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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녹진항의 이순신 동상이 울돌목 물살을 바라보며 서 있다. 이곳에 가면 바닷물 위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울돌목 물살을 가장 실감나게 감상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 동상 주변이다. 울돌목 일원 관광지에 가서 반드시 찾아보아야 할 곳, 녹진항 이순신 동상 아래이다.
 진도 녹진항의 이순신 동상이 울돌목 물살을 바라보며 서 있다. 이곳에 가면 바닷물 위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울돌목 물살을 가장 실감나게 감상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 동상 주변이다. 울돌목 일원 관광지에 가서 반드시 찾아보아야 할 곳, 녹진항 이순신 동상 아래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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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1597년 9월 16일) 왜의 수군이 남해에서 북쪽으로 올라왔는데, 수군대장 이순신이 해상에 머물러 쇠사슬로 여울 위를 가로막고 왜 수군을 기다렸다. 왜선이 여울 위에 이르자, 쇠사슬에 걸리어 그 아래로 거꾸로 뒤집히고, 여울 위의 배는 낮은 곳이 보이지 않아 거꾸로 뒤집힌 것을 알지 못하고, 그 여울을 넘어서 흐름에 따라 곧장 내려가는 줄로만 생각되었지만 사실은 모두 거꾸로 뒤집혔다. 물의 흐름이 돌다리에 가까울수록 더욱 더 급하게 되어 배는  빠른 물살 속으로 휘말려들어가 돌아 나올 틈이 없어서 오백 채가 한꺼번에 모두 빠져 한 채도 남지 못하였다.'

이 인용문은 <택리지>에 나오는 것으로, 이중환이 요약한 명량대첩의 핵심 개요이다. 이중환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울돌목 물속에 쇠사슬을 설치해 둔 줄 미처 알지 못한 일본 전함들이 조선 수군을 공격하기 위해 막무가내로 진입하다가 오백 채가 한꺼번에 수장되는 참패를 맛보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적선 오백 척이 한꺼번에 물귀신이 되었다는 기록은 이순신의 능력을 키워서 말하고 싶은 충정 때문이었다 하더라도 지나친 과장이다. 아무래도 이중환(1690~1752)이 임진왜란 당시에 비해 100년 이상 후대 인물인 탓에 직접 경험이 아니라 들은 이야기를 적다 보니 그렇게 된 모양이다.

<선조실록> 증언에 따르면 31척 전함 파괴

'오백 척이 한꺼번에' 수장되었다는 표현은 '133척 중 31척'으로 고치는 것이 옳겠다. 133척은 <난중일기> 초고본 1597년 9월 16일자에, 31척은 이순신의 장계에 근거하여 작성된 <선조실록> 1597년 11월 10일자에 나오는 증언이다. 요약하면, 적선 133척이 진도 벽파진 앞바다를 거쳐 울돌목으로 몰려왔을 때 이순신은 겨우 13척의 전함밖에 없었지만 세차게 급변하는 물살과 일본군보다 훨씬 우수한 화포를 잘 활용하여 그 중 31척을 물속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나머지 적선들은 크고 작게 파괴된 채 도주했다.

해남 우수영 국민관광지에 조성되어 있는 철쇄(쇠사슬) 모형
 해남 우수영 국민관광지에 조성되어 있는 철쇄(쇠사슬)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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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쇠사슬 이야기는 믿을 만할까? <난중일기> 1592년 1월 11일자에 따르면, 이날 선생원(여수 율촌 신풍리 소재 관청 숙소)의 부석처(채석장)에 다녀온 이봉수는 이순신에게 "벌써 큰 돌 열일곱 덩어리에 구멍을 뚫었다."라고 보고한다. '벌써'라는 단어는 큰 돌에 구멍을 뚫는 작업이 며칠 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 외에도 쇠사슬 관련 기사는 또 있다. 1월 16일, 이순신은 쇄석(쇠사슬 박을 돌)을 뜨러 갔다가 이웃집 개에 피해를 끼친 토병(의병) 박몽세에게 곤장 80대를 친다. 다음날인 1월 17일, 이순신은 김효성에게 배 4척을 거느리고 선생원으로 가서 철쇠공석(쇠사슬 박을 구멍을 낸 돌)들을 실어오도록 한다.

