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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화가의 '촛불시민 국민주권자 행진도1'
 김봉준 화가의 '촛불시민 국민주권자 행진도1'
ⓒ 김봉준 화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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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목판화와 걸개그림으로 널리 알려진 김봉준 화가는 20여 년 전 유배자처럼 강원도 문막 산골로 들어왔다. 이곳에서 생태와 신화, 마을 등을 예술의 화두로 움켜쥐었다. '오래된 미래'를 통해 자신의 상처투성이 영혼을 치유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동아시아 문화 원형'을 탐구하며 '푸짐하고 넉넉하여 푸지다'는 풍요를 꿈꾸었다.

하지만 민중의 뜻에 어긋난 권력은 그를 다시 연대의 광장으로 불러들였다.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성주에 내려갔고, 광화문 광장에서 '박근혜 탄핵 촛불'을 들었다. 그는 작은 마을의 사드 배치 반대 투쟁과 100만 명이 모여든 촛불집회를 고스란히 붓그림으로 기록했다. 조선시대 풍속화를 계승하면서도 현대적으로 진화 시킨 '새로운 역사풍속화'의 탄생이다. '전통 붓의 미학'을 재발견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1980년대 목판화, 1990년대 산수풍속화, 2000년대 흙조각을 관통하는 미학도 '따뜻하고 푸지고 신명난' 붓에서 나왔다.   

지난 12일 그는 '성주 평화아리랑'과 '촛불시민 국민주권 행진도' 시리즈 등을 모아 서울 종로의 길담서원 한뼘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었다(2월 10일까지). 자신의 생애에서 마지막 시민혁명일지도 모르는 촛불시민혁명의 거대한 서사를 완성해 가고 있는 그를 지난 17일 오후 4시 길담서원에서 만났다.

김봉준 화가.
 김봉준 화가.
ⓒ 구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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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겨울은 따뜻한 세상을 향한 절규였다"

- 그림전 이름이 '흙수저 따뜻한 겨울'인데 흙수저에게 따뜻한 겨울이 있을 수 있나?(웃음)
"촛불집회 때 희한한 깃발이 많이 나왔어. 누군가 흙수저 깃발을 흔들고 다녔다고. 그 깃발에 나온 것을 전시회 포스터에 끼워 넣은 거지. 어렵고 힘들게 사는 우리 민중들에게 올 겨울은 진짜 희망과 따뜻한 새로운 세상을 향한 절규였고, 거대한 몸짓이었어. 올 겨울은 특별히 따뜻한 소망을 담고 있지."

- 사드 반대와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에 참가한 경험이 이번 전시회의 바탕이 된 것인가?
"그렇지. 지난 여름에 성주에 갔어. 7월인가 8월인가 그래. 성주에서 사드를 갖고 투쟁하는 게 간단치 않아. 가장 강력한 평화운동인데 굉장히 힘들고 센 주제야. 그런데 매일 쉬지 않고 가잖아. 어떻게 작은 마을에서 이렇게 가열차게 할 수 있을까 궁금했어. 그래서 갔어. 2박 3일 동안 있으면서 봤지. '아 이렇게 싸울 만하구나, 여기에는 내재적인 힘이 있구나' 문화적 관점에서 성주가 다시 보이더라.

성주는 씨족 문화의 뿌리가 깊어. 성주 이씨, 성주 김씨니 하는 씨족이 19개나 돼. 성주 가야의 발원지야. 가야국가의 고분도 있고. 성산포대라고 부르는 공군부대가 상주하고 있는데 거기다 사드를 배치하겠다는 거야. 읍내까지 1.5km야. 사드를 배치하려면 오로지 성주 읍내를 통과해야 한다고. 그런데 포에서 감시하는 과정에서 적외선이 나온다는 거야. 그거 쐬는 게 기분 나쁜 거지. 건강에 안 좋다는 얘기도 있고. '청정한 산속에서, 작은 읍과 군이 왜 이렇게 큰 재앙을 맞이해야 하나?' 이런 분노가 컸어. 여야, 이념에 상관없이 생태공동체를 지키겠다는 본능적인 저항이 셌지.

