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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독대 위에 내려 앉은 눈. 어린 시절을 기억하게 만든다.
 장독대 위에 내려 앉은 눈. 어린 시절을 기억하게 만든다.
ⓒ 라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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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다. 세상이 빛나는 흰 옷을 입었다. 제대로 된 눈이 겨울하늘에 나부낀다. 부스스 일어나 문을 열자 지난밤과 다른 세상이 찾아왔다. 깨끗하다.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 장갑을 끼고 나선다. 이대로 두는 것도 아름답겠지만,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는 치울 수밖에 없다.

대문을 열자 골목길 전체가 흰 이불을 덮었다. 쓱쓱 치워나가기 시작한다. 위아래로 4가구가 모여 사는 크지 않은 골목.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혼자 하기에 만만한 양도 아니다.

이웃에게 고마움을 전해라!

 이웃들과 함께 치워낸 골목길. 눈 오는 날의 아침풍경이다.
 이웃들과 함께 치워낸 골목길. 눈 오는 날의 아침풍경이다.
ⓒ 라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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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급한 이유는 지난 번 눈이 왔을 때 경험 때문이다. 새벽부터 급한 일이 있어 나갔다오니 골목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골목이야 함께 쓰는 길이니 그렇다 쳐도, 대문 앞 까지도 공들여 치운 흔적이 역력했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인사를 하고 싶지만, 어느 집에서 치웠는지 확실하지 않다. 또 그것 때문에 대문을 두드리고 사람을 불러 낼만한 용기(?)도 없다. 마음으로만 감사함을 새기고 다음 번 눈을 기약했다.

오늘 아침이 바로 그날이다. 마당에 쌓인 눈은 뒤로하고 공동체가 함께 사용하는 골목부터 쓸기 시작했다. 힘 있게 치워나간다. 그런데 간만이라 그런지 슬슬 허리가 아파온다. 중간 중간 멈춰서 후- 하고 숨을 들이켠다.

기억에 내리는 눈

 눈 오늘 날, 강아지도 사람만큼 눈을 좋아한다.
 눈 오늘 날, 강아지도 사람만큼 눈을 좋아한다.
ⓒ 라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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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을 말아 쥐고 등을 때린 후 다시 작업에 몰두한다. 슬며시 눈에 관한 추억이 스며든다. 온 세상이 축복 같아 보이던 어린 시절. 또래 아이들과 함께 하는 눈 맞은 세상. 뛰고, 구르고, 미끄러지고… 입장료도 기다림도 필요 없는 놀이 공원 그 자체였다.

잠시 호- 손을 녹인 후 시작된 눈싸움. 누구의 승리도 아닌 장난이 끝나면 함께 눈사람을 만든다. 마음과 같지 않고 삐뚤빼뚤 구르는 눈. 눈치 빠른 아이들은 연탄재를 이용하기도 했다. 지난한 작업 후 완성 된 눈사람. 그때쯤이면 "빨리 들어와 밥 먹어!"라는 엄마들의 고함이 골목에 메아리친다.

남자들이라면 군에서 맞은 눈도 잊을 수 없다. 도대체 군 지역만 골라 내리는지 폭탄처럼 쏟아지는 눈송이들. 넓은 연병장 가득히 내린 눈은 감탄 이전에 깊은 한숨이었다. 아무리 치워도 끝이 보이지 않는 자연의 선물(?)은 때로 이를 갈게 했다.

"김 00 여자 친구 면회 왔다!"
"우와아~ 좋겠다."

가을에 미리 마련한 싸리비 끝이 뭉툭해지던 어느 날. 함께 눈을 치우던 동기에게 찾아온 기쁜 소식. 미안한 듯 빗자루를 내려놓고, 다급히 뛰어가는 친구의 뒷모습. 부러움은 잠시, 이것이야말로 눈 오는 날의 기적이 아닐까 싶어 흐뭇하게 바라보던 날의 기억들.

이웃과 가까워지는 매개체, 눈

 나뭇가지에 내린 눈은 크리스마트 트리를 연상케 한다.
 나뭇가지에 내린 눈은 크리스마트 트리를 연상케 한다.
ⓒ 라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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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상념에 빠져 열심히 비질을 하고 있는데, 앞집 문가에서 또각또각 울리는 하이힐 소리. 이른 출근을 위해 나서는 젊은 아가씨다. 마침 그 집 대문 부근을 치우는 중이었다.

"어머, 고맙습니다."

공연히 쑥스러워져 짧게 목례하고 일을 계속하는데, 문가를 나서며 "세상에, 혼자 치우시네"라며 미안한 기색이다. 몇 걸음 떼다가 발길을 돌린 아가씨. 다시 대문을 열고 들어서며 "아빠!"하고 고함을 친다.

잠시 뒤 헤진 운동복 차림으로 문을 열고 나오는 아저씨.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하더니 슬며시 빗자루를 들고 나온다. 담배를 비껴 문 채 비질을 시작하는 아저씨. 괜찮다고 들어가라고 해도 열심히 손을 놀리신다.

그사이 따끈한 캔 커피를 건네고 다시 출근길에 나서는 아가씨. 덜 마른 머리에서 풍기는 샴푸향이 골목 입구로 사라진다. 약속이나 한 듯 나머지 집들도 문을 열고 눈을 맞이한다.

"아이고, 고마워라."
"반대편은 내가 치울게요. 그만 들어가세요."

반가운 인사가 오간다. 마셨다는데도, 음료수를 가지고 나온다. 일사천리다. 어느 사이인가 골목길은 또 다른 의미로 깨끗해졌다. 손을 흔들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표정들이 환하게 빛난다.

문을 열자 기다림에 지친 멍멍이가 이곳저곳 발자국을 내놨다. 이제 집 마당을 치울 차례다. 다시 손을 재촉한다. 몸은 뻐근한데, 기분이 상쾌하다. 왜 그럴까를 생각해본다.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시절이 됐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이웃을 만들기는 더더욱 힘들다. 공연히 관심을 가졌다가는 '오지라퍼'라는 핀잔을 사기도 한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이웃의 의미도 달라지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가끔은 이웃의 미소가 그리울 때도 있다. 오가며 건네는 가벼운 목례, 부드러운 인사가 그리워진다. 빗방울은 대지의 갈증을 해소하지만, 이런 마음의 목마름을 채워주지 못한다. 눈이기에 가능하다. 모두에게 고마운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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