

"있잖아, 엄마, 우리반 철수(까꿍이가 비밀을 요구해 부득이하게 가명을 쓴다)가 글쎄, 나를 좋아한대!"
"뭐라고? 철수가?"
"응, 철수가!"
"고백했어?"
"아니."
"그런데 어떻게 알아?"
"어제 나 집에 언제 가냐고 묻더니 오늘도 묻는 거야. 느낌이 딱 오더라고. 그래서 오늘 물어봤지. 너 나 좋아하냐고?"
"그랬더니?"
"말없이 고개만 끄덕하더라. 그리곤 자기 누나한테도 우리 반 애들한테도 다 비밀로 하래."

첫 고백을 받은 까꿍이

철수라면 나도 얼굴을 아는 아이다. 지난 가을에 동네 공원에서 가을 생일파티를 함께 했다. 눈웃음이 귀엽고, 놀리는 게 애정표현인 개구쟁이 8세 남자아이들과 달리 친절하고 수줍움을 좀 타는 아이였다. 반면 까꿍이는 치마보다 편한 고무줄 운동복이 좋고 예쁘다는 말보다 웃기다는 말을 더 좋아하는 말괄량이다. 오죽하면 방과 후 농구를 같이 하는 고학년 오빠들이 '깡패'라는 별명을 지어줬을까! 수줍은 아이에게 씩씩한 아이가 호감 있게 다가온 듯하다.

그런 까꿍이와 정반대 성격의 남자아이가 고백했다니. 정확하게 까꿍이가 고백을 받아냈다니! 그 날 이후 까꿍이는 매일 학교에 가 철수에게 방과 후 일정을 물었다. 수요일 오후 방과 후로 농구 한 과목만 듣는 까꿍이는 거의 매일 학교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다 집에 온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방과 후와 학원 수업으로 바빠 학교 도서관에서 잠시 시간이 비는 친구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친구와 놀기 위해, 이젠 철수와 놀기 위해.  

사실 까꿍이는 철수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조용한 성격의 철수인지라 평소 까꿍이와 자주 부딪힐 일이 없었던 듯했다. 그러나 태어나 처음 받아보는 고백에 1학년 내내 좋아하던 남자아이를 아쉬움 없이 접어버렸다.

고백의 마법

너의 길로!
▲ 뛰어라! 너의 길로!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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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아닌 고백을 받은 후 까꿍이는 매일 분홍빛이다. 겨울 방학 중엔 개학 날이 다가온다고 기분이 안 좋고, 개학해선 1학년이 며칠 남지 않았다며 우울하더니, 어느새 다 잊었다. 머리를 풀고 간다는 얘기까지 한다.

"엄마, 철수는 왜 나를 좋아할까? 내일 가서 물어봐야지, 나 어디가 좋냐고."

누군가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는 일! 생각만 해도 설레는 일이다. 자존감이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까지 올라간 기분이다. 벌써 30여 년 전의 일이다. 여덟 살 학교에 입학해 옆 동네 남자아이가 하교 길에 내 손을 잡았던 날, 그 날의 콩닥거림과 볕이 지금도 기억날 정도다.

나를 좋아한다는 상대에게 받고 싶은 확인은 상대의 감정보다는 나도 잘 몰랐던 나의 좋은 점, 특별한 점일 것이다. 여덟 살에서 아홉 살, 십대로 진입해 가는 아이는 열심히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 남들과 다른 나만의 세계를 만들고 싶은데, 그렇지 않음에 좌절도 겪는다. 오죽하면 스즈키 노리타케의 그림책 <천만의 말씀>의 첫 시작이 이런 구절이지 않던가.      

"나는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아이. 나만 할 수 있는 거. 나한테만 있는 훌륭한 점, 그런 건 하나도 없는 그저 보통 아이. 코뿔소는 좋겠다. 갑옷같이 생긴 멋진 가죽이 아주 근사하니까. 아, 부럽다."