2월 2일 일기는 더욱 주목을 끈다. 이순신은 쇠사슬을 건너 매는 일에 쓸 크고 작은 돌 80여 개를 실어 온다. 이순신은 '건너 맨다(橫設)'라고 적었다. 9일에는 쇠사슬을 꿸 긴 나무를 베어올 일로 김원룡에게 군사들을 주어 두산도(돌산도)로 보낸다.

쇠사슬 설치 준비는 1592년 3월에 완료된 듯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는 '이순신이 군대의 준비를 갖추는 데 가장 관심을 쏟은 것은 거북선 건조 문제와 수영 앞바다에 가설한 철쇄 장치였다.'면서 '철쇄 설치는 (1592년) 3월 하순경에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난중일기>를 근거로 울돌목 북쪽의 명량대첩해전사기념전시관 앞에는 임진왜란 당시 철쇄를 복원한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진도 전망대(일명 녹진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울돌목 일원의 풍경. 과연 피비린내나는 전쟁터였던가 의심스러울 만큼 평화롭고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준다. 진도대교 오른쪽 건너편이 해남 우수영 국민관광지(명량대첩 해전사 기념전시관)이고, 왼쪽 너머가 전라우수영이 있었던 우수영 포구이다.
 진도 전망대(일명 녹진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울돌목 일원의 풍경. 과연 피비린내나는 전쟁터였던가 의심스러울 만큼 평화롭고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준다. 진도대교 오른쪽 건너편이 해남 우수영 국민관광지(명량대첩 해전사 기념전시관)이고, 왼쪽 너머가 전라우수영이 있었던 우수영 포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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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누군가는 이순신이 울돌목에 쇠사슬을 설치했다는 것을 전설로 치부하기도 한다. 이순신이 벽파진에서 해남의 우수영으로 군대를 옮긴 것이 9월 14일이고, 명량해전이 벌어진 날이 그 이틀 뒤인 9월 16일이라는 점을 들어 쇠사슬 설치 이야기를 지어낸 설화로 보는 것이다. 어떻게 이틀만에 쇠사슬을 바다에 놓을 수 있느냐는 해석이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순신이 울돌목에 쇠사슬을 설치할 준비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발발 이전인 1592년 1월 초이고, 준비를 마친 때는 3월 하순이다. 명량대첩은 그로부터 무려 5년 6개월 후인 1597년 9월의 일이다. 시간은 충분했다!

그런가 하면, <난중일기> 당일 날짜의 '우리 군관들이 배 위에 줄지어 서서 비 오듯 쏘아대니 적도들이 저항하지 못하고 사근사퇴했다(乍近乍退).'라는 표현이 쇠사슬 설치 이야기를 전설로 보는 또 다른 근거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때 사근사퇴는 흔히 '나왔다 물러갔다'로 번역된다. 하지만 사근사퇴는 일본 전함들이 자유롭게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乍)는 잠깐이므로, 사근사퇴는 일본 전함들이 오도가도 못 했다는 뜻이다. 적과 맞선 배는 이순신의 대장선 한 척뿐이었는데 '아군을 에워싸고 있던 30척 이상의 적선'들이 오지도 가지도 못했다? 쇠사슬이 설치된 급한 물살이 그들의 발을 붙잡았던 것이다.

사근사퇴는 자유로운 왕래가 아니라 꼼짝 못했다는 뜻

또, 이순신이 명량대첩을 일구는 데 쇠사슬이 한몫했다는 말을 일기에 적어놓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들기도 한다. 그러나 <난중일기>에는 1592년 6월 11일부터 8월 23일까지의 기록이 빠져 있어 한산도대첩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다.  