거기다가 공동체 문화가 강해. 각성받이(한 성씨만 모여사는 마을에 그 성씨와 다른 성씨를 가진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가 강해. 벼농사를 하면서 협동농업을 해왔어. 만나는 사람이 다 친척이거나 이웃이야. 그러니 단합이 얼마나 잘 되겠어? 그런 판에 군인이 와서 사드를 배치하겠다고 선포하자 가장 먼저 성주여고생들이 들고 나왔어. 황교안 국무총리가 성주에 왔을 때 피켓을 들었던 애들이 그 여고생들이야.

그리고 조직적으로 대응할 만한 지도력을 가진 농민회가 좋아. 전농 지부가 오랫동안 잘 조직돼 있어. 풍물패 등 문화패들도 있어. 전국마당극제를 성주에서 한다고. 특히 멋있는 아줌마들이 많아. 성주로 시집온 며느리들이 아주 좋아. '사드는 아니다', '근혜는 아니다' 등 가사도 바꾸어 부르고. 그 아주머니들이 신세대 며느리야. 그렇게 재밌고 줄기차게 할 수 있는 토대가 형성돼 있더라고."

- '외부세력설'이 나왔는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가서 자세히 들여다 보면 금방 알 수 있어. 거기 있는 사람들은 공동체 문화, 민중적 문화의식, 정치적 비판의식이 다 충만해. 그러니까 빨리 결합할 수 있었던 거지. 사드가 워낙 어려운 주제여서 지식인들이 강연도 하면서 점점 상승 고조된 것도 있어. 하지만 그들이 없어도 그 사람들은 줄기차게 싸울 수 있는 토대가, 실력이 있더라고.

성주의 사드 배치 반대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지. '우리가 헛살지는 않았구나.' 1980년대 문화운동을 했던 것들이 이렇게 쌓이고 쌓여서 촛불시민혁명이 온 거야. 다 연결돼 있어. 그때의 후배들이 촛불광장에 모이는 거야. 문화단체들도 조직을 가지고 참여하고."

김봉준 화가의 '촛불시민 국민주권자 행진도3'
 김봉준 화가의 '촛불시민 국민주권자 행진도3'
ⓒ 김봉준 화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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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국가는 광장을 시민에게 돌려줘야"

- 오랫동안 민중문화운동을 벌여온 작가에게 박근혜 탄핵 촛불 집회는 어떤 의미인가?
"내가 1980년대 5.18을 겪었어. 그리고 포고령 위반자가 돼 직장을 잃었지. 그리고 나서는 재야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어. 내 삶 자체가 블랙리스트일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1987년에 좌절하잖아. 양김이 분열하고, 노태우가 당선되고. 죽 쒀서 개 줬지. 그런데 30년 만에 시민혁명 시기가 온 거야. 그러니 산골에 가만 있을 수 있나? (내 생애에) 다시 올 수 없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잖아. 이것을 놓치면 우리는 다시 노예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어. 죽 쒀서 개 줘서는 안 되지. 그런 절박감이 있었어. 촛불 집회는 마지막 시민혁명의 기회, 그런 절박감으로 이해했어."

- 촛불집회를 미학적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어떤가? 
"독창적 개성이 있으면서 세계사적 보편성도 있어. 우리 방식으로 제대로 된 나라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요구와 열망이 모였잖아. 미완의 혁명을 넘어서 (진짜) 근대적인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요구들이 다 모였다고. 근대국가가 요구하는 것이 뭐야? 인권, 평화, 환경, 여성, 복지, 노동, 지역자치, 국민주권 등이잖아. 이런 것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 상태에서 국민국가, 근대국가 흉내만 내고 있었던 거야. OECD에 참여하는 12대 강국인 것처럼. 그런데 그게 '개뻥'인 것이 다 드러났잖아.