코뿔소가 부럽다는 '보통 아이'의 고민은 까꿍이 또래는 물론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문득문득 찾아온다. 그럴 때 "네가 좋아"라는 고백을 받는다면 순간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되는 마법에 걸려 스스로 빛을 낸다. 지금 까꿍이가 딱 그렇다.

계속 불발되는 데이트, 엄마가 오작교를 놓다

까꿍이는 하교 후 운동장에서 철수와 놀며 자신의 어떤 점이 좋은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철수는 매일 학원차를 타야했다. 철수와 먹을 초콜릿까지 아껴두고 있는데 말이다. 철수와 같은 아파트에 산다면 오며 가며 보고 학원 끝난 후 잠시 집에 놀러라도 갈 텐데. 까꿍이의 아쉬움이 커져만 갔다. 자신이 특별할 수 있는 기회가 자꾸 사라지니, 애가 탔다. 

보다 못해 내가 나섰다. 아이 친구들 사이에 끼어들지 말아야지 했는데, 엄마들이 약속을 먼저 잡아야 친구 집에 놀러가는 게 편한 요즘 같은 땐 엄마의 오지랖도 필요했다. 철수엄마에게 연락을 해 토요일 철수 남매를 집으로 초대했다.

대망의 첫 데이트를 앞두고, 까꿍이는 한 달을 잔소리를 해도 치우지 않던 자기 방을 치우고, 남동생들은 누나보다 더 들떠 토요일 정오를 기다렸다. 드디어 토요일 12시, 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철수 남매와 우리 집 삼남매가 만나 집으로 왔다. 언니가 없는 까꿍이는 철수의 누나와, 형이 없는 산들이는 철수와 단짝이 되어 정말 잘 놀았다. 막내 복댕이는 여기 저기 깍두기로 끼다 결국 수준 미달로 혼자 뽀로로 퍼즐을 맞추며 놀았다지.

동네 친구, 동네 언니, 동네 형아

막내는 영원한 막내
▲ 동네 언니, 동네 형아가 생겼어요 막내는 영원한 막내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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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뜬 엄마는 '데이트'라고 표현했지만 동네 친구들이 모여 동네 언니, 동네 형아가 함께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노는 것이다. 고백이라고 했지만 이제 겨우 아홉 살의 고백은 일반적인 그 고백과는 다르다. 친구가 되고 싶다는, 같이 놀고 싶다는 뜻이다.

수줍은 고백을 왈가닥 까꿍이가 되물어 받아냈지만 그 덕분에 남매들이 만나 서로에게 없던 언니, 여동생, 형, 남동생이 생겼다. 토요일에도 직장에 나가는 철수 엄마 대신 철수 남매를 돌봐주는 몇 시간으로 철수 엄마와 나도 더 가까워졌다. 든든했다. 엄마들끼리 약속을 정하지 않아도 아이들 마음대로 친구들 집을 놀러다니면 더 좋겠다. 우리집은 언제나 열려 있단다, 얘들아!

친구 온 기념으로 IPTV 결제까지!
▲ 사이좋게 영화관람 친구 온 기념으로 IPTV 결제까지!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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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정월대보름이라 아이 다섯을 데리고 달집태우기 행사를 보러 갔다. 처음 달집을 본다는 철수 남매는 무척 즐거워했다. 좋은 동네 어른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 까꿍이가 귓속말로 달집에 건 철수의 소원지 내용을 나도 함께 빌며 까꿍이의 첫 데이트를 기록해둔다.

"100살까지 까꿍이 기억하게 해주세요."

아! 나는 이런 고백을 받아봤던가, 해봤던가! 부럽다. 이런 고백으로 웃고 울며 아이들은 자라겠구나. 더 늦기 전에 나도 오래 기억하고 싶은 내 주위 고마운 이들에게 진심으로 고백해야겠다. 

평범해도, 특별해도, 다 너만의 날들, 너만의 봄!
▲ 응원한다, 너의 봄! 평범해도, 특별해도, 다 너만의 날들, 너만의 봄!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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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육아일기, #까꿍이, #철수,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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