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탈출> 시리즈는 오리지널 5편, 리메이크 1편, 리부트 3편씩이나 나온 대서사로 SF 영화 팬이라면 건너뛸 수 없는 작품이다. 무려 반세기 전 오리지널 1편이 개봉한 1968년부터 내년 7월 개봉할 리부트 3편까지 영화는 유인원들이 인간을 넘어서는 '질서의 전복'이라는 독특한 세계관을 공유한다. 특히 1968년은 서양인들에게 각별한 해다.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전) 중이었던 미국에서 반전 시위가, 서유럽에서 베트남 참전을 반대하는 68혁명이 일어날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반전 의식을 숨기지 않는다. 주인공은 지구를 떠난 지 6개월 된 그러나 지구 시간으로 이미 700년 지난 탐사선의 선장 테일러다. 그는 지구로 귀환하며 동면에 들기 전 음성 기록을 남긴다.

그는 자신을 우주로 보낸 사람들은 이미 죽었을 테니 새로 만날 인류는 더 나은 종이길 바란다며 광활한 우주 앞에서 인간의 무의미함을 알게 됐다고 고백한다. 이어서 "위대한 인간이란 작자들은 지금도 전쟁을 일으켜 무고한 인명을 빼앗고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진 뒤 동면에 들지만, 우주선은 정체불명의 행성 사막 한가운데 있는 호수에 불시착한다.

 서양인들에게 '깃발'은 '정복'의 상징이다.

서양인들에게 '깃발'은 '정복'의 상징이다. ⓒ 20세기 폭스


동면에서 깨어난 테일러와 동료들(닷지, 랜던)은 자신들이 지구를 떠난 지 2000년이나 지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이 차는 우주선에서 구명 보트로 간신히 탈출한 뒤 랜던이 이곳이 어디냐고 채근하자 테일러는 달관한 듯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시간이야. 시간은 우리의 지식을 쓰레기로 만들었어"라고 답한다. 그러나 랜던은 습관처럼 성조기를 땅에 심는다.

'깃발'은 세계사 특히 서양인들에게는 '정복'의 상징이다. 대항해와 제국주의 시대에 서양인들은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침략 시 육지에 상륙하면 깃발부터 꼽았다. 이제부터 이 땅은 자신들의 소유라는 선언이다.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낯선 타자를(자연) 지배하려는 끝없는 정복욕 혹은 대결 의식은 고대 프로메테우스 신화까지도 거슬러 올라가는 인류의 심층 심리 중 하나다(관련 기사: 에일리언 시리즈에 담긴 인간의 본성).

테일러는 랜던이 탐사에 지원한 이유는 명예와 영생(후대에 이름이 남는 일) 때문인데, 이제 엄청난 나이를 먹었고 그 꿈을 이뤘지만 결과가 어떠냐고 비웃는다. 그들이 착륙한 곳은 생명이 살지 못 하는 황량한 사막. 타자를 통제하려 들어왔던 서양인들의 역사적 과오, 더러운 전쟁(dirty war)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는 베트남전의 결과와 어울리는 배경이다.

그곳에는 생명이 뿌리내리지 못 한다. 이면에 제국주의와 패권주의가 있었던 세계 1, 2차 대전을 겪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한국전쟁,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베트남전, 걸프전 등을 벌인 인간의 낙관적 확증 편향을 영화는 시의 적절히 비웃는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처럼(관련 기사: War must go on), 중요한 것은 장소보다 시간이다. 사태의 결과를 탁월하게 예측해낼 것 같은 지금의 지식도 시간이 흐르면 보잘 것 없어진다.

<혹성탈출>은 1968년 버전의 미러링

 식민지 지배자들을 연상시키는 유인원들의 사진 촬영 씬.jpg

식민지 지배자들을 연상시키는 유인원들의 사진 촬영 씬.jpg ⓒ 20세기 폭스


20세기를 떠나보낸 테일러 일행은 식량을 찾아 사막의 산들을 가로질러 마침내 식물이 자라고 원시인들이 무리 생활하는 것을 발견하지만 놀랍게도 이곳은 유인원이 인간을 지배하는 행성. 유인원은 인간을 냄새나고 작물이나 훔쳐먹는 성가시고 미개한 존재로 여긴다. 말 못 하는 하등 동물인 인간은 권리도 인정되지 않으며 죽이거나 동물 실험, 박제에만 쓸모가 있다는 것.

