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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균은 아주 나쁘게 묘사되어 있다. 이순신은 '음흉' 등 갖가지 표현을 써서 원균을 비난했는데, 가장 단적인 것은 칠천량 해전 얼마 전인 1597년 5월 8일자 일기이다.
<속 정유일기>에는 1597년 8월 4일부터 1598년 1월 4일까지의 일기가 실려 있다. <정유일기>와 66일치 일기가 중복되지만 기술이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에 서로 보완이 되며 각각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 9월 명량해전의 경위가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속 정유일기>에는 1597년 8월 4일부터 1598년 1월 4일까지의 일기가 실려 있다. <정유일기>와 66일치 일기가 중복되지만 기술이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에 서로 보완이 되며 각각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 9월 명량해전의 경위가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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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현충사 내 충무공이순신기념관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책과 문서들을 둘러본다. 공식 이름이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인 국보 76호 <난중일기>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긴 제목은, 책에 일기만이 아니라 이순신이 쓴 편지(書簡帖)와 보고서(壬辰狀草)들까지 실려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 외에도 기념관 안에는 <이충무공전서>와 <충무이공전진戰陣도첩圖帖>은 물론 류성룡의 <징비록> 등 다른 사람이 쓴 책들도 있다. 말 그대로 충무공이순신기념관답다.

'난중일기 초고본 : ①임진일기(1592), 계사일기(1593), 갑오일기(1594), 병신일기(1596), 정유일기(1597), 속정유일기(1597), 무술일기(1598)로 이루어져 있다. ②이순신이 임진왜란 기간 친필로 기록한 일기로, ③원래 임진, 계사 등 해를 나타내는 간지만 적혀 있었으나 정조 때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일기 수록 부분의 편명을 '난중일기'라 이름 붙여 현재까지 통칭되고 있다. ④난중일기는 16세기 동아시아 국제전쟁이었던 임진왜란·정유재란의 사료로서의 가치는 물론 개인의 내면과 감정을 솔직하게 기록한 일기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번호는 인용자가 붙임)'

<난중일기 초고본>(아래 초고본)을 소개하는 게시문은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해준다. ①초고본에는 1595년 일기가 없다.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글판 <난중일기>의 1595년 일기는 1795년(정조 19)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되어 있는 것의 번역문이다. ②초고본이 임진왜란 기간 중에 이순신이 친필로 작성한 일기라는 표현은 <이충무공전서>의 일기가 친필이 아니라 활자본이라는 뜻이다. ③이순신은 '난중일기'라는 제목으로 일기를 쓰지는 않았다. 그냥 매년 그 해의 간지를 붙여 임진년인 1592년 일기는 '임진일기'라 했고, 계사년인 1593년 일기는 '계사일기'라 했다.

<난중일기> 초고본의 모습(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
 <난중일기> 초고본의 모습(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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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난중일기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고, 또 일기답게 개인의 내면과 감정을 솔직하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이 자신의 내면과 감정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낸 부분은 원균에 관한 내용이다. '사실일까?' 의심이 될 만큼 원균은 아주 나쁘게 묘사되어 있다. 이순신은 '음흉' 등 갖가지 표현을 써서 원균을 비난했는데, 가장 단적인 것은 칠천량 해전 얼마 전인 1597년 5월 8일자 일기이다.

'원균이 수하 아전을 육지로 심부름 보내놓고는 그 아내를 사통하려 했다. 그러나 그 아내는 원균이 기를 써도 따라주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런 원균이란 자가 온갖 꾀로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또한 나의 운수로다. 원균이 나를 헐뜯기 위해 쓴 글은 너무 많아 말에 얹혀 조정으로 보내질 정도로, 그 짐이 서울길에 잇닿았을 지경이다. 그렇게 나를 헐뜯는 짓이 날이 갈수록 심하니, 그저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이 외에도 <난중일기>에는 원균의 나쁜 모습이 즐비하다. 

