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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내놓은 복지 혜택은 선별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꼭 필요한 당사자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기초수급자로 선정되면 7대 급여(교육, 주거, 의료, 생계, 자활, 장재, 해산)와 30여 가지의 각종 무료, 감면, 할인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매년 최저생계비와 중위소득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

살기 위해 "진짜 가난하다"고 증명해야 하는 상황. 이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탈락하는 사람들이 발생하고, 자신의 가난을 증명할 여력도 없이 사각지대에 사는 이들은 잊힌다. 사각지대의 사람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시점 중 하나가 졸업 시즌이다.

졸업과 함께 찾아오는 절대적 빈곤

2일 오전 서울 관악구 문영여고에서 열린 졸업식에서 졸업생이 담임선생님과 포옹을 하고 있다.
 2일 오전 서울 관악구 문영여고에서 열린 졸업식에서 졸업생이 담임선생님과 포옹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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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축하', '새로운 시작', '꽃다발' 혹은 오래도록 구전된 노래 등을 통해 졸업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청년들에게 졸업의 키워드는 취업이고,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는 자녀가 있는 장년들에겐 교복이다. 졸업식에 꽃다발이 있으면 더 기쁠 수 있겠지만 꽃다발이 없어도 졸업식은 가능하다. 남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게 가지고 있는 상태는 속상할 수도 있지만 문제가 되진 않는다.

하지만 교복은 다르다. 졸업과 함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최소한의 자원이 교복이다. 한국에서는 교칙으로 교복을 입는 학교가 대다수이고 그 비용은 대부분 개인이 부담한다. 교복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는 출발선에 설 수 없다. 저소득층은 졸업과 함께 절대적 빈곤을 체감한다.

한참 예민한 사춘기를 맨몸으로 돌파하는 청소년기 학생에게 '다른 집들과 달리 우리 집은 아직 교복 살 돈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사정을 설명해 이해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유독 철이 든 학생들은 부모님이 교복 살 돈이 없다는 걸 안다. 아니, 부모들이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해도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이 쉽지 않다는 걸.

그래서 조르지 못하고 눈치로 파악해 중고 교복이라도 스스로 구하려고 노력해보다 여의치 않을 경우 주변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영임(가명)이도 빨리 철이 든, 그래서 가난의 의미가 본인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학생 중 하나였다.

남의 세상에 사는 사람들

할머니가 교복값까지 따로 미리 빼놓기에는 삶이 빡빡했으리라.
 할머니가 교복값까지 따로 미리 빼놓기에는 삶이 빡빡했으리라.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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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에 빈 소주병이 나란히 줄 세워져 있다.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주저하니 영임(가명)이가 할머니가 해놓으신 거라며 발로 병을 무심히 차 길을 터준다. 문을 여니 한겨울 추운 날씨를 닮아 앙상하게 구부러진 할머니 한 분이 허공에 손을 벌벌 떨며 상자를 발로 밟아 펼치고 계셨다. 누가 봐도 편견 없이 '가난하구나'라고 판단되는 곳. 집안 곳곳은 할머니의 생활이 그대로 드러났다. 낡았지만 깔끔했고, 부서져 있지만 쓸만했다. 

누군가에겐 일상이고 누군가에겐 남의 이야기가 할머니 입에서 흘러나온다. 김영임(가명, 만 12세)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할머니와 살았다. 막노동으로 생계를 책임지는 아버지가 일하다 목을 다쳐 오랜 기간 병상에 있었다. 일을 못 해 생계가 어렵자 어머니는 자식 둘을 두고 집을 나갔고, 재혼하며 연락이 끊겼다.

작년에는 할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고 생활이 더 어려워져 병원비가 나갔다. "이것저것 급한 것들과 생활비를 쓰다 보니, 일평생 남한테 빚진 적 없이 반듯하게 살아왔는데 말년에 이렇게 빚도 지고 남한테 신세 지게 되었다"며 할머니는 연신 바짝 마른 손으로 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리신다.

