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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과 통상무역이 시작될 무렵까지 우리는 '섬'에 곡식을 담았는데, 조직이 성글어 이동하자면 곡식을 흘릴 염려도 있는데다가 혼자 들기에도 버거울 정도로 부피도 좀 컸다.
<가마니로 본 일제강점기 농민 수탈사> 책표지.
 <가마니로 본 일제강점기 농민 수탈사> 책표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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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쉽게 볼 수 없는 물건이 되었으나, 내가 어렸던 70년대만 해도 가마니에 곡식을 담았던 만큼 흔한 물건이었다. 이런지라 해마다 추수가 끝날 무렵이면 "한마지기에서 (벼)몇 가마니가 나왔는가?"가 어른들 사이에서 큰 관심사였다.

해마다 가을이면 아버지는 산속 밭에서 캔 고구마를 지게 발채(바소쿠리)에 담아 져 나르곤 했다. 누군가 얼마나 캤나? 물으면  "몇 가마니 나왔다"고 답하곤 했다. 가마니에 전혀 담지 않았음에도 가마니로 셈한 것이다.

우리 아버지만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도 그처럼 말하곤 했다. 가마니가 곡식을 담는 도구인 동시에 무엇의 양을 쟤는 도구로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잘 말해주는 것이리라.

농촌에서 태어나 자란 내게 흔하게 보고 자란 가마니는 고향과 부모님과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추억과 그리움의 물건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에 읽은 전래동화 속 소금장수가 소금을 담았던 것도 가마니라 더더욱 친근한 물건이다.

이런 가마니가 우리의 고유 물건이 아니라면? 일본의 우리 농업침탈 그 산물이라면? 일제강점기 수많은 사람들의 고혈을 짠, 어린 학생들까지 착취한 물건이라면?

일본은 조선을 뺏고자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을 일으켰다. 두 번의 전쟁을 거쳐 일본은 열강 사이에서 조선의 식민지화를 인정받고, 쌀 공급지로서의 식민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일본은 흉풍에 관계없이 조선 쌀을 확보하기 위해 직접 조선의 토지를 구입해 지주경영을 시작했다. 지주 경영에서 조선의 소작제도를 활용하면 대체로 3~4년 안에 투자한 자본을 회수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이윤을 얻었다. 아울러 일본의 과잉인구를 해결하기 위해 농업이민을 추진했다. 또 농업부문의 효율적 침탈을 위해 각 지역의 농업경영 관행부터 토질, 기후와 이에 적당한 농사품종, 그리고 일본인이 들어올 때의 유의점 등을 매우 세밀하게 조사했다. 

아울러 일본인의 기호에 적합한 쌀 품종을 보급했다. 근업모범장을 전국적으로 설치해 각각의 지역에 알맞은 벼 품종 개량과 농사법, 시비법, 그리고 추수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개량하고 이를 일반 농가에 보급했다. 또한 추수한 후에 쌀을 상품으로 만들어 가는데 필요한 작업도 개선했다. 추수한 곡식을 타작하거나 말리는 과정에서 돌이 섞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멍석을 보급했으며, 도정 과정에서는 일본식 정미소를 운영했다. 쌀의 운반용기도 개량했다. 일본식 가마니와 이를 묶기 위한 새끼 등은 이런 차원에서 보급되었다. 가마니는 운반 용기이면서 동시에 거래단위로써 자리 잡게 되었다.-14쪽에서.

1876년에 체결된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이후 조선과 일본 간의 통상무역이 전개된다. 조선에서는 쌀, 콩, 우피(쇠가죽), 금, 생면 등이 주로 수출되었고, 일본으로부터는 카네낀, 한랭사 등의 면직물과 석유, 설탕 등이 들어왔다. 가장 중심적인 것은 쌀과 면제품의 교환이었다.

일본과 통상무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우리는 '섬'에 곡식을 담았다

일본과 통상무역이 시작될 무렵까지 우리는 '섬'에 곡식을 담았는데, 조직이 성글어 이동하자면 곡식을 흘릴 염려도 있는데다가 혼자 들기에도 버거울 정도로 부피도 좀 컸다. 그래서 쌀을 배로 실어가기 힘들었다. 이에 일본은 새끼줄을 꼬아 자루처럼 만든 '가마니'(카마스かます)를 수입하게 한다. 청일전쟁(1894년) 이후 일본이 조선의 무역을 이미 독점한 상태였다.

가마니는 '섬'보다 부피가 작아 한사람이 운반할 수 있고, 두꺼우면서 사이가 촘촘해 곡물이 흘러내리지 않아 이동하기가 훨씬 좋았다. 가마니 수입으로 훨씬 많은 무역이 이뤄지면서 가마니 사용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한계를 느낀 일본은 아예 가마니틀을 도입,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상품이 걸린 가마니 짜기 대회를 여는 등으로 가마니틀을 적극적으로 보급한다. 

