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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 한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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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2년 서울에서 출생한 정인보는 호가 위당(爲堂)이며, 1910년 중국에서 동양학을 전공한 후 1918년에 귀국하여 연희전문 등에서 강의한 학자이다. 그는 국학(國學)의 개념을
현충사 신사당
 현충사 신사당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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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현충사에는 본래의 사당과 새로 지은 사당이 있다. 1932년부터 있었던 사당에는 구(舊)본전, 1967년에 신축된 현대식 건물에는 본전(本殿)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물론 구사당과 신사당이 함께 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진주대첩의 김시민 장군을 기려 세워진 충북 괴산 충민사에도 구 사당과 신 사당이 있고, 동래읍성 전투의 송상현 부사를 제향하는 청주 충렬사에도 역시 구 사당과 신 사당이 있다.

아산 현충사 정문을 통과하여 충무공이순신기념관부터 둘러보고 나면 드디어 본격적인 현충사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외삼문이 정문과 이순신기념관 사이에 있지 않고 기념관과 구 사당 중간에 있기 때문이다.

외삼문 밖 왼쪽에 있는 '눈물을 흘리는 비석'

그런데 기념관 뒤에서 외삼문으로 향하는 담장 아래에 작은 비석 하나가 외로이 서 있다. 빗돌에 새겨진 세 글자 '墮淚碑'가 무슨 뜻일까 싶어 호기심을 끌고, 글자들이 붉은 색이라는 점 역시 눈을 자극한다. 친절하게도 비석 옆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안내판의 해설을 읽는다.

'타루비(墮淚碑) 복제품
보물 1288호, 복제품

해설 안내판의 한자어 풀이


유덕 : 덕이 있음
화문대석 : 꽃무늬가 놓인 받침돌
연화비좌 : 연꽃 모양의 빗돌 앉힘돌
비신 :  비의 몸돌
운문 : 구름무늬
연 : 연꽃
개석 : 지붕돌

이 석비는 조선 중기의 명장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덕(有德)을 추모하기 위해 막하 군인들이 세운 것으로, 장군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인 선조 36년(1603)에 건립되었다.

석비의 형태는 화문 대석(花文臺石) 위에 연화 비좌(蓮花碑座)를 마련하여 비신(碑身)을 세우고 운문(雲文)과 연(蓮)봉우리형으로 이루어진 개석(蓋石)을 얹었으며, 비문에는 비의 명칭에 대한 유래와 건립에 대한 내용이 쓰여 있다.

전남 여수 고소대 타루비 진품
 전남 여수 고소대 타루비 진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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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에는 '營下水卒爲統制使李公舜臣立短碣名曰墮淚(영하수졸위통제사이공순신입단갈명왈타루, 수영의 수군 장졸들이 통제사 이순신을 위해 작은 비석을 세우니 그 이름 타루라) 蓋取襄陽人思羊祜而望其碑則淚必墮者也(개취양양인사양호이망기비즉루필타자야, 중국 양양 사람들은 비를 볼 때마다 양호를 생각하며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니라) 萬歷三十一年秋立(만역삼십일년추립, 1603년 가을에 세우다)'라고 새겨져 있다.'

'복제품'이라는 표시를 해둔 것은 타루비 원품이 전남 여수시 고소대에 있기 때문이다. 타루는 눈물을 흘린다는 뜻으로, 안내판의 해설이 말해주듯, 이순신 휘하에서 임진왜란 때 같이 생활하며 전투에도 함께 참전했던 장졸들이 노량해전 이후 도처에 깔린 충무공의 유적을 지나다니면서 줄곧 눈물을 흘린 일을 기념하여 이 비석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지금은 '만력 30년'이 아니라 서기 1603년

'만력 30년'을 1603년으로 옮겨놓은 안내판을 보니 제작자의 세심한 마음씀씀이가 흐뭇하다. 당시는 중국 황제의 연호를 쓸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지금은 일반적인 서기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안내문에 등장하는 양호(221-278)는 진나라 사람으로, 동오와의 국경 지대를 다스렸다. 그는 이른바 덕치(德治)를 실현하여 적국인 동오 백성들까지 그를 존경했다. 뒷날 양호의 후임 두예가 동오 사람들이 양호의 비석 앞에서 눈물(淚)을 흘리는(墮) 것을 보고 그 빗돌에 '타루비(墮淚碑)'라는 이름을 붙였다. 즉, 이순신을 기려 세워진 비에 타루비라는 이름을 붙인 것 역시 충무공의 '유덕'을 잊을 수 없다는 당시 장졸들의 마음의 표시이다.

충무문 지나 직진하지 말고 왼쪽으로 가는 게 좋다

외삼문인 충무문 안으로 들어서서 왼쪽으로 접어든다. 대부분의 탐방객들은 직진하여 곧장 본전으로 가지만, 설립 시기와 일목요연한 답사를 감안하면 구본전부터 둘러보는 것이 이치에 맞다. 1932년에 세워진 사당인데다 제향 기능을 본전에 넘겨준 지 오래된 탓에 조금 적막하지만, 그래도 100년 가까이 되어가는 역사가 서린 곳인데 홀대할 수는 없다.

