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판도라>의 한 장면.

영화 <판도라>의 한 장면. ⓒ NEW


재난 영화와 사회(반영)비판 영화 사이, 신파와 가족주의 사이, 그리고 현시성과 강요된 위로 사이의 간극들. 7일 개봉한 영화 <판도라>를 채우는 대부분의 요소들은 이 간극들 사이에서 결정된다. 그 시청각적 정보의 간극 사이에서 결정하는 건 언제나 그랬듯 관객 몫이다.

월촌리 주민들은 원자력 발전소 덕분에 먹고 살았다. 도시로 떠날 생각으로 가득 찬 재혁(김남길 분)과 그의 동료들도, 식당을 운영하는 재혁의 엄마 석여사(김영애 분)와 주민들도 수십 년간 마을을 지탱해 준 발전소 덕에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지진이 발생하면서, 발전소는 국가의 존폐를 위협하는 괴물로 돌변하기에 이른다.

평화로운 일상과 캐릭터들의 소묘, 그리고 원전을 감도는 불안한 기운. <판도라>는 전형적인 재난영화의 서두로 출발한다. 재혁의 활약에 집중하는 액션 영화가 아닌 탓에, 그리고 후반부 감정의 폭발을 도드라지게 하기 위해 석여사와 며느리 정혜(문정희 분), 재혁의 애인 연주(김주현 분), 전 발전소 소장 평섭(정진영 분)과 재혁의 동료 직원들의 캐릭터를 나열하며 시작한다. 초반부까지는 익숙하거나 장황한 느낌이다.

대신, 원전 폭발과 폭발 후 피해상과 지옥도와 같은 대피상은 최영환 촬영감독의 실감 나는 촬영과 5000평의 규모의 세트, 총 2419컷 중 1322컷에 쓰인 CG 분량에 힘입어 여타 한국 재난 블록버스터와 견주어 모자랄 것 없는 화면으로 구현됐다. 원전 사고 장면들은 분명 "우리(한국영화)도 이 정도는 그려낼 수 있다"는 노력의 부산물이라 할 만하지만 이야기의 개연성 면에선 아쉽다.

괴물이 된 원전, 국가와 국민을 공격하다

 영화 <판도라>의 한 장면.

영화 <판도라>의 한 장면. ⓒ NEW


원전 폭발 이후 <판도라>는 세 가지 기둥 줄거리를 교차시켜 나간다. 사고 후 재난 현장 주변에서 대기 할 수밖에 없는 피폭자 재혁과 동료들의 고뇌와 갈등, 피폭의 공포를 피하고자 월촌리를 탈출하는 석여사와 정혜, 연주와 주민들의 여정, 그리고 무능했던 대통령 석호(김명민 분)와 청와대의 실세 총리(이경영 분)와의 대립과 원전 마피아의 부패상이 136분의 상영 시간 내내 펼쳐진다. 

주요 플롯의 효과는 비교적 명확하다. 재혁과 동료들은 후반부 펼쳐질 액션과 감동 코드를 준비하기 위한 피해자-영웅의 서사를 담당하고, 석여사를 비롯한 여성들은 피폭의 공포를 생생하게 체험하는 '국민'들의 위치에서 가족주의-신파 부분을 책임진다. 꼭두각시 대통령과 이에 맞서는 권력자 총리의 대립과 정치적 해결은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관피아, 원전 마피아라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반영코자 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래서 <판도라>가 기존 재난 블록버스터를 답습하는 동시에 생경한 개성을 발휘하는 대목은 중후반부에 집중된다. 부산역으로 몰려드는 대규모 인파를 잡아낸 몹신은 심지어 장르영화의 결을 확실히 한 <부산행>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공포를 전해 준다. 세월호 참사 이후 언론을 통해 지적됐던 원전 마피아의 부패상과 노후하고 낙후한 원전 가동 시스템,  전문가들이 경고한 원전 피해의 참상을 생생하게 대리 체험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 공포의 한 복판에 석여사와 정혜, 연주, 그리고 재혁의 조카를 위치시킨 것은 전쟁이나 재난 시 여성과 노인, 아이가 위험에 먼저 노출되고 내몰리는 실제 현실을 그대로 적용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판도라>는 다큐가 아니다. 이들이 처한 위험과 공포는 초반부터 준비됐던 가족애로 봉합된다. 이런 설정은 관객으로 하여금 감정적으로 눈물을 흘리게 한다. <판도라>의 신파 전략이 도드라지는 지점이다.