한일병합 이후 일본의 농업이민 정책과 지주경영, 효율적인 농업침탈 정책 등으로 땅을 잃는 농민들이 점점 늘고 있었다. 이에 조선총독부가 적극적으로 개입, 농촌진흥운동 속에서 농민의 '자력갱생' 명목으로 가마니 생산을 농촌부업으로 적극 장려한다. 나아가 애초 농가에만 보급했던 가마니틀을 학교에까지 보급, 어린 학생들까지 가마니 짜기에 동원해 착취한다.

가마니는 군수식량을 포장하거나 참호 같은 군사시설을 만드는 데 필요한 직접적 군수용품으로서 공출과 통제의 대상이었다. 새끼·거적·가마니는 농촌에서 생산하는 '병기'였던 셈이다. 1930년대 말 조선에서는 연간 약 1억장의 가마니를 만들어야 했다. 총독부는 조선승입협회를 만들어 가마니 생산과 유통을 일원화했으며, 농민들에게 황소 한마리를 경품으로 주면서까지 가마니 생산을 독려했다.

또한 가마니 생산에 '보국'과 '애국'을 명분으로 내걸고, 가마니 생산·판매 대금을 '국방금'으로 헌납하도록 부추겼다. 1940년대 <매일신보>에는 집집마다 가마니 짠 대금을 모아 기관총이며 배, 비행기를 국가에 헌납했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몇몇 군에서는 비행기를 헌납했는데, 비행기 이름은 '가마니호'였다. 심지어 강화에서는 초등학교(보통학교)학생들이 가마니 짠 대금을 비행기 대금으로 납부하기도 했다. 이런 일화는 언론을 통해 미담으로 널리 선전되기도 했다-26쪽~31쪽 부분 정리.

<가마니로 본 일제강점기 농민수탈사>(창비 펴냄)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가마니 짜기 관련 340건의 신문기사들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신문은 그 시대 상황을 종합적이며 사실적으로 전달해주는 매체다. 책은 '제1차 연직(거적 짜기) 및 입 제조(가마니 짜기) 전습중이나 다음 달에 종료할 예정인데, 장차 이 사업에 종사코자 하는 자에게는 기계를 제공하는 등과 같은 여러 편의를 줄 계획이라 강습원들이 모두 열심히 습득한다'는 내용의 1912년 2월 3일자 매일신보 기사를 시작으로 일제의 쌀 수탈과 노동력 착취, 당시 농민들의 생활상을 들려준다.

농촌진흥 차원에서 권장된 가마니 짜기, 실상은 농업침탈

가마니 짜기는 농촌진흥 차원으로 권장되었으나 이는 겉에 내세운 명목에 불과했다. 본래 일본인들의 식량과 일본의 전쟁수행을 위한 효율적인 농업침탈이 목적이었다. 애초 농가부업으로 보급되고 권장되었던 '갱생 가마니'는 1937년 이후 이처럼 '보국 가마니' 또는  '애국 가마니'가 되어 조선인들을 착취하는 물건이 된다.

2005년 우연히 우리 고유 물건으로만 알고 있던 가마니에 대해 알게 된 후 한동안 씁쓸함을 떨쳐내지 못했다. 당시 좀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싶었으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만나는 자료들은 이미 내가 알게 된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는 내용에 불과, 지난 10년간 문득문득 호기심을 충족하지 못한 아쉬움으로 남고 있었다.

지난 10년간의 아쉬움을 알고 있는 듯 궁금했던 것들을 알려주는 책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가마니 짜기를 통한 자력갱생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가마니 짜기에 가족들의 생사를 걸어야만 했던 조선농민들의 참혹한 실정을 담고 있는 당시의 신문기사들, 궁금했던 것들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담고 있는 책은 먹먹하게 읽힌다. 

그동안 일제강점기에 일어났던 사건들이나,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 또는 매국 인물들을 다룬 책은 많이 나왔다. 그러나 이처럼 농업침탈을 주제로 한 책은 이 <가마니로 본 일제강점기 농민수탈사>가 아마도 처음이지 싶다. 당시 최대 생산주체였던 농업 또는 농민을 침탈한 그 자료만을 모았다는 사실로 이 책은 자료로서 가치 또한 높다고 할 수 있겠다.

짚풀생활사박물관장인 인병선씨가 수십 년간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한 사학자(김도형)가 사실 확인과 요즘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원본이 훼손되지 않게 문장을 다듬는 등의 노력이 더해져 나온 책이라고. 쉽지 않게 나온 책.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머물렀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가마니로 본 일제강점기 농민수탈사>(인병선.김도형)ㅣ창비ㅣ2016.12.20ㅣ23000원.



가마니로 본 일제강점기 농민 수탈사

인병선.김도형 지음, 창비(2016)


태그:#가마니, #가마니호, #가마니짜기 대회, #일제강점기,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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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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