한산도대첩에 관한 기록은 이순신이 조정에 보낸 '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에 실려서 전한다. 이순신은 견내량에서 왜적들을 쳐부순 일에 대한 이 보고서를 통해 한산도대첩의 전투 경과를 자세하게 증언해준다. 하지만 명량대첩에 관해 보고한 이순신의 장계는 무슨 까닭에서인지 남아 있지 않다. 명량대첩에 대해 세밀하게 말해주는 기록물은 <난중일기>뿐이다.

진도대교 넘자마자 오른쪽으로 가면 울돌목 거친 물살과 이순신 동상을 볼 수 있는 녹진항이고, 왼쪽으로 높이 올라가면 울돌목 전경을 볼 수 있는 진도전망대(일명 녹진전망대)가 나온다.
 진도대교 넘자마자 오른쪽으로 가면 울돌목 거친 물살과 이순신 동상을 볼 수 있는 녹진항이고, 왼쪽으로 높이 올라가면 울돌목 전경을 볼 수 있는 진도전망대(일명 녹진전망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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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리지>의 기술 중 또 하나의 요점은, 여느 해안의 것과도 비교를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울돌목의 물살을 이순신이 적절히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이중환은 '물의 흐름이 돌다리에 가까울수록 더욱 더 급하게 되어 적선들은 빠른 물살 속으로 휘말려들어가 돌아 나올 틈이 없어서 오백 채가 한꺼번에 모두 빠져 한 채도 남지 못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순신이 철쇄를 설치한 지점으로 다가갈수록 물살이 빨라지는데, 일본 전선들은 그곳에 들어서면서 전투 태세를 잃고 우왕좌왕하다가 우리 수군의 강력한 대포 공격에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는 설명이다.

우리 역사에 이름은 남긴 울돌목 물살을 제대로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아무려면 바다가 병목처럼 좁아지는 곳으로 가야 마땅할 것이다. 해남과 진도 사이 약 900m 길이에 걸쳐 동서로 이어지는 울돌목 중 가장 좁은 곳은 진도대교 바로 밑이다. 대체로 500m남짓 되는 울돌목의 폭이 이곳에서는 300m도 채 안 되고, 그것도 물가를 온통 점령하고 있는 암초들 때문에 바닷물이 자연스럽게 흐를 수 있는 공간은 그저 100m를 조금 넘을 뿐이다.

울돌목 좁은 폭이 조수의 흐름을 더욱 세게 만들어

일본 전함들이 울돌목으로 들어선 1597년 9월 16일 오전 10시 무렵, 남해안의 바닷물은 서해안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그 적들을 이순신의 수군이 맞이했다. 적선은 모두 130척 이상이었지만, 진도대교 아래 좁은 바닷길에서 암초까지 피해가며 항해를 해야 했으므로 앞장서서 쳐들어 온 숫자는 30여 척이었다. 당일의 <난중일기>를, 약간의 내용을 보태가며 읽어본다.

해남 명량대첩해전사기념전시관 앞 바다에 이순신이 서 있다. 사진 오른쪽에 진도대교가 보이고, 가장 오른쪽 끝에 이순신 동상이 작게 보인다. 동상이 서 있는 곳은 진도 녹진항이다. 녹진항의 이순신 동상 주변에 가면 울돌목 거센 물살을 가장 실감나게 감상할 수 있다.
 해남 명량대첩해전사기념전시관 앞 바다에 이순신이 서 있다. 사진 오른쪽에 진도대교가 보이고, 가장 오른쪽 끝에 이순신 동상이 작게 보인다. 동상이 서 있는 곳은 진도 녹진항이다. 녹진항의 이순신 동상 주변에 가면 울돌목 거센 물살을 가장 실감나게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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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을 보는 군사들이 아침 일찍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적선들이 명량을 거쳐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고 보고했다. 바로 배들의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3척(<난중일기> 초고)이 우리를 포위했다. 여러 장수들이 중과부적이라 여기고 전투를 피할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나는 노를 재촉하여 앞으로 돌진해 들어가면서 지자총통과 현자총통 등을 마구 쏘아댔다. 탄환이 발사되는 것이 마치 바람이 불고 우레가 치는 듯했다. 군관들이 배 위에 줄지어 서서 비 오듯 화살을 쏘아대니 적도들이 저항하지 못한 채 오도가도 못 하였다. 그래도 적들에게 겹겹으로 에워싸여 있어 앞으로 어찌될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모두들 얼굴빛이 질려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일렀다.

