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킹>을 연출한 한재림 감독.

영화 <더 킹>은 한재림 감독의 네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이전 작품과 분위기와 결에서 많이 다르다. 이번 인터뷰는 <더 킹>의 탄생 배경, 그리고 한재림의 숨겨진 의도에 집중해서 진행했다. ⓒ 호호호비치


<더 킹>은 분명 회심의 작품이다. 전작 <관상>, 그에 앞서 <우아한 세계>와 데뷔작 <연애의 목적> 등을 선보인 한재림 감독 입장에선 더욱 그렇다. 외형적으로 영화는 우리가 최근까지 봐왔던 사회비판 내지 고발성 요소를 품었고, 그 틈에 풍자 내지 유머를 잔뜩 녹여냈다.

영화는 현재 흥행 중이다. 손익분기점 350만을 넘었고, 설 연휴를 지나며 관객의 꾸준한 선택을 받고 있는 지금까지 다양한 비판도 '필연적'으로 등장했다. 연휴 직전 만난 한재림 감독과 그 부분에 집중해 얘길 나눴다. 이 글은 <더 킹>의 형식과 탄생 배경의 이야기다. 나아가 한 감독의 회심의 수를 엿보려는 의도도 담겨있다.

1인칭 전지적 시점 

우선 형식을 보자. 대놓고 1인칭 시점이다. 주연 조인성의 목소리를 빌려 그가 맡은 한태수 검사의 10대부터 40대까지를 통으로 잡았다. 30년의 시간에 벌어진 각종 사건들을 태수 시점에서 파노라마로 제시한다. 거기엔 분명 노골적인 정치검사로 각종 비위를 몰래 일삼은 한강식(정우성 분)의 모습, 민주화 항쟁 직후 역대 대통령의 공과 등 '공적사건'도 있지만 동시에 여고생을 성추행 한 파렴치한을 잡아넣지 못한 후회, 조직의 일인자로 거듭난 친구 두일(류준열 분)에 대한 복잡한 심경 등 '사적사건'도 담겨 있었다.

"결코 개인적일 수 없는 개인의 전성기를 관객과 함께 같은 시점에서 바라보고자 한" 게 한재림 감독의 의도였다. 이런 형식으로 일부 관객과 평단에선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등의 작품을 언급하며 비교하기도 했다.

"분명 효과적인 방법은 아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분야를 설명하는 다큐멘터리적 방법인데 태수의 30년을 전하기 위해선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언급한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를 비롯해서 폴 토마스 앤더슨의 <부기 나이트> 등등 그런 작품이 많다. <더 킹>이 좀 다른 건 태수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이거든. 앞선 작품에선 주인공 내레이션이 주로 객관적 거리두기를 위해 쓰였다. 

하지만 <더 킹>은 태수의 기억에서 편집되는 일들이라 어떤 건 압축적으로 어떤 건 상상처럼 등장시킨다. 면접장에서 면접관의 뺨을 때리고 배우 차미련이 갑자기 화면에서 튀어나오는 것처럼. 이런 방식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태수를 통해 권력의 정점으로 들어가 개인의 비극과 현대사 비극을 함께 보게 하는 충격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거기서 깨어났을 때 우린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우린 영화 속 굵직한 현대사 묘사와 태수의 치기 어린 모습을 동시에 본다. 전라도 출신의 태수가 겪는 사회적 모순은 곧 우리 사회 권력자들의 민낯이기도 했고, 나아가 순간의 잘못된 선택들이 결합한 비극이기도 했다. 태수가 정치인이 되길 선언하며 "결과가 궁금해?"라고 대놓고 관객에게 묻는 장면은 그런 메시지에 대한 한재림 감독의 직접 화법이었다.

 영화 <더 킹>의 한 장면

영화 <더 킹>에서 각종 사건을 '정치적 판단'에 따라 해결한 검사들. 중심에 선 한강식(정우성 분)은 가장 전형적인 정치검사다. ⓒ 우주필름



<더 킹>의 씨앗들

태수가 직접 부딪힌 검사들, 그리고 정치인과 조폭 이야기를 위한 철저한 취재는 필수였다. 여러 인터뷰에서 나왔듯 현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 구속된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나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연관성도 부정할 순 없다. 정우성이 연기한 한강식이나, 배성우의 양동철 검사 등은 상상의 산물임을 한재림 감독은 강조했지만 영화 속 정의로운 안희연 검사(김소진 분)는 실제 임은정 검사를 모델로 하기도 했다.

왜 하필 본격적인 검사 이야기였을까. 한재림 감독은 "엄밀히 정치검사 이야기"라고 정정해 말했다. "관객들이 직접 권력의 끝을 느끼게 하고 싶은데 재벌은 동화되기 쉽지 않고, 고시를 통해 누구나 될 수 있는 검사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하긴, <더 킹>에도 묘사된다. 흔히 책만 파고 세상물정은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모범생 일부가 진짜 권력을 쥐게 된다고. 한재림 감독은 "시대가 계속 바뀌어 왔지만 김기춘 같은 사람이 왕 노릇을 하지 않았나"고 반문하며, "최근 우병우가 수사를 받으며 웃는 모습에 놀랐고, 이게 모두 결과 위주의 교육이 낳은 결과 같다"고 말했다.

