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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3일 오전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현충탑에 참배한 뒤 방명록에 남긴 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3일 오전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현충탑에 참배한 뒤 방명록에 남긴 글.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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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과 민족을 위해 고귀한 희생을 바치신 순국선열과 호국장병께 깊이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합니다. 지난 10년간 UN 사무총장으로서 세계 평화와 인권 및 개발을 위해 노력한 후 귀국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의 더 큰 도약을 위해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궁한 발전을 굽어 살피소서! 2017. 1. 13. 제8대 UN 사무총장 반기문."

반기문 유엔 전 사무총장은 스스로가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나 보다. 어제 국립현충원을 찾은 반 전 총장은 방명록에 위와 같이 적었다. 일부 누리꾼은 "지난 10년간 UN 사무총장으로서 세계 평화와 인권 및 개발을 위해 노력한 후 귀국하였습니다"라는 구절을 두고 '자기 자랑의 달인'이라거나 '자기 소개서'라고 촌평하는 중이다. 

호국영령들에게 'UN 사무총장'으로서 자신의 치적을 나열하는 것도 모자라 '평시민 반기문'도 아닌 '제8대 UN 사무총장 반기문'이라고 깨알 같이 적어 놓은 반 전 총장. 방문객들 스타일마다 본인의 직위나 직함을 표기하는 방법은 제각각이고, 또 생략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제8대 UN 사무총장'이란 전직 직함 전체를 적는 일도 범상치는 않아 보인다. 그나마도 이미 준비한 메모를 펼쳐 놓고 한 글자 한 글자 옮겨 적는 모습에서 국민들은 그의 세심함(?)과 자부심을 동시에 느꼈을까.

특이할 점은 이날 현충원 측이 방명록을 적는 공간이 야외임을 감안, 행여 반 총장의 손이 시릴지 몰라 핫팩을 준비했다는 사실이다. 13일 <한국일보>에 따르면, 이날 현충원 측은 추운 겨울인 점을 감안, 방명록과 흰색 장갑 사이에 핫팩을 끼워 넣어 반 전 총장을 극진히 배려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3일 오전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현충탑에 참배한 뒤 방명록에 글을 남기고 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3일 오전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현충탑에 참배한 뒤 방명록에 글을 남기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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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을 쓰는 순간이 아무리 잠깐이라고 해도, 부쩍 쌀쌀해진 날씨를 감안하면 손이 시리고 추울 수 있다. 현충원 관계자들도 이러한 날씨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 핫팩은 자의반 타의반 귀국 직후부터 부쩍 '의전'과 연관된 이미지가 강해지고 있는 반 전 총장에겐 오비이락과 같은 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13일 이후 <오마이TV> 등의 매체가 보도한, 인천공항-서울역으로 이어지는 반 전 총장의 귀국일 영상이 SNS를 통해 급속도로 퍼지면서 이러한 '의전'과 관련된 반 총장의 이미지가 한층 강화되고 있다. 반 총장의 귀국 연설이나 기자들과의 일문일답만 본 시청자들은 절대 알아 챌 수 없는 그 일대 혼란상 말이다.

귀국 직후 반기문 전 총장이 보여준 '의전의 아수라장'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부부가 12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한 후 공항철도를 이용해 서울역 대합실에 도착해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경호원, 지지자, 기자들이 반 전 총장 부부를 에워싸고 있다.
▲ 서울역 도착한 반기문 전 총장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부부가 12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한 후 공항철도를 이용해 서울역 대합실에 도착해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경호원, 지지자, 기자들이 반 전 총장 부부를 에워싸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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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반 전 총장이 열차를 타러 이동하는 과정부터가 험난했습니다. 워낙 많은 사람이 몰려서 시민들과 인사는커녕 경호원들과 공항 경비 인력들에 둘러싸여서 움직여야 했기 때문인데요. 반 전 총장은 개찰구로 이동하면서 편의점에 들러서 생수 한 병을 사면서 점원과 인사했는데, 이 점원이 사실상 반 전 총장이 공항에서 접촉한 유일한 시민입니다.

