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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넘어가는 환상적인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는 울릉도 동해 바다의 모습에서 인생의 끝자락은 무엇일가에 대한 생각에 잠기게 된다.
▲ 아름다운 울릉도의 석양 해가 넘어가는 환상적인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는 울릉도 동해 바다의 모습에서 인생의 끝자락은 무엇일가에 대한 생각에 잠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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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묵호항을 떠난 씨스타1호가 울릉도에 도착했으니 절반의 성공은 이루었다. 하지만 동해안의 너울파도가 심해서 내린 탑승객 대다수의 얼굴이 창백하다.
▲ 묵호-울릉도 운항 씨스타1호 일단 묵호항을 떠난 씨스타1호가 울릉도에 도착했으니 절반의 성공은 이루었다. 하지만 동해안의 너울파도가 심해서 내린 탑승객 대다수의 얼굴이 창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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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를 찾아갈 때는 마음을 비우라"는 명언이 있다. 단번에 독도에 발을 내딛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만큼 기상조건이 변화무쌍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서울에서 묵호항까지는 단숨에 달려갔다. 그런데 그곳에서부터 울릉도로 향하는 뱃길은 순탄치 않았다. 겨울 여행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11월 8월에 입항하기로 한 독도 탐방은 날씨가 안 좋아서 11월 12일로 돌렸다. 그 다음날인 11월 13일이 묵호에서 울릉도-독도로 들어가는 씨스타 1호의 올 마지막 출발이라고 했다. 비수기이니 손님도 별로 없고 그만큼 겨울바다의 환경적 조건이 받쳐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독도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도동항의 아름다운 해안선 모습. 포항으로 가는 배가 이곳 도동 선착장에서 떠난다.
▲ 도동항 독도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도동항의 아름다운 해안선 모습. 포항으로 가는 배가 이곳 도동 선착장에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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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에서 짐을 챙겨 맨 처음 찾아간 곳은 독도전망대와 독도박물관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케이블카로 갈아타고 돌아 돌아 흘러간 것이 독도전망대다. 비수기라 손님이 그렇게 많지 않아 한산한 케이블카에서 주변 경관을 둘러보는 것은 상큼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매점을 거쳐 수많은 계단을 오르내리면 두 군데 전망대에 당도한다. 통영에서 케이블카를 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왔다. 너무나 탁 트인 경관이 배 타고 들어올 때의 고통과 산란함을 씻어주었다. 날씨가 흐려서 멀리 독도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주변 환경이 사람의 눈을 앙큼하게 호렸다.

울릉도 하면 바다와 물의 조화만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울릉도에는 산도 있고, 성인봉도 있어 등산객들도 많이 찾아온다. 울릉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해발 986.7m의 성인봉은 산의 모양이 성스럽다고 하여 '성인봉'이라 부른다. 천연기념물 제189호로 지정되어 있는 정상 부근의 원시림(해발 600m)은 섬피나무, 너도밤나무, 섬고로쇠나무 등의 희귀수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등산코스로는 대원사→팔각정→성인봉→신령수→나리분지 코스가 인기가 있다.

오른쪽 동그란 봉우리가 보이는 곳이 울릉도의 상징인 ‘성인봉’이다. 울릉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해발 986.7m의 성인봉은  산의 모양이 성스럽다고 하여 ‘성인봉’이라 부른다.
▲ 성인봉 오른쪽 동그란 봉우리가 보이는 곳이 울릉도의 상징인 ‘성인봉’이다. 울릉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해발 986.7m의 성인봉은 산의 모양이 성스럽다고 하여 ‘성인봉’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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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순으로 내려가서 독도박물관을 찾았다. 입구에서 고윤정 학예연구사께서 화사한 얼굴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선 독도박물관이 생긴 내력부터 설명을 들었다. 독도박물관은 생긴 지 꽤 오래되었다. 광복 50주년 기념과 <중앙일보> 창간 30주년 기념사업으로 삼성문화재단이 공사비 80억 원을 지원하여 1997년 개관과 함께 울릉군에 기부하게 된 것이 문을 연 계기였다.

조선조는 울릉도와 독도에 대해 쇄환정책을 써서 오랜 시간 동안 섬을 비워두었고 일본인은 이를 악용하여 몰래 이 두 섬을 오가며 자원을 수탈하기 시작했다. 숙종 19년인 1693년에 안용복과 그의 일행이 울릉도에 도착했을 때, 이곳에서 불법 조업 중인 일본인과 섬의 영유권을 두고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안용복은 일본으로 끌려가게 되었고, 조선과 일본 간의 울릉도 쟁계가 발생하였다. 결국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고 동시에 불법적인 침탈행위를 금지하겠다는 서계(공식외교문서)를 보내왔다.