1593년 2월 28일, 원균이 어부들의 목을 찾고 있으니 황당하다.
3월 2일, 원균의 비리를 들으니 더 더욱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5월 14일, 원균이 함부로 말하고 사람을 속이니 모두 분개했다.
5월 21일, 원균이 거짓 공문으로 군사들을 속이니 정말 흉측하다.
5월 24일, 중국 화전을 원균이 혼자 쓰려 꾀를 내니 우습다.
5월 30일, 위급한 때에 원균 등이 계집을 배에 태우고 논다.
6월 10일, 원균이 흉계와 시기 가득 찬 편지를 보내왔다.
6월 11일, 원균이 술에 취해 정신이 없더라고 한다.
7월 21일, 원균이 흉측한 흉계를 냈다.
8월 2일, 원균이 나를 헐뜯어 망령된 말로 떠드니 어찌 관계하랴!
8월 6일, 원균은 걸핏하면 모순된 말을 하니 우습고도 우습다.
8월 7일, 원균은 항상 헛소문 내기를 좋아하니 믿을 수가 없다.
8월 19일, 원균은 음흉하고 하는 짓이 그럴 듯하게 남을 속인다.
8월 26일, 원균이 음흉하고도 도리에 어긋난 말을 하여 해괴했다.
8월 28일, 원균이 와서 음흉하고 간사한 말을 많이 내뱉었다.
8월 30일, 원균은 참으로 흉스럽다고 할 만하다.
9월 6일, 하루 종일 원균의 흉측스러운 일을 들었다.
1594년 1월 11일, 원균이 취해서 미친 말을 많이 했다. 우습다.
1월 19일, 원균이 남들이 마음에 둔 여자들과 몽땅 관계했다.
2월 18일, 원균이 심하게 취해서 활을 한두 번밖에 못 쏘았다.
3월 3일, 원균의 수군들이 우스운 일로 매를 맞았다고 한다..
3월 5일, 장수들이 이야기하는 중 원균이 오자 가버렸다.
3월 13일, 원균이 거짓으로 왜군 노릇한 놈을 목 잘라 바쳤다.
4월 12일, 원균이 미친 듯 날뛰니 모두들 무척 괴이쩍어 했다.
6월 4일, 임금의 꾸짖는 분부가 내려왔으니 원균 때문이다.
8월 30일, 원균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니, 천년의 한탄이다.
9월 4일, 활을 쏘았는데 원균이 아홉 푼을 져서 술에 취해 갔다.
10월 17일, 순무어사가 원균이 거짓말을 많이 한다고 이야기했다.
1595년 2월 20일, 원균의 악하고 못된 짓을 많이 들었다.
2월 27일, 원균이 너무도 무식한 것이 우습기도 하다.
1597년 5월 2일, 진흥국이 눈물을 흘리면서 원균의 일을 말했다.
5월 5일, 한산도에서 원균이 한 못된 짓을 많이 들었다.
5월 7일, 한산도에서 음흉한 자(원균)가 한 일을 많이 들었다.
5월 8일, 음흉한 원균이 편지 조문을 했다.
5월 11일, 소문들이 많이 들리는데 모두 흉물의 일이었다.
5월 20일, 체찰사(이원익)가 '흉물 탓에 나랏일이 걱정'이라 했다.
5월 23일, 체찰사가 원흉의 그릇된 일에 대해 분개했다.
5월 28일, 하동현감이 원균의 하는 짓이 엄청 미쳤다고 말했다.
6월 17일, 도원수(권율)가 원균의 거짓된 짓을 많이 말했다.
6월 19일, 도원수는 통제사(원균)의 일이 말이 아니라고 했다.
6월 25일, 원균이 적은 한 놈도 못 잡고 먼저 두 장수를 잃었다.
7월 21일, 노량에 이르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났다. 여러 장수들도 힘써 뭍으로 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것은 대장(원균)의 잘못을 말한 것인데 "입으로는 형용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씹어 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박현모의 원균에 대한 평가


박현모는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난중일기>에서 '인간 이순신에게서 발견되는 인상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원균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다. 원균에 대한 이순신의 감정은 복합적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원균은 이기적이고 무식한데다 부패한 장수였다. (중략) 하지만 이런 이순신의 원균에 대한 평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할 것 같다. 근래 원균에 대한 재평가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그를 무능하고 부패한 인간 말종의 장수로 매도해서는 곤란하겠기 때문'이라면서 '실제로 1596년에 서울로 압송된 후 처형되기 직전의 이순신을 구해낸 정탁도 어전회의에서 원균을 "쓸 만한 장수"라고 평가했다'라고 말한다.

이순신이 원균을 42회 이상이나 일기에 좋지 않게 올렸다. 연도별로 보면 특히 1593년에 17회, 1594년에 11회, 1597년에 12회 집중적으로 나쁘게 썼다. 1592년, 1595년, 1596년에는 나쁘게 쓴 적이 전혀 없거나, 혹은 거의 없었다.

1592년은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경상우수사 원균이 조선 수군의 지휘권을 공동으로 행사하면서 왜적을 무찌른 시기였다. 1596년은 원균이 충청병사로 재직하여 수군이 아니었고, 1595년은 원균이 충청병사로 옮겨간 해였다. 