현충사 구사당
 현충사 구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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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사당 앞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구본전은 1704년 이충무공의 공덕을 길이 받들고자 아산 지방 선비들이 조정에 상소하여 숙종 32년(1706)에 서원 형식의 사당을 세웠다. 그 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에 따라 현충사도 없어지게 되었으나 1932년 6월 5일 이충무공유적보존회와 동아일보사가 주축이 되어 민족 성금으로 이 건물을 다시 세우게 되었으며, 1966년 4월 현충사 성역화 계획에 의해 본전이 새로 세워짐에 따라 1968년 9월 9일 지금의 위치에 원형대로 이전된 것이다.'

주련을 달고 있는 구 사당은 1932년 건물

구 본전은 오래 전에 세워진 사당답게 기둥에 주련을 달고 있다. 주련(柱聯)은 기둥이나 벽 등에 장식으로 서화를 써넣어 걸치는 물건 또는 글인데, 이곳의 주련은 위당 정인보(鄭寅普)(1892-?) 선생이 쓰신 글이다. 안내판을 한줄씩 읽어본다.

'一誓海山立綱常於百代
(일서해산입강상어백대)
바다와 산에 맹세하므로 강상을 후세에 이르도록 세웠으며
再造乾坤無伐矜於當時
(재조건곤무벌긍어당시)
천지를 구해냈으되 내세워 자랑함이 없었네
成仁取義精忠光於檀聖
(성인취의정충광어단성)
인을 이루고 의를 취하니 지극한 충성은 단군 이래 빛나고
補天浴日功德蓋於槿邦
(보천욕일공덕개어근방)
크고 밝은 공덕은 온 나라를 덮었네'

안내판은 낯선 한자어들에 대한 풀이를 달아놓았다. 강상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근본이 되는 도덕인 삼강(三綱)과 오상(五常),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 오상은 사람의 다섯 가지 행실, 즉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이른다. 백대(百代)는 백(百)의 세대, 즉 영구, 영원을 뜻하고, 인(仁)은 어진 마음, 의(義)는 의(義)로운 행위를 의미한다.

보천은 여와(女媧)씨가 하늘의 이지러진 데를 기운 고사, 욕일은 의화(義和)가 해를 목욕시킨 고사에서 가져온 말이다. 주련을 쓴 정인보가 보천과 욕일의 고사를 인용한 것은 그만큼 이순신이 국가에 큰 공을 세웠다는 뜻이다.

납북된 정인보 선생, 국학의 개념을 정립

1892년 서울에서 출생한 정인보는 호가 위당(爲堂)이며, 1910년 중국에서 동양학을 전공한 후 1918년에 귀국하여 연희전문 등에서 강의한 학자이다. 그는 국학(國學)의 개념을 정립했으며, 해방 이후 국학대학(경희대 전신) 학장을 역임했다.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했고,<조선사 연구>등 다수의 저서를 내었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그래서 정인보의 사망연도는 '1892-?'로 ?로 처리됐다. 납북된 선생이 남긴 주련을 바라보자니 마음이 착잡하다.

참배를 할까 하다가 그냥 본전으로 간다. 신 사당에 가면 으레 참배를 할 것이고, 구 사당 자체도 참배를 바라는 기색이 없다. 구 사당은 그냥 빈 집이다. 현판과 주련만 한참 바라보다가 본전으로 간다. 본전 이후의 답사지로는 충무공이 살았던 옛집과 활쏘기 훈련을 했던 곳, 그리고 이면의 묘소가 있다.(충무공 옛집에 대해서는 < 새해 첫날, 이순신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기사 참조)

정조가 직접 쓴 비문으로 제작된 어제신도비 비각 뒤로 멀리 보이는 이순신 묘소
 정조가 직접 쓴 비문으로 제작된 어제신도비 비각 뒤로 멀리 보이는 이순신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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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 경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충무공 묘소 

사적 112호인 '이충무공묘소'는 현충사 경내에 있지 않다. 하지만 거리가 가깝고, 특히 묘소이므로 사당인 현충사와 같은 영역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본래 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후 고금도에 잠시 모셔졌다가, 이듬해인 1599년 2월 운구되어 아산시 음봉면 금성산에 장사되었다.

이충무공묘소가 지금의 어라산 자리에 이장된 것은 1614년이다. 1959년 5월 22일 들어 사적 112호로 지정되었고, 1973년부터는 충무공 종손의 동의 하에 현충사관리소에서 묘역을 관리하고 있다. 묘 앞에는 정조가 직접 비문을 지은 어제신도비(御製神道碑)가 서 있다.

이순신 묘소
 이순신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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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현충사, #이순신, #이면, #김시민, #송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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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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