지상에 내려온 세 선녀가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이 전할만큼 아름다운 바위로 울릉도 해상 비경 중 으뜸으로 손꼽힌다.
▲ 삼선암 지상에 내려온 세 선녀가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이 전할만큼 아름다운 바위로 울릉도 해상 비경 중 으뜸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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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전망대를 내려와 저동항을 거쳐 북면 쪽으로 달려갔다. 그곳 해변에는 풍광이 좋은 삼선암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안용복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삼선암은 울릉도 해상 비경 가운데 으뜸으로 손꼽힌다.

삼선암은 지상에 내려온 세 선녀가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이 전할 만큼 아름답다. 제일 늑장을 부린 막내선녀 바위에만 풀이 자라지 않는다. 안용복기념관을 관람하고 내려와 석포일출전망대를 지나 죽암몽돌해변을 거치면 천부리의 명소 천부항에 다다른다. 그곳부터 해변을 따라가면, 송곳봉 근처의 '코끼리바위'가 길을 가로막는다.

화산섬인 울릉도의 화산분화구에 화산재가 쌓여서 생긴 화구원으로 울릉도 유일의 평야지대이다.
▲ 나리분지 화산섬인 울릉도의 화산분화구에 화산재가 쌓여서 생긴 화구원으로 울릉도 유일의 평야지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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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국 때부터 사람이 살았다. 그러나 조선조에 이르러 공도정책으로 수백 년 비워오다가 고종 때 개척됨에 따라 개척민들이 이곳에 왔다. 너와집은 4칸 일자집으로 지붕은 너와로 얹었다. 큰 방, 중간방, 갓방은 전부 귀틀 구조로 되어 있다.
▲ 너와집 우산국 때부터 사람이 살았다. 그러나 조선조에 이르러 공도정책으로 수백 년 비워오다가 고종 때 개척됨에 따라 개척민들이 이곳에 왔다. 너와집은 4칸 일자집으로 지붕은 너와로 얹었다. 큰 방, 중간방, 갓방은 전부 귀틀 구조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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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리에서 산길을 향하는 고개로 접어들어 홍살문을 지나면 유명한 '나리분지'에 도달한다. 나리분지는 화산섬인 울릉도의 화산분화구에 화산재가 쌓여서 생긴 화구원으로 울릉도 유일의 평야지대이며, 우산국 때부터 사람이 살았다. 그러나 조선조에 이르러 공도정책으로 수백 년 비워오다가 고종 때 개척됨에 따라 개척민들이 이곳에 왔는데, 옛날부터 정주한 사람들이 산야에 자생하고 있는 많은 섬말나리 뿌리를 캐먹고 연명하였다고 하여 '나리골'이라 불리게 되었다.

나리분지의 명소는 너와집과 투막집이다. 너와집은 4칸 일자집으로 지붕은 너와로 얹었다. 큰방, 중간방, 갓방은 전부 귀틀 구조로 되어 있는데, 큰방과 중간방은 정지에서 내굴로 되었고, 갓방은 집 외부에 우대기를 돌출시켜 별도의 아궁이를 설치하였다. 투막집도 구조는 비슷하나 지붕의 모양이 다르다. 개척민들의 척박한 삶을 잘 보여준다.

나리분지에서 다시 해안도로로 내려와 예림원, 현포항을 거쳐 태하리 학포항으로 왔다. 현포항이 있는 현포리에는 울릉도 등대가 있고, 대풍감에서 바라보는 북면 해안을 소위 우리나라의 10대 비경으로 꼽는다. 월간 <산>지가 10대 비경의 하나인 명승으로 선정했다. 대풍은 바람을 기다리는 언덕이라는 뜻으로 돛단배가 순풍을 받아 출항하면 육지로 나갈 수 있었다. 전망대 외쪽 해안은 천연기념물 제49호 대풍향나무의 자생지며, 반대편에는 북면을 향해 이어지는 기암절벽과 해안선이 장관을 이룬다.

마을 뒤편 암산에 학이 앉아있는 모양의 바위가 있어 학포라고 하는데, 아름다운 해안도 절경이지만, 울릉도 개척사의 유적이 있어 더욱 유명하다.
▲ 학포항 마을 뒤편 암산에 학이 앉아있는 모양의 바위가 있어 학포라고 하는데, 아름다운 해안도 절경이지만, 울릉도 개척사의 유적이 있어 더욱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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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포지역은 태하보다 규모가 작고 황토가 많아 '소황토구미'라고도 하고 마을 뒤편 암산에 학이 앉아있는 모양의 바위가 있어 '학포'라고도 한다. 아름다운 해안도 절경이지만, 울릉도 개척사의 유적이 있어 더욱 유명하다.

조선 고종 때 이규원 검찰사가 학포에 처음으로 도착한 곳으로 '임오명 각석문'을 남겼다. 이규원은 고종의 명을 받고 선박 3척에 102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고종 19년(1982년) 4월 28일에 강원도 평해군 구산포를 출발해 다음날 이곳 소황토구미(학포마을)에 도착하여 육로와 수로를 통해 울릉도를 답사하고 돌아가 지도와 복명서를 작설하여 고종에게 보고하였다.