1593년은 이순신과 원균이 3도수군통제사 자리를 놓고 다툰 해였다. 1594년은 원균보다 나이가 젊은 이순신이 3도수군통제사로서 조선 수군 전체를 지휘한 해였다. 1597년 5월 이후는 감옥에 갇혔던 이순신이 3도수군통제사로 다시 돌아온 시기였다.

선조 왈 "이순신과 원균은 물과 불의 상극"

1594년 11월 12일 선조의 발언은 두 사람의 사이가 얼마나 나빴는지에 대한 대표적 증언이다. 선조는 극단적인 말을 남겼다. 선조는 "두 사람은 물과 불의 상극이기 때문에 전쟁 중에도 서로 구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서로 해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조가 간행한 <이충무공전서>
 정조가 간행한 <이충무공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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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전서난중일기>는 1795년(정조 19) 정조가 충무공에 관한 자료를 총망라하여 간행한 <이충무공전서>의 일부이다. 정조가 자신의 개인 돈을 들여 인쇄한 <이충무공전서)는 8책 14권으로, 윤음(綸音, 임금이 백성들에게 내린 문서), 장계(보고서), 난중일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본서에 수록된 일기를 초고본과 구별하여 전서본이라 부르며, 편명이었던 <난중일기>가 오늘날까지 통칭되고 있다.

전서본의 일기와 초고본의 일기에는 상당한 차이가 난다. 정조의 명을 받아 전서본을 만든 편찬자들이 초고본의 내용 중 상당 부분을 생략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전서본에는 있는데 초고본에는 없는 내용도 많다. 

상당히 내용이 다른 초고본과 전서본

전시되어 있는 이순신 관련 고서 중에는 난중일기 초고본과 함께 국보 76호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의 핵심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임진장초>도 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장계들을 다른 사람이 따로 옮겨서 적은 책으로, 임진왜란 연구에 가장 중요한 사료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이순신의 이름이 실려 있는 <방목(榜目)>.  방목은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의 인적 사항을 수록한 책이다. 합격자의 이름, 태어난 해, 자(字), 본관, 거주지, 부친의 이름, 부모 생존 여부, 형제 등을 적었다. 본문에 나오는 구경하(具慶下)는 부모가 두루 생존해 계신다는 뜻이고, 안항(雁行)은 형제를 뜻한다.
 이순신의 이름이 실려 있는 <방목(榜目)>. 방목은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의 인적 사항을 수록한 책이다. 합격자의 이름, 태어난 해, 자(字), 본관, 거주지, 부친의 이름, 부모 생존 여부, 형제 등을 적었다. 본문에 나오는 구경하(具慶下)는 부모가 두루 생존해 계신다는 뜻이고, 안항(雁行)은 형제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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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유사>도 있다. 이 책은 이순신 종가에서 난중일기 초고본과 함께 소장하고 있던 책으로 18세기 이후 후손에 의해 필사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책의 일부인 일기초(日記抄)에는 난중일기 초고본과 전서본에서 볼 수 없었던 을미일기 30일치와 병신·무술일기 각각 1일치가 있어 주목된다.