"다른 집 아(애)들은 30만 원도 넘는 교복을 돌려입는다고 여벌 옷도 사고는 하든디, 우리 아는 한 개도 내가 못사중게로... 아 앞에서 들 낯짝도 없어부러... 넘(남)의 세상이여.. 울 집 빼고는 다 워데서 그렇게 돈들을 펑펑 써댄댜."

보통 사람들이라고 할머니의 생각처럼 교복을 펑펑 사지는 않는다. 서민들도 한꺼번에 사려면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목돈이 없을 경우 가계에 부담을 더는 방법으로 할부를 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극빈층 일부는 신용불량자이거나 카드 발급이 가능한 직업군이 아닌 탓에, 현금으로만 생활하게 된다. 후자의 경우인 할머니는 당장 그 큰돈을 어떻게 모으나 한숨을 쉬셨다.

몇 달 째 연체된 카드 금액을 넌지시 여쭈니 130만 원가량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지난해 한국신용정보원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금융채무불이행자(신용불량자)는 102만 명, 총 연체액은 이미 130조 원에 달한다. 그중 53%는 1000만 원 이하의 소액 연체자다. 할머니가 교복값까지 따로 미리 빼놓기에는 삶이 빡빡했으리라.

불평등한 평등

흔히들 체념하듯 '이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말하지만, 정들었던 학교를 벗어나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학생들이 첫 번째로 맞이하게 현실이 이렇다는 걸 가벼이 여기면 안 된다.
 흔히들 체념하듯 '이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말하지만, 정들었던 학교를 벗어나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학생들이 첫 번째로 맞이하게 현실이 이렇다는 걸 가벼이 여기면 안 된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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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흘려보내면 밑으로 흘러내려 가야 정상인데, 실제로는 물이 아래로 쭉 흐르는 것이 아니라 물방울처럼 튀어 흩어진다. 복지 또한 세대 간의 단절, 기회 박탈, 정책 등 전달 체계를 막는 사회환경이 중간에 끼어 있어 쭉 흘러내리지 못한 채 물방울이 흩어지는 사각지대가 생기게 된다.

그렇게 '불평등한 평등'이 시작된다. 당장은 같은 교복을 입고, 가난을 눈에 띄지 않게 숨길 수 있지만, 이미 출발선에 서는 준비 과정에서 몇 단계 넘어오느라 지쳐버린 학생들에게 그렇지 않은 친구와 똑같이 달려 보라고 요구할 수 없다.

흔히들 체념하듯 '이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말하지만, 정들었던 학교를 벗어나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학생들이 첫 번째로 맞이하게 현실이 이렇다는 걸 가벼이 여기면 안 된다.

국가 발전의 근간은 교육이다. 특히 중학교는 의무교육이고 의무교육에 필요한 비용은 국가가 부담하는 것이 맞다. 미래 세대인 학생들의 교육은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으로 거품을 뺀 '무상교복'이 '무상급식'처럼 주요 의제가 되어 실현되길 희망한다.

덧붙이는 글 | 이후 염임(가명)이는 필자의 연계로 거주지역 종교단체에서 교복 지원을 약속 받았다. 영임이 이외에도 가정형편이 어려운 어려 명의 학생들이 지역 연계로 교복 구매의 어려움을 덜어냈다. 기사를 읽고 필자에게 특정아동을 후원을 해주기 보다 각자 거주하는 지역 주민센터, 복지기관 등에 문의해 교복 구매에 어려움을 겪는 많은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셨으면 한다(참고로 성남시에서는 2016년부터 중학교 무상교복을 지원하고 있으며 2017년 고교까지 확대 될 예정이라고 한다).



태그:#졸업, #교복, #성남무상교복, #서울 무상교복 , #절대적빈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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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대 일반대학원 박사 과정 (사회복지) -숙명여자대학교 석사 졸업 -前숙명여자대학교 역량개발센터 진단평가실 (前계절학기강의 비인지영역 실습 프로그램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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