그래서 이제는 제대로 된 근대국가로 가야 한다는 열망이 크게 일었어. 게다가 그것을 요구하는 방식 자체가 개성적이고 독특했지. 세계 시민들의 시위를 다 보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평화적인 시위를 본 적이 없어. 100만 명이 모이는데 이렇게 평화적이야. 세계가 놀라. 그러면서 100만 명이 모인 집회가 골계미, 해학, 풍자가 강해.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게 굉장히 많아. 굉장히 독특하게 민족적 심성이 드러난 거지. 그런 집회를 보면서 '이거 재밌네'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거야."

- 촛불집회에서 골계미, 해학, 풍자가 돋보였다고 했는데 특별히 주목한 게 있었나?
"'내시환관당', 얼마나 웃겨. '흑수저당'도 있고, '이게 나라냐?'고 하는 것도 있고. 경찰 버스에 붙인 스티커에도 재밌는 게 많았어. '개돼지의 나라, 우리는 개돼지가 아니다'가 있었고, 개돼지가 촛불을 들고 시위하는 그림도 봤지. '개돼지로는 미래가 없어요, 시민의 힘이 필요해요'라고 쓰고 촛불을 든 개돼지를 손으로 직접 그린 것에 주목했지. 불법주차 단속을 당하던 처지에서 '불법주차 차 빼!'라는 스티커도 만들어서 경찰 버스 유리창에 붙이고. 그 스티커가 떼어지지도 않아(웃음). 평소에 (마음에) 묻어놓았던 주장들이 나오기 시작한 거지.

예술가들도 매주 열심히 나왔어. 그동안 쌓이고 쌓인 거야. 가난도 힘든데 성질을 건드린 거지(웃음). 나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긴급제안하고자 해. 대선에 출마하려는 후보자들이 이것을 공약으로 내세웠으면 좋겠어. 뭐냐 하면 촛불 시민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잖아.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 국면까지 온 거야. 시민들이 광장에서 외쳤기에 가능한 거였어. 그런 열망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 시민들이 모인 각 도시의 광장을 '촛불시민 광장'으로 선포하고, 매주 토요일을 그 광장에서 놀 수 있도록 만들어 달라는 거야.

대선이 끝나면 세월호 유가족도, 블랙 텐트도 다 철수해? 서울광장에 중앙 분리대가 있는데 국가행사만 하려고 했던 거잖아. 광장을 우리에게 돌려주라는 거야. 그 광장을 민주광장으로 살려야 민주주의가 살아나. 우리의 광장문화는 이렇게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1980년부터 시민과 권력이 광장을 뺏기 위해 피튀기는 싸움을 해왔어. 최루탄 쏘고, 화염병 던지면서 밀고 당기기를 해온 거야. 그러다가 100만 명의 인파에 의해 광장이 우리 목전에 와 있어.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힘도 광장에서 나와. 그래서 새롭게 국가가 만들어지면 광장은 시민들에게 돌려줘야지."

김봉준 화가는 지난 21일 13차 촛불집회에서 '시민촛불행진도 배너 시민과 함께 그리기 체험 행사'를 진행했다.
 김봉준 화가는 지난 21일 13차 촛불집회에서 '시민촛불행진도 배너 시민과 함께 그리기 체험 행사'를 진행했다.
ⓒ 김봉준 화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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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은 못처럼 박아놓고 쥐꼬리처럼 사라지는 거야"

김봉준 화가의 붓그림전 '따뜻한 겨울' 포스터.
 김봉준 화가의 붓그림전 '따뜻한 겨울' 포스터.
ⓒ 김봉준 화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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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들에게는 판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번에는 붓그림이다.
"그림 양식의 기본은 붓에서 온다고. 왜 그러냐 하면, 서양에서는 펜이나 연필로 하는 표현 방법, 묘사법이 있어. 반면 동양에서는 붓으로 하는 묘사법이 있다고. 그런데 펜이나 연필로 대체되면서 갑자기 붓이 사라져 버렸어. 붓이 근대적 필기도구나 회화도구로 적당하지 않는 게 아니야. 익숙치 않아서, 몰라서 그냥 버려 버린 거야.

