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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우화인 '비겁한 박쥐' 이야기를 모르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형세의 유불리에 따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했던 박쥐는 결국 그로 인해 평생을 어두운 동굴에서 살게 된다. 뚜렷한 주관이나 소신 없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양다리를 걸쳐야 했던 박쥐의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교육부가 27일 역사교과서의 현장 적용 시기를 1년 늦추고, 2018년부터 국정·검정 교과서를 혼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 적용 유예 및 국정·검정 혼용 방안을 발표했다. 불현듯 '비겁한 박쥐' 우화가 생각났다. 국정 역사교과서의 즉각적인 폐기를 주장하는 시민사회와 강행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는 현 정권 사이에서 교육부가 고심한 흔적이 너무도 빤히 보이는 탓이다.

교육부의 속내, 빤히 보인다

이준식 사회부총리겸 교육부 장관이 지난 27일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브리핑실에서 역사교과서 현장 적용 방침을 발표하고 있다.
 이준식 사회부총리겸 교육부 장관이 지난 27일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브리핑실에서 역사교과서 현장 적용 방침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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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을 움직여 탄핵 정국을 이끌어낸 시민사회는 국정교과서의 전면 폐기를 일관되게 주장해온 터였다. 지난 21일 국회 대정부질문에 참석한 이준식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밝힌 국정교과서 현장검토본에 대한 부정 평가만 해도 63%에 이른다. 교육부의 입장에서는 2017년부터 국정 역사교과서를 현장 적용할 경우 시민사회의 역풍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교육부는 희망하는 학교에 한해 2017년 국정교과서를 사용할 수 있도록 여지를 뒀다. 이를 위해 교육부는 우선 국정교과서를 희망하는 학교를 연구학교로 지정해 1000만 원의 지원금을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2018년에는 일선 학교가 국정교과서와 새 교육과정에 따라 개발된 검정교과서 중에서 선택할 수 있도록 '교과용 도서에 관한 규정'을 개정할 방침이다.

교육부의 속내는 국정 역사교과서의 현장 적용을 1년 유예시켜 시민사회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한편 탄핵 이후의 상황에도 대비하려는 이중의 포석으로 풀이된다. 만에 하나 탄핵심판이 부결될 경우 예정대로 국정교과서를 강행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교육부의 기회주의적 행태는 국정 역사교과서와 관련된 이 부총리의 오락가락 행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지난달 25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교문위) 전체회의에서 역사교과서를 공개한 다음 여론의 추이에 따라 국정화를 철회할 수도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가 이를 뒤집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갈지자' 행보를 보여왔다. 이는 이 부총리가 국정화 반대 여론과 국정화 강행을 고집하는 정권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당초 발표가 있기 전까지만 해도 교육부가 1년 유예안을 내놓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대부분의 언론이 이를 기정사실처럼 보도했고, 교육부 내부에서도 이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에도 불구하고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과 새누리당이 국정화 강행 의지를 굽히지 않자 결국 교육부는 국정·검정 혼용이라는 이도 저도 아닌 '꼼수'를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시민사회와 정권 양쪽의 눈치를 모두 보고 있는 교육부의 행태에서 '비겁한 박쥐' 우화를 떠올리는 이유다.

그동안 각계각층에서 국정 역사교과서를  반대해온 이유는 하나다. 국정 역사교과서가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에 입각해 기술된 오류 투성이의 '불량 교과서'라는 사실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를 노골적으로 왜곡·미화하고 있는 국정 역사교과서가 박근혜 대통령의 효심의 산물이라는 지적까지 나온다. 이에 역사학계와 교육계에서는 국정 역사교과서가 친일과 독재 미화로 퇴출당한 교학사 교과서의 아류작이라는 굴욕적인 평가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달 28일 교육부가 공개한 현장검토본에서도 이와 같은 역사적 오류와 왜곡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역사적 사실에서 벗어난 기초적인 오류가 근현대사는 물론 고대사에서도 부지기수로 발견된 것이다. 국정 역사교과서는 거의 책 한 권을 다시 써야 했을 정도로 오류가 많았던 교학사 교과서의 처절한 실패(?)를 딛고 탄생한 작품이었다. 그만큼 박근혜 정권이 각고의 노력과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마저도 곳곳에서 오류와 왜곡이 발견되는 수준 미달의 교과서였다.

'올바른 교과서'라는 오만 

고등학교 <한국사> 국정교과서 현장검토본
 고등학교 <한국사> 국정교과서 현장검토본
ⓒ 교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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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 역사교과서의 수준이 이 정도라면 시민사회의 반대 여론을 수렴해 즉각 폐기 선언을 하는 것이 옳다. 국정 역사교과서의 앞날이 대단히 불투명하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국회 교문위 소속 야당 의원들은 '국정교과서 금지법'을 통과시키겠다고 벼르고 있고, 이 부총리에 대해서도 해임 건의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미 전국 교육청 17곳 중 14곳에서도 국정 역사교과서를 채택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시민의 2/3가 국정 역사교과서에 반대하고 있으며 일선 교사들과 학생들마저 완강히 거부의사를 밝히고 있다. 교육부가 국정 역사교과서를 고집할 명분과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교육부는 시민사회와 박근혜 정권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는 기회주의적인 행태를 일삼고 있다. 교육 현장에서 빚어질 혼란은 안중에도 없이 시민을 기만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그동안 박근혜 정권은 국정 역사교과서가 '올바른 교과서'라고 강변해왔다. 그러나 가치중립의 역사 문제를 정권이 나서 재단하는 것부터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도대체 누가 어떻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인가. 오만하고 위험천만한 독재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애당초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고 있는, 조악하고 부실하기 짝이 없는 국정 역사교과서가 '올바른 교과서'로 둔갑될 수는 없는 일이다.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사실을 교육 정책을 총괄하는 이 부총리가 모를 리가 없다. 이 부총리는 지금이라도 '비겁한 박쥐' 우화에 담긴 교훈을 성찰하기 바란다.


태그:#이준식 부총리 , #국정 역사교과서 퇴출, #국정 역사교과서 1년 유예, #국정교과서 금지법, #교학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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