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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전자도서관 '노동자의 책'을 운영하는 철도노동자 이진영씨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이적표현물 판매)로 구속됐습니다. 이씨를 구속한 이번 수사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민변 소속 이광철 변호사가 글을 보내왔습니다. [편집자말]
노동자의 책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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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의 책 홈페이지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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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경부터 국가보안법 변론을 하기 시작했다. 어림잡아 매년 7~10건 정도씩은 변론을 한 것 같다. 그런 가운데 나름대로 감이라는 것이 생겼다. 이런 정도의 사안은 구속 혹은 유죄, 이런 정도의 사안은 구속영장 기각 혹은 무죄, 뭐 이런 감 말이다.

개별적인 사건마다 다 나의 감과 맞아 떨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나름 구속영장 기각 내지 무죄라고 감잡은 데에 개인적인 목적의식(이런 사안만큼은 구속영장 기각 혹은 무죄를 받아야 한다는)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개별 사건의 결과가 크게 나의 예상을 벗어난 것은 없었다.

고전을 '이적표현물'로 판단한 검찰

지난 2012년 1월 11일, 당시 박정근씨의 영장실질심사을 앞두고 '박정근을 격하게 포옹하는 사람들의 모임(박격포)'과 국가보안법 긴급대응모임 10여 명이 모여 검찰의 구속영장신청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지난 2012년 1월 11일, 당시 박정근씨의 영장실질심사을 앞두고 '박정근을 격하게 포옹하는 사람들의 모임(박격포)'과 국가보안법 긴급대응모임 10여 명이 모여 검찰의 구속영장신청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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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까지 국가보안법 변론을 하면서 나의 감으로 도저히 수긍하기 힘든 사례가 있었다. 추리자면 더 있을 수 있겠으나, 딱 하나만 고르라 하면 주저없이 박정근씨 사례(2012년)를 꼽겠다.

또 하나만 더 고르라 하면 주저없이 이번 노동자의 책 이진영 대표 사례를 들겠다. 이 두 사건은 국가보안법이 엄존하는 속에서도 법원이 달팽이 걸음일망정 조금씩 진보해온, 그리하여 구축한 국가보안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지평을 일거에 전복시킨 반동적 사건이다. 박정근 사건의 경우는 필자가 2012년에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다음 글(관련 기사 : <뉴욕타임스> 대서특필, 나라망신은 MB가?)을 참조하시고, 이 글에선 노동자의 책 이진영 대표 사례에 대해 얘기해 볼까 한다.

이번 노동자의 책 관련하여 검찰이 제출한 구속영장청구서를 보면, 공안검찰과 경찰은 피의자에 대한 범죄혐의사실로 이적표현물 게시 130건(pdf 파일 게시), 이적표현물 전송 25회(pdf 파일 전송), 이적표현물 판매 60회(총 68권), 이적표현물 소지 72종(도서 13권, usb 26개, 하드 32개, sd 1개) 등을 들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같은 책자를 소지도 하고 판매도 하는 등으로 중복되는 것이 있어 대략 헤아리면 300종 정도의 책자를 이적시한 것 같다.

필자가 지난 2008년부터 국가보안법 사건을 변론한 이래로 이 사건과 같이 막무가내식으로 국가보안법을 확장·남용한 사례를 보지 못하였다. 심지어 박정근씨 사례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몇 개의 표현물들을 빼고는 과연 이것을 이적표현물로 판단한 것이 어떤 점에서 가능한 것인가 극히 의문스럽고, 가히 이 사건만 보면 지금이 1980년대인지, 2017년인지를 분간조차 하지 못할 정도다. 영장청구서에 적힌 대표적인 책자를 두 개만 예로 들어본다. 하나가 E.H.카의 <러시아 혁명>이란 책이고, 다른 하나가 파울루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라는 책이다.