하지만 붓은 그 이상으로 시각적 소통에 유용해. 정서적인 특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표현법이야. 우리 정서에 적합한 표현도구였지. 붓으로 글씨만 쓰는 게 아니라 그림을 그렸어. 난 조선 시대 신윤복이나 김홍도의 풍속화가 없었다고 걸 상상할 수 없어. 그게 없었으면 중요한 공동체 문화가 남았겠어? 붓이 없었으면 말이야. 붓은 다정하고, 따뜻하고, 푸지고, 신명나는 걸 표현하는 데 적합해. 그런데 왜 이걸 버렸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고.

우리에게도 공동체 미술이 있었어. 난 그것을 찾아 다녔는데 만나기가 쉽지 않았지. 그러다 붓의 원리를 아는 스님한테 불화를 배우게 됐어. 처음엔 불화, 불교미술을 공부했어. 불화, 고구려 변화, 민화, 인물화, 풍속화, 진경산수화 등은 다 연결돼 있어. 붓의 원리가 다 관통하고 있다는 거야. 그래서 따뜻하고, 푸지고, 신명난 우리 붓을 계승하자고 한 거지. 공동체적 미감이 있는 우리 붓을 계승하자고 말이야. 우리 전통에 관한 상식이 없는 친구들도 내 그림을 보면 구수하고 따뜻하대. 그게 붓 때문이야."

- 언제부터 붓그림을 시작했나? 스님에게 불화를 배웠다고 했는데. 
"1976년부터 공부를 시작했어. 대학 다니면서 스님에게 붓 배우러 다녔지. 동양화나 한국화에서 쓰는 붓하고 달라. 기법도 다르고, 종이도 다르고. 동양화과에서는 백모(白毛) 전통에다가 사군자, 산수화를 가르쳐. 백모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200년도 안 돼. 백모는 양털이나 염소털에서 나오는 흰 털이야. 부들부들하고 힘이 없어. 물론 그거는 그거대로 장점과 개성이 있어. 하지만 우리 붓이 가진 장점을 버려 버린다고. 그 붓(백모)으로 대체하면서 말이야.

우리 전통 붓은 닥지에다가 황모(黃毛) 전통이야. 황모는 야생 짐승을 잡아서 그 털로 붓을 만들어. 고구려 벽화도 그랬어. 황모는 노루, 야생마, 족제비, 단비 등에서 나온 털이야. 빳빳하면서도 탄력이 좋아. 그 황모를 침처럼 붓으로 만들어서 썼어. 지금 고구려 벽화를 그려 보라고 하면 잘 못 그려. 보기처럼 쉽지 않아. 붓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이야. 칼 쓰는 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멋있는 보검을 주면 칼을 제대로 쓰겠어?

붓은 훈련해야 한다고. 나도 3년 동안 스님한테 다니면서 터득했어. 스님이 처음에는 시왕(十王 : 지장전이나 명부전에서 지장보살을 모시고 지옥의 일을 각각 나누어 관장하는 10명의 왕들)을 그리라고 하더라고. 시왕은 보살 밑에서 하위의 중생을 제도하는 신상(神像)이야. 초강대왕, 염라대왕 등 10명의 왕을 시왕이라고 해. 시왕 3000장을 시작으로 문수보살·관음보살 등 보살 3000장, 여래부처·석가부처 등 부처 3000장을 그려야 한대. 이것을 단계적으로 올라가야 해.