다소 의아한 점은 대통령의 존재감이다. 중반 이후, 대통령은 총리와 대립을 끝내고 국민들을 위해 올바른 선택을 하고자, 피폭의 피해를 최소화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다. 그러나 개연성이 수반되지 않은 대통령의 각성은 중반 이후 주요한 감정인 '공포감+가족애'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진 못한다.

현실의 피로감 vs. 영화적인 분노와 위로

 영화 <판도라>의 한 장면.

영화 <판도라>의 한 장면. ⓒ NEW


올 여름, 1900만에 가까운 관객들이 <부산행>과 <터널>을 '체험'했다. 좀비 장르를 경유한 재난 액션영화와 역시 재난 장르영화를 본 관객들은 자의든 타의든 끊임없이 세월호 참사 이후 '헬조선'이라 일컬어지는 한국사회의 현재를 환유해야 했다.

꼭 재난 장르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내부자들>나 <아수라>가 대표적이다. 권력을 쥔 '한국남자'들이 망쳐 놓은 한국사회의 난맥상을 장르적으로 환기시키는 작품들이 박근혜 정권 들어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판도라>는 이 두 장르가 주는 익숙함과 장점들을 동시에 가져가고자 노력한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재난영화의 기본 틀에 사회 비판적인 요소가 유기적으로 접목됐느냐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과한 공포감과 현시성에 비해, 인물들의 변화나 사건의 개연성은 쉬이 봉합된다.

이러한 빈틈을 채우는 것은 기시감을 일으키는 대사들이다. "매뉴얼이요? 그런 거 없습니다"라거나 "구조 작업이 수월하게 진행 중입니다"라는 '관피아'들의 대사들은 분명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만들 수밖에 없다. 그 대척점에 재혁과 동료들의 대사가 자리한다. 이와 함께,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우리 가족들이 다 죽는 겁니다"라거나 "사고는 지들이 쳐놓고 왜 국민들보고 수습하라고 해! 미친 것들"이란 대사는 그 의도와 효과가 너무나 투명하다.

이를 잘 아는 박정우 감독은 재난 현장을 통해 이를 생생하게 전시하는 한편 거기서 느껴지는 울분을 직접적 대사들과 클로즈업, 비극적인 음악들로 표현한다. 적어도 한국 관객에겐 이런 장치가 눈물을 흘릴 게 하는 당위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더욱이, '세월호 7시간'이 전 국민적인 관심사로 떠오른 지금, <판도라>가 전하는 감정이 국민적 공분으로 연결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영화적인 판타지 혹은 위로라는 이름의 포장으로.

난세에 영웅이 탄생하고, 재난 시 영웅적인 희생은 신격화되기 마련이다. <판도라>도 한국 사회가 주는 생생한 공포감을 영화적으로 번안한 뒤, 그러한 대통령과 영웅들을 소환한다. 이러한 박정우 감독의 연출 의도가 진심어린 위로가 될지, 빤한 감상적 자위에 그칠지는 우리 관객들이 얼마나 현실에서 피로감을 극복했느냐에 달려 있을 것 같다.

<판도라>의 개봉일이던 7일, 삼척과 영덕의 신규 핵발전소 건설과 관련해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건설을 찬성하는 여론을 생성하고 지역 언론을 설득하는 작업을 진두지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판도라>나 현실이나 그리 다를 바 없다. 과연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가 영화의 흥행을 도울지, 현실의 피로감이 영화의 발목을 잡을지 꽤나 흥미진진한 술래잡기가 아닐 수 없어 보인다.

 영화 <판도라>의 한 장면.

영화 <판도라>의 한 장면. ⓒ NEW



판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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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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