"적선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조금도 흔들리지 말고 있는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

그래도 여러 장수들은 먼 바다로 물러나서 바라보기만 할 뿐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배를 돌려 장수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고 싶었지만, 내가 돌아서면 적들이 그 틈을 타 기세를 올릴 듯하여 그럴 수도 없었다.

초요기(장수들을 지휘하는 대장의 깃발)를 높이 세웠다. 중군장 김응함의 배가 차차 다가왔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앞서 당도했다.

"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을 가면 어디에 가서 살 것이냐?"

안위가 부랴부랴 적진 속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다시 김응함을 불렀다.

"너는 중군장이 된 몸으로 대장을 구하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있으니 어찌 죄를 면할 수 있겠느냐? 당장 처형을 할 것이지만 지금 전투가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울 기회를 주마."

김응함의 배도 적과 싸움에 들어갔다. 이때 일본 장수가 이끌고 온 적선 3척의 왜병들이 안위의 배에 개미떼처럼 올라가기 시작했다. 안위의 군사들은 각이 진 몽둥이로 적을 치고, 긴 창을 휘두르고, 수마석(물에 마모된 반들반들한 자갈돌)으로 때리며 적을 막았지만, 이내 기진맥진하였다. 

나는 뱃머리를 돌려 안위의 배로 갔다. 포와 화살을 빗발치듯 쏘아대니 적선 3척이 거의 뒤집힐 지경이 되었다.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가 합세하여 적선을 공격했다. 적선 3척에 타고 있던 왜병들이 거의 죽었다.

녹진항에서 보는 울돌목의 거센 물살. 바다 가운데서 회오리를 일으키기 때문에 물살의 빛깔과 방향이 달라보이는 것이 눈으로도 확인된다.
 녹진항에서 보는 울돌목의 거센 물살. 바다 가운데서 회오리를 일으키기 때문에 물살의 빛깔과 방향이 달라보이는 것이 눈으로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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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샌가, 울돌목 물살이 방향을 바꾸었다. 남해에서 서해로 흐르는 순류를 타고 쳐들어온 적들은 갑자기 빠른 물살이 뒤집혀 서해에서 남해로 흐르자 당황했다. 게다가 암초들에 부딪힌 급류는 회오리를 일으켜 적선들이 몸을 가누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물밑 쇠사슬과 회오리 물살에 점점 휘말린 적선들은 오도가도 못한 채 더욱 뒤엉켰고, 하늘이 내려준 이 기회를 놓칠세라 우리는 대포와 불화살을 퍼부었다. 항복해서 우리 군사가 된 항왜 준사(俊沙)가 바다를 내려다보더니 크게 소리를 질렀다.

"저기 붉은 옷을 입은 자가 적장 마다시(馬多時)입니다!"

군사 김돌손을 시켜 갈고리로 적장을 끌어올리게 했다. 준사가 펄쩍펄쩍 뛰면서 '맞습니다! 틀림없이 마다시 바로 그 자입니다!' 하고 좋아했다. 마다시의 목을 잘라 뱃머리 위에 하늘 높이 내걸었다.

마다시의 시체를 본 적들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선조수정실록> 1597년 9월 1일자는 '통제사 이순신이 진도 벽파정 아래에서 적을 격파하여 왜장 마다시를 죽였다.'라고 기록하면서 '마다시는 수전을 잘한다고 소문난 자'로 소개하고 있다.) 적들이 공격할 기운을 잃은 것이 두드러졌으므로 우리는 일제히 전진하면서 천지가 흔들리도록 지자총통, 현자총통을 발사하고, 빗발처럼 화살을 쏘아댔다.

적선 31척을 부수었다. 이제 적들은 감히 우리 군사들 가까이 오지 못했다. 이번 승리는 참으로 천행(天幸, 하늘의 도움)이었다.'

