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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담을 둥글게 두른 '불턱'에서 쉬고 있는 옛 해녀들.
 돌담을 둥글게 두른 '불턱'에서 쉬고 있는 옛 해녀들.
ⓒ 해녀박물관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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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 세계지질공원, 생물권보존지역으로 등재된 우리나라의 보석 같은 존재 제주도에 또 경사가 생겼다. 지난 달, 제주도 해녀의 삶과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이제 명실공히 제주섬의 상징이 된 해녀. 10년 전 자전거를 타고 섬 해안가를 달리다 바다에서 들려왔던 휘파람 같은 소리로 처음 만났다.

"호이~ 호오이~" 

청명한 파도 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신묘한 소리, 나 같은 육지 사람들은 처음 들어보는 듣도 보도 못한 소리에 자전거 페달질이 저절로 멈춰졌다. 곧 해녀 어멍 혹은 할망들이 힘든 물질을 하면서 내는 숨소리임을 알게 됐다. 해녀들이 잠수했다가 물 위로 나와 숨을 고를 때 내는 소리로 마치 휘파람을 연상케 하는 '숨비소리'란 것도 후일 알았다. 구좌읍 하도리 바닷가에서, 제주의 동생 섬 우도와 비양도에서 해녀를 자주 마주치게 되면서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됐다.

'이렇게 힘든 일을 왜 여자만 하는 걸까... 제주도엔 왜 해녀만 있고 해남은 없을까?' 

제주도 남자들이 특별히 게을러서 그런 건 아닐 테고, 무슨 사연으로 해남은 없는 건지 제주도에 여행갈 적마다 궁리해보았지만 알 길이 없었다. 그나마 알아낸 거라곤 물고기 잡으러 배타고 바다로 떠난 남자들이 태풍을 만나 못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 섬에 일할 남자들이 없어 여자들이 물질을 하게 됐다...는 정도였다. 제주 해남에 대한 내 오랜 의문은 작년 휴가 때 비로소 풀렸다. 제주도에 갔다가 들른 해녀박물관(구좌읍 상도리)에서였다.

전복에 담긴 해남, 해녀의 고달픈 역사 

 물질을 하며 캐온 전복의 무게를 달고 있는 해녀 어멍.
 물질을 하며 캐온 전복의 무게를 달고 있는 해녀 어멍.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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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녀들이 바다속에서 힘들게 따온 야생 전복.
 해녀들이 바다속에서 힘들게 따온 야생 전복.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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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무형유산원의 '제주해녀문화' 자료에 의하면, 삼국시대부터 심해의 어패류를 채취하는 사람이 있었으며, 제주도엔 고려시대부터 전복·미역 등을 국가에 진상한 것으로 나온다. 특히 전복 부산물인 껍데기를 이용한 예술작품인 나전칠기공예가 눈부시게 발전하기도 했다.

전복을 너무 남획했던 걸까, 조선시대에 이르러 전복은 점차 귀한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바다에서 대량으로 기르는 양식 덕분에 전복 라면까지 등장할 정도로 흔해졌지만, 조선시대 전복은 부와 권세가 있는 사람들이나 먹던 귀한 먹거리였다. 그 전복은 말(馬), 감귤과 함께 왕족에게 진상하는 귀한 공물 중 하나였다.

제주는 척박한 화산섬으로 안 그래도 농사지어 먹고 살기 힘든데 진상품 부역 부담까지 지다보니 힘겨웠을 터. 점점 전복 등의 진상 부담이 늘고 남성의 몫이었던 진상 부역을 제주 해녀가 맡게 된다.

최초로 해녀의 존재가 등장한 것은 고려 숙종 때다. 고려 숙종 10년에 제주의 옛 이름 탐라국(즐길耽, 그물羅)이 고려의 한 군으로 개편되면서 부임한 구당사(句當使) 윤응균이 남녀 간의 나체 조업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다. 당시 제주에는 남성과 여성 모두 물질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미역을 캐는 여자를 잠녀(潛女)라 한다. 그들은 2월 이후부터 5월 이전까지 바다에 들어가 미역을 따고 나온다. 남녀가 뒤섞여 일하고 있으나 이를 부끄러이 생각지 않는 것을 볼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채취해 관가에서 징수하는 일에 부응하고, 그 남은 것을 팔아서 의식을 해결한다. 고생고생해서 따낸 전복을 탐관오리에게 빼앗기고 해녀들 스스로는 굶주림에 허덕인다." - 17세기 초 아버지 인성군을 따라 불과 15살의 나이에 제주로 귀양 온 이건(李健)이 쓴 한문수필집 <제주 풍토기>, <규창집> 가운데