붓으로 이것들의 밑그림을 그리는 거지. 이것이 붓을 훈련하는 방법이야. 똑같은 초(草)를 그리는 거지. 초는 밑그림이야. 초화(草畵). 그것을 3000장 베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보살초는 그리지도 못했어. 시왕초만 3년을 그렸다고. 내가 명색이 미대를 다니면서 묘사에는 자신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단순하기 짝이 없는 먹선을 베끼라고 하니까 처음에는 불만이었어.

나중에 1000장 넘게 그리다 보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되기 시작했어. 붓의 기운이 서는 거야. 그것을 기감(機感)이라고 해. 붓의 기감이 딱 오는 거야. 그런 기감을 가지고 붓을 잘 놀리면 기운생동(氣韻生動)한다고 하지. 최고의 동양미학을 기운생동미라고 해. 그래서 좋은 그림일수록 살아 움직이지. 인물화든 화조화든. 그렇게 기운생동미를 얻기 위해 훈련시키는 거야.

직필해야 해. 붓을 수직으로 꽂되 못처럼 박히는 거야. 못처럼 박아놓고 쥐꼬리처럼 사라지는 거야. 오랫동안 운필하는 것을 스스로 체득해야 해. 스스로 알아야 한다고. 장인의 훈련은 몸으로 익혀야 해. 이런 학습법이 낯선 게 아니야. 임서모화(臨書模畵). 좋은 글씨와 그림을 베끼면서 학습한다는 뜻이야. 그래서 왕희지체나 한석봉체를 베끼려고 했지.

우리 한지가 반투명하잖아. 반이 비친다고. 한지를 그림이나 글씨 위에 놓고 임서모화하는 거야. 나는 시왕초를 아래다 놓고 모화했어. 그렇게 스님이 나를 지도했어. 초기에는 그게 뭔지 몰랐는데 운필력을 훈련시키는 거였지. 투포환 선수든 역도 선수든 육상 선수의 수준은 돼야 해. 농구 선수든 축구 선수든 달리기 몇 초 안에는 들어야 하는 거지. 기초 체력이 없이는 다음 단계로 갈 수 없어. 무술도 그래. 기본기를 안 떼고는 고수로 못 가."

김봉준 화가가 걸어온 길
▲ 1967년부터 1972년까지 용산중고등학교 미술반 활동
▲ 1975년 홍익대 조소과 입학
▲ 1977년 동일방직 마당극.노동자극 연출 / 1차 투옥
▲ 1980년 홍익대 조소과 졸업 / 광주민주항쟁에 관한 서울 유인물 유포사건으로 1년 수배생활
▲ 1981년 기독교농민회 문화홍보부 간사 / <농사꾼 타령> 만화 출간 / 2차 투옥
▲ 1983년 애오개문화공간 운영위원 / 최초의 걸개그림 '해방의 십자가' 창작
▲ 1985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기획국장 / 우란분재 걸개그림사건으로 3차 투옥
▲ 1988년 부천복사골마당 설립 / 흙손공방 대표
▲ 1993년 서울.부천 생활을 접고 진밭마을로 귀촌 / '미술의 집 산아리' 설립
▲ 2000년 숲과 마을 미술축전 예술감독
▲ 20005년 세계생명문화포럼 문화행사('생명과 평화의 길') 총연출 / 실학축전 총감독
▲ 2007년년부터 2011년까지 원주미협.원주 민예총 회장 역임
▲ 2008년 오랜미래신화미술관 관장 / (사)오랜미래문화연구원 이사장
▲ 2009년 교보생명 환경문화상(환경예술부문) 수상 / 강원민족예술인상 수상
▲ 2012년 강원민족미술인상 수상
▲ 1980년부터 2016년까지 11회 개인전 / 50여회 단체전 참가
▲ 저서 : <붓으로 그린 산그리메 물소리>(1997년) <숲에서 찾은 오래된 미래>(2001년) <신화순례>(2012년)
*<김봉준 미술전-우리가 확보해야 할 풍요> 자료집 참조




태그:#김봉준, #촛불시민혁명, #따뜻한 겨울 붓그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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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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