울돌목의 거센 물살이 진도 녹진항 앞을 흐르고 있다. 멀리 보이는 포구는 전라우수영이 있던 해남군 동외리로, 지금도 이 마을 955-6번지에는 명량대첩비가 남아 있다. 우수영 포구에서는 현대판 거북선을 타고 바다로 나아가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울돌목의 거센 물살이 진도 녹진항 앞을 흐르고 있다. 멀리 보이는 포구는 전라우수영이 있던 해남군 동외리로, 지금도 이 마을 955-6번지에는 명량대첩비가 남아 있다. 우수영 포구에서는 현대판 거북선을 타고 바다로 나아가는 체험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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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명량대첩을 하늘의 도움으로 이겼다고 겸양하게 표현했다. 본인의 지휘 능력, 작전 수립 능력, 앞장서서 싸우는 솔선수범의 자세, 뛰어난 조선 화포의 수준, 전투에 유리한 지점을 찾아 울돌목 일대로 군대를 옮겨온 판단력 등등을 결코 자랑하는 법 없이 그저 천행이라고 했다. 이 천행이라는 표현 속에는 틀림없이 울돌목의 거센 물살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울돌목의 물살을 잘 활용한 것은 이순신 본인과 우리 수군의 능력이다. 하늘이 우리에게 준 복이기도 하지만, 땅과 물의 모양새와 특성을 전투에 효율적으로 반영한 것은 사람의 힘인 까닭이다.

그래서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는 '관방(關防)이라 불린 지형지물, 즉 서남해 해상의 많은 해안 굴곡과 조수 등을 교묘히 활용할 줄 알았던 것도 조선 수군이 해전에서 승리한 요인의 하나'라고 평가하고 있다. 육지의 의병들도 자기 고장의 지리를 잘 활용할 수 있는 매복과 기습으로 왜적들을 무찔렀다.

울돌목 일원 답사 순서


뿌리깊은나무가 펴낸 <한국의 발견>은 울돌목을 진도에 넣고 있다. 울돌목을 찾은 사람들 중에 해남의 명량대첩공원(우수영 국민관광지)를 둘러보고 떠나는 경우가 많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일까? <한국의 발견>은 울돌목을 해남이 아니라 진도 항목에 넣음으로써 울돌목 물살을 보려면 진도에 가야 한다는 아주 시사적인 가르침을 준다.

녹진항부터 시작하는 울돌목 일대 답사의 여정을 소개해 본다. ① 녹진항 이순신 동상, 산책로, 울돌목 물살 ② 진도전망대(일명 진도타워, 녹진타워)에서 울돌목 전경 조망 ③ 해남 우수영 국민관광지, 명량대첩 해전사 기념전시관 ④ 명량대첩비(보물 503호,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 955-6) ⑤ 우수영 포구 거북선 타보기

울돌목에 왔으면 울돌목 물살 꼭 봐야

울돌목에 와서, '국민 상식'이 된 울돌목 물살을 제대로 감상하지 않고 돌아갈 수는 없다. 회오리를 일으키며 급한 물살이 남해와 서해 사이를 거칠게 흐르는 곳, 바로 그 지점을 바라보며 이순신이 서 있다. 거대한 이순신 동상이 잘 조경된 공원 끝에 서서 울돌목 물살을 응시하고 있다. 진도 녹진항, 진도대교를 넘자마자 곧장 오른쪽으로 접어든 작은 포구이다.

찾아온 나그네를 위해 녹진항에는 바닷물 안으로 산책로가 놓여 있다. 물 위를 걸어가며 오른쪽의 진도대교와 정면의 우수영 포구를 바라보면, 회오리를 일으키며 싸우듯 몰려다니는 물살이 눈과 마음을 겁박하고, 와르릉 와르릉 소리를 내며 우는 굉음이 귓가를 마구 때려댄다.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무서운 급류다. 역시 울돌목에 와서는 울돌목 물살을 보아야 한다. 물살이 일으키는 회오리와 울음소리 속에 우리 선조들의 힘들었던 역사가 깃들어 있다.


태그:#울돌목, #명량, #이순신, #쇠사슬,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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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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