 뒤로 멋진 해안절벽 박수기정이 보이는 서귀포 대평리의 해녀상.
 뒤로 멋진 해안절벽 박수기정이 보이는 서귀포 대평리의 해녀상.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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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런 잠수 장비도 없이 물질을 하는 해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될만하다.
 아무런 잠수 장비도 없이 물질을 하는 해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될만하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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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있었던 해남, 포작인(浦作人)

당시 제주 해녀들이 고되고 위험한 일인 물질을 하며 전복을 따야 했던 건 나라에 전복을 공물로 바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7세기 말까지 제주의 해녀들은 전복이 아니라 미역, 톳 같은 해초를 땄다. 진상할 전복을 캐는 것은 포작인(浦作人)으로 불리는 남자들의 일이었다. 제주 말로는 '보재기'다.

제주에는 본래 해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복을 따는 해남도 있었던 거다. 당시엔 요즘 같은 잠수장비 없이 맨몸으로 바다 속에 들어가 해산물을 캐야 했기 때문에 다치거나 죽는 일이 많았다. 해녀들 사이에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물질이 매우 위험했음을 알 수 있다. 진상품 공출 부역이 얼마나 힘에 겨웠으면 지금도 못된 손님을 '진상'이라 부르나 싶다.

점점 궁궐은 물론 왕실 종친들의 전복 공출 요구를 이기지 못한 제주 남자들이 섬에서 뭍으로 탈출하는 일이 부지기수로 발생한다. 수많은 포작인들이 착취와 수탈에 가까운 진상 부역을 피해 제주도에서 전라도, 경상도 해안으로 도망쳐 나갔다. 포작인의 수는 급격히 줄어 들었고, 제주도는 돌·바람·여자가 많은 삼다도란 별칭이 생긴다. 1694년 제주에 부임한 목사 이익태는 전복을 딸 남자가 부족하자 미역을 따던 해녀들에게 전복을 캐 바치도록 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전복을 캐는 사람을 뜻하는 '비바리'가 해녀를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여자로 나느니 쇠로 나주(여자로 태어 나느니, 소로 태어나는 것이 낫다)'라는 속담까지 생겨났다. 해녀의 역사는 제주 여성 수난의 역사지 싶다.

겨울에도 물질을 해야 했던 한국의 해녀

 해산물을 등에 지고, 허리춤엔 무거운 납덩이를 매달고 일하는 해녀 할망.
 해산물을 등에 지고, 허리춤엔 무거운 납덩이를 매달고 일하는 해녀 할망.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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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에도 물질을 해야 했던 한국의 해녀.
 겨울에도 물질을 해야 했던 한국의 해녀.
ⓒ 책 <숨비소리> 사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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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가혹한 전복 진상 부역을 피하려고 남자들이 제주를 탈출하는 일이 많아지자, 1629년부터 1830년까지 무려 200년 동안이나 제주 사람들을 육지로 나가지 못하게 만든 출륙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한다. 당시 전복을 따서 진상품이나 공물로 바치는 일은 제주도뿐만 아니라 남해의 여러 섬과 해안가 백성들에게도 지워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전복을 제때 바치지 못하면 관아에 붙들려가 매를 맞아야 했다.

"해녀들은 추위를 무릎 쓰고 이 바닷가 저 바닷가에서 잠수하여 전복을 따는데 자주 잡다 보니 전복도 적어져 공출로 바칠 양이 차지 않는다. 그런 때는 관청에 불려 들어져 매를 맞는다. 심한 경우는 부모도 붙잡혀 질곡당해 신음하고 남편도 매를 맞으며 해녀에게 부과된 수량을 모두 납부할 때까지 용서받지 못한다. "  

영조 때 제주도에 귀양 갔던 조관빈(1691~1757)이 전복 진상 때문에 고통 받는 해녀들을 보며 썼던 <잠녀설>가운데. 잠녀(潛女)는 해녀의 옛말로 좀녀, 좀녜라고도 했다.

바다 속에 잠수해 해산물을 채취하는 행위는 세계적으로 널리 볼 수 있다. 생계를 위해 아무런 장비 없이 잠수하는 사람은 한국과 일본에만 있다. 양국 해녀의 가장 큰 차이는 우리의 경우 추운 겨울에도 물질을 한다는 거다. 국가에 진상할 전복을 따기 위해 겨울에도 물질을 해야 했던 해녀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에도 송고했습니다 - sunnyk21.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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