이순신이 남긴 (일기를 제외한) 각종 글과 가문, 행적, 비문 등을 모아 만든 <충무공가승>도 있다. 가승은 대략 가문의 문집 정도를 뜻하는 말이다. 이순신의 4대손 이홍의와 5대손 이봉상(李鳳祥, 1676∼1728)이 목판으로 간행한 이 책은 당시 널리 읽혔다고 한다. 이봉상은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 충청병마사로서 청주에 있다가 반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순신이 갓머리에 장식품으로 달았던 옥로
 이순신이 갓머리에 장식품으로 달았던 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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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유품 중에는 옥로(玉鷺)에 특별히 눈길이 간다. 옥로는 높은 벼슬아치나 외국에 가는 사신이 갓머리에 다는 장신구로, 옥으로 해오라기 모양을 만들었다고 해서 옥로라 불렀다. 이순신의 옥로는 둥근 금동 받침 위에 연꽃잎으로 싼 세 마리의 해오라기가 조각되어 있다. 중국 장수로부터 받은 것으로 알려지는 북숭아술잔, 허리띠 등과 함께 보물 3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충무이공전진(戰陣)도첩(圖帖)>도 전시되어 있다. 전진도첩은 군대 배치도라는 뜻이다. 이 도첩에는 명령을 받을 때 진형인 청발장(廳發放)부터 좌우찰(左右札), 이로행(二路行), 첨자찰(尖字札), 곡진(曲陣), 원진(圓陣), 직진(直陣), 예진(銳陣)과 두 가지 모양의 학익진(鶴翼陣) 등 조선 후기 전라우수영에서 수군이 훈련할 때 사용한 10가지 진형의 모양이 그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마지막 통제영이 있던 고금도의 충무사에 소장되어 있는 <우수영전진도첩>을 누군가가 필사해서 <충무이공전진도첩>이라 이름붙인 것이다. 조선 후기 수군이 이용한 다양한 진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각선도본전선(各船圖本戰船)>도 있다. 조선 후기 수군의 군선(軍船)과 세금으로 바친 곡식을 옮기는 조운선(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싣고 가는 배) 등의 그림이 있는 책으로 채색화 6장을 모아 만들었다. 제목의 전선은 판옥선을 말한다. 배의 바닥이 넓고 갑판을 이중으로 하여 선체가 높아진 판옥선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충무이공 전진도戰陣圖>(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 이순신이 전투 때 배를 펼치는 대열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충무이공 전진도戰陣圖>(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 이순신이 전투 때 배를 펼치는 대열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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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촌선생문집>은 이순신과의 특별한 인연이 돋보이는,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고상안의 시문집이다. 고상안은 임진왜란 중 삼가현감을 지내며 갑오년(1594년)에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무과 시험을 실시할 때 시험 감독관으로 참가하여 이순신과 13일을 함께 지낸 적이 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 겸 도체찰사로 전란을 극복하는 데 앞장섰던 서애 류성룡이 전쟁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후손에게 분명히 타일러 다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전란을 회고한 글로,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전사 진술로 임진왜란 주요 사료로 평가받는다. 전시 중인 판본은 목판본이며, 친필 초고본은 국보 132호로 지정되어 현재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 소장되어 있다.

<징비록>에 대한 오해가 임진왜란에 대한 잘못된 인식 낳아

허선도는 논문 <임진왜란론>에서, 임진왜란 초기의 패전이 일반인들의 기억 속에 강력히 박히게 된 데에는 저자 류성룡이 <징비록>을 쓴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도 있다고 지적했다. 류성룡은 잘못을 반성하고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에서 잘못된 사례들을 많이 들었는데, 그것을 마치 임진왜란 전체의 실상인 양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상안의 <태촌선생문집>. 이순신 등 수군 장수들에 대한 인물평이 실려 있다.
 고상안의 <태촌선생문집>. 이순신 등 수군 장수들에 대한 인물평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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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문 중에는 '이순신 사후 증직·증시와 사당 건립'이라는 제목의 글도 있다. 게시문을 옮겨본다.

'우의정 선조 31(1598) 12.4.
충민사 전남 여수 선조 34(1601)
선무1등공신, 좌의정 선조 37(1604) 7.12.
충렬사 경남 통영 선조 39(1606)
충무공시호 인조 21(1643) 3.28.
현충사 충남 아산 숙종 32(1706)
영의정 정조 17년(1793) 7.21.'

1597년 2월 6일, 선조는 "임금을 속인 자(이순신)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라고 선포했다. 3월 4일, 이순신은 마침내 한양으로 끌려가 감옥에 갇혔다. 그랬던 선조가 불과 1년 뒤, 노량해전이 있었던 바로 그해 1598년에 이순신을 우의정에 추증(追贈, 죽은 후 벼슬을 올려주는 일)한다. 다시 1604년에는 한 단계 더 높은 좌의정에 올린다.

1601년과 1606년에는 전남 여수와 경남 통영에 사당도 세운다. 종전 직후 '전란 초반에 실추되었던 자신의 권위를 만회하고, 백성들 사이에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는 이순신 등을 견제하려는 의도(한명기 논문 <임진란 7주갑의 역사적 의미>)'에서 '왜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명군 덕분이다' 식의 발언을 했던 선조가 이제는 이순신을 높여주는 것이 정치적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조선 수군과 이순신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주는 충무공기념관

이곳에 현충사가 건립된 것은 1706년(숙종 32)의 일이다. 지금 본전(本殿)이라 부르는 신(新)사당은 1970년대 현대식 건물이고, 구(舊)본전이라 부르는 구(舊)사당은 1932년 건물이다. 충무공이순신기념관에서 이순신의 위대함을 충분히 알게 되었으니, 이윽고 사당을 찾아 참배를 할 차례이다. 기념관 뒤로 나아가면 구사당이 먼저 나오고, 신사당은 그 다음에 있다. 위치로 보나, 설립 시기로 보나 구사당부터 먼저 찾아야겠다.

1932년에 세워진 현충사 구사당
 1932년에 세워진 현충사 구사당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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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현충사, #이순신, #고상안, #류성룡, #충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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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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