E.H.카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역사란 무엇인가>를 지은 영국의 유명한 외교관이다. 영화 <변호인>에서 극중 송우석 변호사가 주한 영국대사관에 사실조회한 것을 법정에서 낭독하는 장면, 기억하실 것이다. 그 저자의 책이 다시 이적의 멍에를 쓰고 끌려나온 것이다. <변호인 2>를 벌써 찍나?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 위더스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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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리의 <페다고지>라는 책도 황당하기 그지없다. 알고 보니 이 책은 교육학에서 고전의 반열에 드는 책이었다. 가령, 서울대 조흥식 교수(서울대 사회복지학과)가 쓴 서평을 보면, 조 교수는 "이러한 절망의 때에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영문판과의 비밀스런 만남은 학문을 통한 희망의 길을 찾는 큰 계기가 되었다"고 토로하고 있다. (관련 기사 : 서울대저널, 프레이리의『페다고지』가 삶에 주는 무게)

국립 서울대 교수가 읽고서 학문을 통한 희망의 길을 찾는 큰 계기가 되었다고 토로한 책이 한편에서는 이적도서란다. 더 웃기는 것이 뭐냐면,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 책은 1995년, 2002년, 2009년, 2012년에도 같은 제목으로 계속 신간이 출간되었다는 점이다. 얼마나 대단한 책이면 계속 새로운 책이 나올까? 그러면서도 이 책을 공안당국은 이적표현물이라고 한다. 도대체 이런 모순과 부조화를 어찌할꼬? 그러고도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겠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검찰, '이적목적' 증명할 수 있나?

이 두 책을 포함하여 이번 영장청구서 전반의 문제를 살펴보자. 몇 가지로 나누어 살핀다.

첫째, 이 사건에서 공안검찰과 경찰이 문제 삼은 표현물들은 대부분 1980년대 전두환·노태우 군부독재정권 시절의 이적의 잣대, 즉 1991. 5. 개정 이전 국가보안법 7조의 잣대로만 이적시할 수 있는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1991년 개정 국가보안법의 해석에서 반드시 요구되는 실질적 위험성을 인정하기 어려운 것들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영장청구서 별지의 오른편에 있는 '판결문 번호'라는 란의 사건번호들을 보면, 대개가 1980년대 또는 1990년대의 법원 사건번호를 병기해 두고 있었다.

둘째, 1990년대로부터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비록 달팽이 발걸음처럼 느리기는 해도 우리 법원의 이적표현물에 대한 기준과 잣대도 상당한 수준으로 바뀌었는데, 그것은 우리 사회의 이념적 성숙도와 시민역량의 성장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특히 1991년 구소련의 몰락과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 그리고 우리 사회가 이룩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정착 이래 우리 사회도 이른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에 대하여 사실상 무제한의 해금상태에 이르렀고, 정치적으로도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정의당, 노동당 등 진보정당들이 합법적 시민권을 얻어 국민들에게 정치적 지지를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1995년 민주노총이 출범하고,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을 계기로 하여 복수노조의 허용이 합법화되었고, 이 시기 전교조도 합법화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법원 또한 국가보안법 제7조에서 이적표현물의 범위를 좁히고 이적 목적도 엄격하게 판단하여 적지 않은 무죄판결이 내려진 바 있다.

대략 2008년 이후 사건들만 하여도 산청간디학교 최00 교사 사건(창원지법 진주지원 2008고단705), 공산당 선언 무죄 판결(국방부 고등군사법원 2011노258), 부산 통일사 사건 무죄판결(부산지법 2012고단2566), 평통사 사건 무죄판결(인천지법 2013고단 953), 노동해방실천연대 준비위 사건(서울중앙지법 2012고합709), 안동 전교조, 평통사 소속 회원 사건(대구지법 안동지원 2013고단280, 281) 등이 있다.

그 이전에도 이장희 교수의 <나는야 통일1세대> 책자, <변증법적 유물론> 책자 등이 이적표현물이 아니라고 판시한 바도 있다. 이러한 일련의 무죄판결들은 우리 사회의 이념적 성숙도와 시민역량의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다. 특히 이 사안과 유사한 노동해방실천연대 준비위 사건은, 이른바 PD계열에서 사회주의 변혁을 주창해 온 사람들에 대한 구속영장청구가 기각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재판에서 전부 무죄판결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이런 판결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 시계를 30년 전으로 돌려 검찰은 이러한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법원은 이 영장청구를 발부했다. 이는 그간의 우리 사회의 사상적 성숙과 시민의 역량을 모조리 부인하는 태도와 다름없다. 