그리고 반 전 총장이 이용한 것은 좌석이 지정돼 있는 인천공항에서 곧장 서울역으로 가는 직통열차였는데요. 열차 한 칸의 표를 캠프 측에서 통째로 예매하는 통에 열차를 타면서도 시민들을 만나지 못했고, 열차에 따라 탄 기자들과만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13일 YTN "[취재N팩트] 가는 곳마다 '구름떼' 환영인파...반기문 귀국길 이모저모"에 따르면, 인천공항에서 반 총장이 유일하게 직접 만난 시민은 반 총장이 갑작스레 방향을 틀며 들른 편의점의 직원이라고 한다. 과장 아니냐고?

아무리 여러 매체의 영상을 확인해도 사설 경호원과 취재진에 둘러쌓인 반 총장이 여유를 가지고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나마 한 외국인 여성과 짧게 영어로 인사를 나누는 것이 고작이었다.

반면 과도한 '의전'으로 인해 발생한 시민들의 피해는 고스란히 영상에 잡혀 있었다. 경호원들의 과잉보호에 밀려나는 시민들이 피해를 호소하기도 했고, 서울역사 내에서는 노점 신발가게가 아수라장이 되는 장면이 그대로 포착되기도 했다. 퇴근 시간임을 감안하면, 역사를 꽉 채운 인파를 맞은 일반 시민들이 고성을 내고 항의를 하는 모습이 당연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반 총장은 그러한 고성쯤은 아랑곳 않는 유유자적하고 편안한 얼굴이었다. 시민과 인파 모두가 자신의 지지자라는 듯한, 대한민국의 시계가 자신에게 맞춰져 있다는 듯한 반 총장의 평온한 미소는 대혼란이 벌어진 영상 속 소음과는 격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뤄진 '의전'에 대한 보도도 잇따랐다. 반 총장이 이동하던 시각, 인천 공항철도 내 긴 에스컬레이터가 멈춰져서 시민들이 불편을 겪었다거나 서울역 내 노숙자들이 그가 도착하기 2시간 전부터 쫓겨났다는 보도가 바로 그것이었다.

과연 반 총장은 귀국일 어떤 시민들을 만난 건지, 또 그가 받은 '의전'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궁금해지지 대목이다. 의도와는 다르게 지지자들이 몰렸들었다는 핑계는 이제와서 소용 없다는 걸 반 총장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인천공항에서 이동 경로를 몇 번이나 바꾸면서까지 지하철 탑승을 강행한 건 반 총장 본인이니까.

그런데, 이 비슷한 '의전'의 광경을 우리는 지난 4년간 지겹도록 감내해지 않았었나. 바로 박근혜 대통령과 황교안 총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것이 바로 그 '의전' 말이다. 

'의전 대통령' 박근혜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1년 동안 공식석상에서만 122벌의 옷을 착용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1년 동안 공식석상에서만 122벌의 옷을 착용했다.
ⓒ 단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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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거니와 권력 행사를 즐겼다. 우리는 여기서 박근혜의 모든 권력 행사가 최순실의 지시나 조언에 따른 게 아니냐는 식의 과장을 범해서는 안 된다. 권력에 대한 동물적 본능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은 박근혜에게 차고 넘칠 정도로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것만으로도 박근혜는 결코 의전 대통령일 수 없지만, '유권자의 인식'이라고 하는 변수를 가미하면 다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유권자들은 어떤 지도자나 정치인의 권력에 대한 동물적 본능이 뛰어나다고 해서 표를 주진 않는 법이다. 나는 박근혜가 많은 유권자를 사로잡은 비결은 그녀의 뛰어난 의전에 있으며, 권력 행사를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독자적인 의제와 비전이 없이 권력 행사 자체에 의미를 두었다는 점에서 그녀를 '의전 대통령'으로 부르고자 한다. 의전은 단순한 세리모니(ceremony)나 프로토콜(protocol)이 아니다. 그 이상이다."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강준만 교수는 지난달 출간한 저서 <박근혜의 권력 중독 : '의전 대통령'의 재앙>의 1장 '박근혜는 희귀한 유형의 의전 대통령'에 이렇게 적었다. 박 대통령을 '의전' 대통령이라고 정의한 강 교수는 "'올림머리'사건은 박근혜의 '의전 자본'에 대한 집착이 병적 수준임을 잘 말해준다"라며 그 '의전'을 '권력에의 본능'과 유사하다고 보는 듯하다.