"검사들에 대한 책을 읽었고, 현직에 있는 선후배를 만났다. 검사하면 선입견이 있잖나. 내가 만난 검사는 굉장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매운 닭발을 함께 먹으며 맵다고 주스를 권하며 여러 얘길 했다(웃음). 분명 정치검사는 아니었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서 정치검사가 탄생할까 궁금했고, 그래서 물었다. '선배 검사가 사건에서 빠지라면 빠지겠냐', 다들 자존심이 있어서 그런 일은 없다더라. '만약 무릎까지 꿇는다면?', 대답을 못하더라.  

그게 시작 같았다. 우린 아주 짧은 시간에 선택한다. 자기 소신을 지키다가도 이런 작은 선택이 굉장히 크게 작용하는 것 같더라. 법과 제도가 사회를 움직이고 한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건데 개인감정으로 덮고 제칠 수 있다는 건 어마어마한 힘인 거지. 순간 무서워지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게 정치검사가 되는 과정이겠구나 생각한 거다. 성추행 사건도 검사가 된 후배 이야기에서 응용한 거고, 임은정 검사는 꼭 취재하고 싶었는데 연락이 닿질 않아 못했다."

 영화 <더 킹> 스틸컷

영화는 철저히 태수(조인성 분)의 기억과 판단에 의존해 흘러간다. 그래서 때론 장면이 비논리적이기도 하다. 그의 상상과 주관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태수의 관점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카메라 움직임 또한 <더 킹>을 즐기는 또 하나의 묘미다. ⓒ NEW


그리고 또 하나의 시작점, 가장 본질적일 수도 있는 게 있었으니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다. 이 역시 한재림 감독이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제가 75년생 94학번이다. 어렸을 때만 해도 전두환이 외국에 다녀오면 항상 국내에서 퍼레이드를 하더라. 그게 되게 신기했다. 그 와중에 형들은 데모하고, 길에선 최루탄 냄새가 났다. 그런 혼란 속에 자랐다.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됐고, 노태우와 전두환이 교도소 가는 것도 봤다. 김대중 대통령이 제가 뽑은 첫 번째 대통령인데 그때 참 우리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권력이 시민에게 왔구나 감격스러웠지. 그게 노무현 대통령까지 이어졌고, 새로운 세상이 온 줄 알았다. 

근데 1년 만에 탄핵안이 가결됐고, 결국 서거까지 갔다. 아, 기득권 세력이라는 게 잠시 안보였던 거지 엄청나게 뿌리 깊게 있었다는 걸 절감했다. 그들 입장에서 상업고등학교 출신의 노무현 당선은 오류였구나. 그런 게 내게 무력감과 좌절감을 줬다. 착각하고 살았다는 게 슬펐다. 한국사회 만큼 권력자들이 똘똘 뭉쳐있는 나라가 있을까. 또 세월호 참사 때 아무 작용도 안 한 시스템을 보며, 우린 왜 우리의 힘을 그들에게 맡겼을까.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말렸다. 위험한 얘기 아니냐고. 근데 다들 잘만 살고자 했고, 뭔가를 잊어버려서 지금의 비극이 나왔다고 생각했다. 태수도 후회하잖나. 그때 성추행범 최 선생을 구속했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권력자를 비웃고 우리가 주인의식을 가지면 좀 더 나은 세상이 오지 않을까. 정의를 얘기하는 시대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아쉬움에 대해

 영화 <더 킹>을 연출한 한재림 감독.

<더 킹> 이후에 대해 비보도 전제로 한재림 감독이 운을 뗐다. 그의 상상력이 전작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잘 어우러지길 바라본다. ⓒ 호호호비치


이 직설화법을 한재림 감독은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하긴, 부정하거나 애매하게 답하는 순간 이미 그건 직설이 아니니까. 나아가 한재림 감독은 "촌스럽지만 제목을 <더 킹>으로 붙인 것도 김기춘 같은 사람이 왕 노릇을 했지만 국민이 진짜 왕이란 얘길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며 "촛불이 권세 있는 사람을 다 교도소에 넣고 있듯 이게 바로 국민의 힘이라 말하고 싶다"고 밝혔다.

"영화를 만들 때 자기검열은 물론 있었겠지. 하지만 최대한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까지 못가니까. 오히려 내 검열은 <더 킹>을 쓸데없이 자극적으로 그리지 않는 것에 발동했다. 권력을 혐오스럽게 그리는 게 아니라 유혹적으로 그리고 싶었다. 그래야 그 속성을 제대로 알 수 있으니까. 검사들이 점을 보는 것도 허구적인 상상이었는데 진짜 최순실의 샤머니즘 정치 이야기가 나올 줄 누가 알았겠나. (지금의) 권력자들이 그 정도라는 거다. 그래서 우리가 잘 선택해야 하고." 

6개월의 구상, 3개월의 집필 작업 이후 <더 킹>이 탄생했다. 어찌 보면 다른 작품에 비할 때 나름 빠르게 태어난 운 좋은 작품이다. 신선하고 패기 있는 데뷔작으로 영화계의 주목을 받아온 그는 <더 킹>을 포함해 전작 모두를 아쉬워했다. '감독의 경쟁작은 바로 전작'이라는 영화계 고언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어쩌면 이 아쉬움이 다음 작품으로 나가게 하는 원동력 아닐까. "<우아한 세계>도 <관상>도 늘 아쉬웠다"며 한재림 감독이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덜 포기하는 게 영화를 위해서 좋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다음 작품엔 더 적게 포기하겠다"고 나름의 각오를 다졌다. 그 눈빛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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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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