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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날들에 대한 아련한 회상, 이제 막 싹 튼 사랑을 놓아야만 하는 애틋함, 자유를 향한 열정과 갈망, 피의 혁명을 앞둔 처연한 각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깊은 공감과 우정, 스스로는 정작 모르고 있지만 그 시절을 지나온 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그 아름답고 눈부신 젊음과 순수...

마지막일 지도 모르는 밤,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술… 아름다운 청년들이 바리케이드에 기대어 병째 건네며 한 모금씩 나누는 와인이 어찌나 슬프던지 결국 눈물을 쏟고 말았다. <Drink with me>의 선율과 화음과 가사는 어쩌면 그리도 아름답고 가슴 아프던지… 하필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함께 마시자.
지난날을 위하여,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때처럼.
우정의 잔을 함께 나누자.
그들을 위하여, 나를 위하여,
지나버릴 오늘 밤을 위하여.

영화 <레미제라블>(2012)은 혼란스런 시대 상황과 파리의 당시 도시 풍경을 놀랍도록 실감나게 재현하고 있다. 원작 소설의 막대한 분량과 장황한 내용 전개를 생각하면 더욱 놀랍다. 장엄한 연출과 매우 빠른 극의 전개는 몰입도를 높이고, 배우들의 비장한 연기와 노래는 오래도록 울림을 남긴다. 음악이 특히 일품이다.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이나 <One day more>에는 가슴이 뜨거워지고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민중의 분노와 힘으로 일구어낸 그들의 역사가 부럽기까지 하다.

마리우스로 분한 에디 레드메인은 보고 또 봐도 다시 보고 싶다. 가녀린 어깨와 주근깨 가득한 순수한 얼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사랑과 고뇌의 노래는 듣고 또 들어도 이내 다시 듣고 싶어진다. 특히 마리우스와 코제트가 함께 부르는 <A heart full of love>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호흡,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작은 떨림까지도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의 설렘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들을 때마다 숨이 멎는 느낌이다.

 파리, 소르본 대학 앞 광장
 파리, 소르본 대학 앞 광장
ⓒ 김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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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미셸 대로로 접어들어 조금 더 걷다 보니 소르본 대학이다. 광장의 불 밝힌 카페마다 젊은이들이 가득하다. 피자와 맥주 따위가 쓰인 메뉴판, 간이식 의자와 테이블을 채우고 앉아 웃고 떠들고 있는 이들을 보고 있자니, 대학 앞 허름한 주점에서 파전에 막걸리를 두고 앉아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그 옛날이 아련히 떠오른다. 이렇게 금방 그리운 추억이 되어 버릴 줄 그땐 몰랐다. 아름다운 것들이 머무는 시간은 인생에서 이리도 짧기만 하다. 

소르본 대학과 팡테옹이 있는 이 지역을 카르티에라탱이라 한다. 라틴 구역. 라틴어로 수업이 이루어지고 학문과 토론의 장이 펼쳐지던 곳이라 그리 부르게 되었다 한다. 라틴어라니! 이제는 전혀 쓸모없어진 언어의 흔적이 이방인에게도 향수를 일으킨다. 라틴 구역을 거닐다 보면 크고 작은 카페마다 젊은이들이 빼곡하다. 지명 때문인지 이 친구들은 모두들 '쓸모'와는 무관한 철학적 토론을 하고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어두운 골목과 골목을 돌아 언덕 위 팡테옹까지 걸었다.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1802-1885)가 누워 있는 곳이다. 납골당 뒷골목에 이렇게 화려한 카페와 펍이 들어서 있는 풍경이라니! 죽어버린 위대한 이들은 말이 없고, 살아 있는 이름 없는 젊음들은 소란스럽다. 죽은 이들이 누워 있는 거대한 팡테옹과 젊은이들의 열기로 출렁이는 골목길의 사이에 서서 문득 우물쭈물 어디로 갈지 모르는 나를 발견한다.

 파리, 팡테옹
 파리, 팡테옹
ⓒ 김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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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1862)은 소설이라기보다 대서사시다. 프랑스에서는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다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영화와 뮤지컬로도 가장 많이 만들어진 작품 중 하나이다. <장발장>이라는 제목의 어린이 문고판으로도 만들어져 널리 읽히고 있다. 하지만, '빵을 훔친 죄로 투옥되었던 장발장이, 성당의 은촛대를 훔쳐 다시 위기에 처하는데 자애로운 신부의 은혜로 새 삶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는 <레미제라블>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2천 5백여 페이지에 다섯 권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작정을 하고 덤빈다 해도 여간한 인내심과 끈기가 아니고서는 끝까지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1845년부터 1867년까지 집필에만 17년이 걸렸고, 이야기의 단초를 찾고 구상한 기간이 무려 35년이나 된다니 왜 안 그렇겠는가. 1815년, 일흔일곱 살 미리엘 주교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되는 소설은 1832년 6월 실패로 끝나버린 학생봉기를 주요 제재로 삼고 있다.