일견 타당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의전, 특히 한국사회에서 이 의전을 바라보는 양태는 권력과 동일시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에 대해 반감을 갖든 호감을 갖든 말이다. 평소 차량과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서 본인의 이동을 위해 신호를 약 7분 간 멈추게 하거나, 의전 차량을 버스 승강장에 대기시켜 버스를 기다리는 시민들이 불편을 겪게 하는 등 몇 번이고 물의를 빚으었다. 그렇게 '의전 황교안'으로 불리게 된 황교안 총리가 권한대행이란 권력을 얻으면서 "목이 더 뻣뻣해졌다"는 평가가 나도는 것을 보라.

최순실이 만들어줬다는 의상과 지독히도 고집했던 '올림머리'를 비롯해 박 대통령은 극히 과했던 케이스라 할 만하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집착했던 의전이 얼마나 불필요하고 망상에 가까운 것이었나 하는 점은 이제는 국민들이 잘 알게 됐다. 이른바 '박근혜 효과'라 할 만 하다. 그런데 10년 동안 UN 사무총장으로서의 '의전'을 받은 반 전 총장이 귀국 후 보여준 '서민 코스프레'는 '민폐'의 극치이자, 또 다른 형태의 '의전 권력'이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또 하나, 반 전 총장이 남긴 것이 있다.

'청년인턴제 확대', 진심이신가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3일 오전 거주지인 서울 동작구 사당3동의 주민센터를 방문해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3일 오전 거주지인 서울 동작구 사당3동의 주민센터를 방문해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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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군 줄 알아' 하지 마라. 자아는 스스로 탐구해라. '우리 때는 말야' 하지 마라. 당신 때였으니까 그 학점 그 스펙으로 취업한 거다. 정초부터 가혹한 소리 한다고 투덜대지 마라. 아프니까 갱년기다. 무엇보다 아직 아무것도 망칠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라. 하려면 이미 뭔가를 망치고 있는 이들에게 해라. 꼰대질은, 꼰대들에게."

지난 10일 <중앙일보>에 게재돼 장안의 화제를 일으킨 문유석 판사의 '전국의 부장님들께 감히 드리는 글'이란 칼럼의 말미다. 일반 남성 기성세대의 일상적인 '꼰대질'을 "꼰대질은, 꼰대들에게"라고 일갈한 이 칼럼은 젊은 세대와 여성들에게 큰 공감을 자아낸 바 있다.

13일, 청년층을 만난 반 총장은 '꿈'과 '노력'과 같은 단어를 운운하는 동시에 '청년인턴제의 확대'를 언급했다고 한다. 또 자신이 외교관도 된 후 외무부장관이 되기까지의 경험담과 소회도 곁들였다고 한다.

반 총장의 나이가 올해로 73세다. 청년층과의 소통에 있어 자칫 잘못하면 "우리 때는 말야"라는 말을 듣기 쉬운 나이다. 더욱이 그는 10년 동안 한국을 떠나 있다가 13일에 다시 주민등록을 한 상태다. '청년인턴제의 확대'가 2017년 한국에서 어떤 의미인지 곱씹지 않고 내뱉으면 바로 '꼰대질' 소리를 듣기 십상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 '꼰대질'의 '권력 친화적'인 판본이 바로 '의전'일 것이다. 아니, 꼰대질이든 의전이든, 타자에게 그 권력의 얼룩을 몸소 전이시킨다는 점에서 둘은 일맥상통 한다. 꼰대질이 의식적이든 부지불식 간에 나오든, 권력을 쥔 자들의 개인적인 습성과 관련이 크다면, 의전은 좀 더 넓은 범위로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권력 행사의 세리모니라 할 수 있다.

놀랍게도, 반 전 총장은 빠른 시간 내에 본인이 가진 이 '의전'과 '꼰대질'의 습성을 국민들에게 보여줬다. 자의든 타의든 말이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단순한 '정권교체'도, '정치교체'도 아닌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층의 습성과 권력체계의 작동 방식을 전면적으로 바꾸고자 하고 있다.

이에 부응하려면, 최소 외견상으론 박 대통령과 같은 의전에 대한 집착과 노년층으로서 자연스레 발현될 법한 일상에서의 '꼰대질'은 버리는 것이 기본일 것이다. 혹독한 검증을 앞둔 반기문 전 총장이 이에 부응하고 극복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태그:#반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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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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