책 <페다고지> 겉표지. 시중 서점에서 판매 중이다.
 책 <페다고지> 겉표지. 시중 서점에서 판매 중이다.
ⓒ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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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이 사건에서 공안당국이 문제 삼는 책자들, 문헌들의 경우 국립중앙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 그리고 국내 유수의 대학도서관에 대부분 비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번 영장실질심사를 위하여 영장청구서에 적힌 책자들을 인터넷 교보문고 등에서 검색했더니 대부분 판매되고 있는 책들이었다.

대법원은 이미 지난 1982년에 "학문의 연구는 기존의 사상 및 가치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을 가함으로써 이를 개선하거나 새로운 것을 창출하려는 노력이므로 그 연구의 자료가 사회에서 현재 받아들여지고 있는 기존의 사상 및 가치체계와 상반되거나 저촉된다고 하여도 용인되어야 할 것"이라면서 "대학생이 학문연구를 위하여 시내 일반서점과 대학 도서관에서 구입 또는 대출받아 보관한 연구자료가 반국가단체 또는 국외공산계열의 사상과 가치체계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만으로써는 그 불법목적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판시한 바 있다(대법원 1982. 5. 25. 선고 82도716 판결).

이 사안과 같이 합법적으로 출판되어 대형서점이나 인터넷 서점에서 판매가 이뤄지는 서적이 한쪽에서는 이적표현물이라는 불법표현물로 낙인찍혀 그 소지지가 처벌되는 것은 법치국가원칙에서 도저히 용인하기 어려운 일이다.

물론 이 사안에서 이진영 대표가 취급한 책자 가운데는 북한의 체제와 이념, 지도자들에 대한 노골적인 찬양 책자들이 있고, 선해하자면 영장을 발부한 판사는 이 점을 중하게 본 것 같다. 그러나 우리 대법원은 2010년 국가보안법 제7조 제5항에 규정된 이적행위를 할 목적의 증명책임이 검사에게 있다고 하면서, 이적표현물의 취득·소지 또는 제작·반포에 있어서 행위자에게는 이적목적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취지의 종전 판결들을 모두 폐기했다.

그렇다면 이진영 대표에게 그런 이적목적이 있었는지를 세밀하게 보아야 했다. 그러나 증거를 보아도 이진영 대표가 그런 목적을 가지고 책자들을 취급하였다고는 도저히 보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그가 취급한 책자들 가운데 북한 관련 서적은 30%에 그치고 있고, 이 책자들을 취급한 이유에 관하여 이진영 대표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1980년대 격동의 우리 사회에 영향을 끼친 책자들이어서 취급했다고 법정에서 분명히 밝혔다. 어떻게 이적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건가?

이러한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검찰과 법원의 태도 탓에 이진영 대표는 지금 구금되어 있다. 2012년 박정근씨의 구속영장실질심사 끝에 영장이 발부되던 날 필자는 "마치 같이 전쟁터에 나갔다가 나만 살아 돌아온 참담한 심정"이라고 <오마이뉴스>에 썼다. 무려 5년 만에 기시감을 느낀다.

2012년 박정근씨의 구속은 <뉴욕타임스>에까지 소개되어 대한민국의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후진지를 생생히 전파해내는 촉매가 됐다. 2017년 노동자의 책 이진영 대표 구속은,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페다고지 같은 책, E.H.카 같은 사람도 얼마든지 붉은 괴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생생히 폭로해 낸다. 대한민국! 진심으로 쪽팔리다.

과연 나는, 우리는 5년을 헛산 것일까? 이럴 수는 없다. '박정근 사건'은 결국 무죄로 확정됐다. 구속과 기소가 잘못이었음이 판명난 것이다. 이 사건 역시 같은 무죄로 귀착될 것이다. 지난 5년을 헛되이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다시 신발끈을 묶는다.


태그:#노동자의책, #이진영, #국가보안법, #박정근, #EH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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