연약하고 추악한 인간 군상, 그들의 우연과 필연이 복잡하게 얽혀 이루어가는 사회와 역사, 허망한 삶을 끌어가는 철학과 종교, 거역할 수 없는 숙명 속에서도 자유와 평등, 사랑과 희생의 고결함을 지켜가는 숭고한 모습까지 인간사의 거의 모든 요소가 집약된 작품이다. 작품을 뚫고 흐르는 무거운 서사와 그 사이로 얼핏얼핏 드러나는 가녀리고 애달픈 서정, 작가의 무한한 지식을 보여주는 상세하고 장황한 배경 설명, 틈틈이 등장하는 유머까지, 이 작품은 소설이기도 하고, 시이기도 하고, 가끔은 무슨 대백과사전 같기도 하다. 

<레미제라블>의 장대한 서사만큼이나 위고의 삶도 파란만장했다. 일찌감치 문학적 명성을 얻고 정치 시인으로 이름을 떨치던 위고는 40대 초반에 이미 상원의원, 국회의원으로 선출된다. 자신이 지지하던 루이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제2제정을 선포하자 그에 맞서 날선 비판을 하다 추방된다. 이로 인해 1851년부터 1870년까지 20년이나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망명지에서의 고독을 창작에 대한 열정으로 승화시켜 무수한 대작을 이 시기에 집필하고 출간한다. 이때 탄생한 작품이 <레미제라블>이다. 35년을 품고 있다 17년에 걸쳐 집필한 다섯 권의 책이 차례로 출간되던 1862년은 그의 나이 예순이 되던 해였다.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 대혁명 직후 태어나 80여 년의 세월을 장수를 하며 혼란스럽기 이를 데 없던 길고도 고단한 혁명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내었다. 드물게 문학가뿐 아니라 정치인으로도 사랑을 받았던 행운아다. 1885년 국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 때는 밤새도록 개선문 아래 횃불에 둘러싸인 유해가 안치되어 있었고, 이튿날 팡테옹까지 이어진 장례 행렬에는 수만 명의 파리 시민이 그의 뒤를 따랐다 한다.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
ⓒ 김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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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고가 파리를 떠나 있던 제2제정기는 이 도시가 몸살을 앓던 시기다.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오스만(Baron Georges-Eugène Haussmann, 1809-1891)의 대대적인 도시 개조 사업이 진행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역사라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해서, 당시 파리의 빈민은 삶의 터전을 잃고 교외로 쫓겨나고, 도시의 피로감은 극에 달했지만 공사의 결과로 남게 된 도시의 모습은 찬란하다. 이때 지어진 대표적 건축물이 오페라 가르니에(Opéra Garnier)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이 극장은 밤이면 더욱 아름답다.

그날 밤은 루브르에서 오페라까지 걸었다. 루브르도 밤이 낮보다 아름답다. 유리 피라미드에 반사된 불빛이 화려하다. 루브르 주변의 호화로운 건물과 세련된 사람들을 구경하며 오페라 가르니에까지 걸었다.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지만 구간이 짧아 걸을 만하다. 극장에 도착해 보니 광장에서 한 남자가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한다. <Moonlight shadow>. 지하철역마다 이런 이들은 수도 없이 만났지만 오페라 광장이라 그런지 특별한 느낌이다. 

계단을 가득 메운 군중 틈에 나도 자리를 잡고 앉아 음악에 푹 빠졌다. 얼굴에 와 닿는 가을밤의 찬바람, 귓가에 가득 맴도는 소박한 연주와 노래. 내 앞에는 일단의 젊고 멋진 여자들이 앉아 있다. 유럽 어디 다른 나라에서 온 여행객 같다. 맥주처럼 와인을 병째 돌려 마시고 있다. 영화 <레미제라블>의 아름다운 청년들이 떠오른다. 바리케이드에 기대어 병째 나누던 마지막 와인….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 앞 거리의 악사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 앞 거리의 악사
ⓒ 김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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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호텔 앞 동네 마트에 들렀다. 싸구려 와인을 한 병 사 들고 올라왔다. 창밖으론 파리의 지붕들이 내려다보인다. 저 골목들 사이로 수도 없이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고 무너지고 했더란 말이지. 앙졸라와 마리우스, 그 아름다운 청년들의 젊음과 순수와 신념과 방황과 고뇌가 가슴 아프다. 그 모든 푸른 열정과 외침에도 결국 쓰러지고 말았어야 했던 여리디 여린 삶이 가슴 시리다.

"그대는 기억하는가 우리의 즐거웠던 날을,
우리가 다 같이 그렇게도 젊었던 때를,
좋은 옷차림에 사랑하는 것밖에는
마음속에 다른 욕망이 없었던 때를!

그대의 나이를 내 나이에 합쳐도,
우리는 둘이서 사십도 못 되던 때를,
그리고 우리의 소박하고 단출한 살림에는,
모든 것이, 겨울마저도, 우리에겐 봄이었던 그때를!"

와인이 오늘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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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통해 시대를 넘나드는 기호와 이야기 찾아내기를 즐기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인문학자입니다. 이중언어와 외국어습득, 다문화교육과 국내외 한국어교육의 문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학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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