울릉도 개척의 역사인 고종 때 이규원 감철사가 자연 암벽의 평탄면에 울릉도라는 도명과 본인의 직성함인 검철사 이규원과 임오 오월이라는 년월, 그리고 동행인 유연호, 고종팔, 서상학의 이름을 새겼다.
▲ 검찰사 이규원 각석 울릉도 개척의 역사인 고종 때 이규원 감철사가 자연 암벽의 평탄면에 울릉도라는 도명과 본인의 직성함인 검철사 이규원과 임오 오월이라는 년월, 그리고 동행인 유연호, 고종팔, 서상학의 이름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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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이규원이 복명한 울릉도 지도와 보고서를 통해 울릉도 실정을 파악한 후 쇄환정책을 철회하고 사람이 거주하는 개척정책을 실시하였다. 고종 20년(1883년) 4월부터 7월까지 16가구 54명이 정부에서 지원한 선박과 농기구, 종자 등을 가지고  첫 이주민이 들어오게 되어 울릉도 개척의 역사가 시작 되었다. 이규원 검찰사는 이곳 자연 암벽의 평탄면에 울릉도라는 도명과 본인의 직성함인 검철서 이규원, 임오 오월이라는 년월과 동행인 유연호, 고종팔, 서상학의 이름을 각자하였다.

바닷가에서 오징어를 널어놓고 말리는 작업을 하는 울릉도 어민들의 싱그러운 모습이 보인다.
▲ 울릉도의 상, 오징어와 호박엿 바닷가에서 오징어를 널어놓고 말리는 작업을 하는 울릉도 어민들의 싱그러운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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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동 수협공판장에서 새벽 경매시장에서 낙찰 받은 오징어를 다듬고 있는 울릉도 어민들의 모습에서 일상적 삶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 저동 수협공판장 저동 수협공판장에서 새벽 경매시장에서 낙찰 받은 오징어를 다듬고 있는 울릉도 어민들의 모습에서 일상적 삶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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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현재 울릉도의 인구수는 1만 316명이다(<경북일보> 보도). 2005년 12월 기준으로 9550명이었으니 인구가 약간 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울릉도의 행정구역은 울릉읍, 서면, 북면 1읍 2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울릉군의 중심지역은 단연 울릉읍으로 2005년 12월 기준 2821세대 6773명이 거주하여 울릉군 내 3개 읍면 중 71%를 차지하여 가장 인구가 많다. 서면은 679세대 1545명이 거주하여 16%를, 북면은 578가구 1272명이 거주하여 13%를 차지하고 있다.

개척정책 초기 거주지별로 보면 우리나라 주민은 주로 내륙이나 계곡 일대를 점유하여 농사를 지었고, 일제강점기 일본인은 주로 해안가에 거주하며 어업활동을 했다고 한다. 우리 이주민 중 가장 큰 집단은 북면의 나리동으로 93세대에 500여 명이 거주했다. 반면 일본인들은 주로 해안에 거주하여 어업활동하기 편리한 도동, 저동, 서면 태하·남양·통구미, 북면의 죽암ㆍ현포에 거주했는데, 도동이 가장 많아서 그 세대수가 135가구에 인구가 674명이었다고 전해진다.

수충터널과 남양터널, 그리고 통구미 터널을 지나 해안으로 접어들자 오후 5시가 가까워져 일몰시간이 되었다. 제주도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여러 곳의 일몰장면의 아름다움을 맛보았지만 울릉도 해변의 일몰장면도 대장관이었다. 태안반도 꽃지해수욕장의 낙조, 변산반도 채석강의 낙조, 강화도 석모도의 낙조 일몰 그리고 한려해상 달아공원의 일몰과 더불어, 울릉도 일몰은 우리나라 5대 일몰 명소로 손꼽힌다. 바쁘게 보낸 하루였지만, 석양의 아름다움을 접하니 객수의 피로가 단번에 풀리는 느낌이었다.

태안반도 꽃지해수욕장의 낙조, 변산반도 채석강의 낙조, 강화도 석모도의 낙조 일몰, 그리고 한려해상 달아공원의 일몰과 더불어, 울릉도 일몰은 우리나라 5대 일몰 명소로 손꼽힌다.
▲ 환상적인 울릉도의 낙조 장면 태안반도 꽃지해수욕장의 낙조, 변산반도 채석강의 낙조, 강화도 석모도의 낙조 일몰, 그리고 한려해상 달아공원의 일몰과 더불어, 울릉도 일몰은 우리나라 5대 일몰 명소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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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울릉도 어민들의 민낯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았다. 새벽 오징어 경매시장, 나리분지의 너와 집, 바닷가 어민들의 오징어 말리기 작업 등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고단한 삶 속에서도 인생의 아름다움이 담뿍 내재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태그:#울릉도 어민들의 일상적 삶, #울릉도 , #오징어 말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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