인간이 유인원을 지배한다는 통념적 질서를 전복하는 이러한 기발한 발상은 무엇을 의미할까. 많은 관객들이 이러한 설정이 인간과 유인원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고 생태주의적 메시지를 전하는 것쯤으로 본다. 틀린 해석은 아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영화의 메시지 수신자는 '인간'이고 영화 속 유인원들 역시 영어를 쓴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근본적으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1차적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혹성탈출>의 원작인 프랑스 작가 피에르 불의 <유인원들의 행성>은 2차대전 당시 백인 군인들이 수감되고 일본군이 지배하는 포로수용소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작품이다. 또한 백인들은 황인들을 비하할 때 '옐로우 몽키(yellow monkey)'라는 말을 쓴다. 주인공 테일러 역의 찰턴 헤스턴도 한때 마틴 루터 킹과 민권 운동에 참여하며 유색인종 차별에 반대했다.

유인원들이 인간을 사냥한 뒤 기념 촬영을 하는 장면은 과거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 원주민들을 학살, 노예로 삼은 뒤 저지른 그것을 재현해낸다. 그렇다. 이것은 너네도 한 번 입장 바꿔 당해보라는 감각, 인종차별을 꼬집는 것 요즘 말로는 1968년판 '미러링'이다. 베트남전은 미국 정부 입장에서나 자유 진영 수호이지 베트남인들 입장에서는 제국주의의 연장이었다. 미국의 패색이 드리우고 반전 운동이 격해지던 시대에 <혹성탈출>은 정확히 부응했다.

근대 시기에 서양인들은 이성중심적 사고와 질서를 삶의 기준이라 믿는 기질이 다분했다. 그게 지나쳐 자신들의 논리로는 납득할 수 없는 타자를 미계몽된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는 편견이 켜켜이 쌓여갔고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의 근거로 악용했다. 하지만 훗날 사회인류학 연구들은 유색인종도 나름의 논리 체계와 세계관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특별히 서양인들보다 못난 게 아니라 다를 뿐이라는 점도. 이를 미리미리 깨닫지 못 한 탓에 이성은 이념을 넘어 우생학과 전쟁 무기 영역까지 폭주했고 서양인끼리도 1, 2차 대전을 겪으며 막대한 희생을 낳았다. 그러고도 몇 차례 국지전을 또 치렀으니 전쟁과 이성중심 사고에 이골이 난 서양인들은 겪어보니 X같더라는 것을 느꼈는지 서유럽에서는 68혁명이, 미국에서는 반전 운동이 흥했고 이 시기를 전후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상적 조류도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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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에서도 기념비적인 반전 장면.jpg ⓒ 20세기 폭스


그 성격은 한 마디로 종잡기는 어렵지만 이성, 주류, 권위, 규칙, 백인, 남성 등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이 배제시켰던 감성, 비주류, 탈권위, 다양성, 유색인종, 여성 등의 중요성을 재조명하는 시도들이었다. 세상 살이에는 확실한 기준(중심)이란 없으며 정해진 답보다는 어떠한 문제에 관해 다양한 담론이 공존하고 또 그때그때 설득력 있는 것을 선택하도록 존중하자는 취지였다. <혹성탈출>은 이런 진실을 늦게 안 자(에피메테우스)가 쓰는 반성문이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시간이다. 인간은 알량한 지식과 기술을 맹신하고 자신들의 영항력을 넓히려 들지만 모든 결과를 결코 완벽히 예측도 통제할 수도 없으며 시간이 흘러 이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파국을 맞은 뒤인 것이다. 동료들은 모두 죽고 유인원들의 사회로 잡혀간 테일러는 간신히 자신이 언어를 사용할 수 있음을 알리고 동물과학자 지라와 코넬리우스 부부는 테일러를 존중하면서 그가 고등 동물이라는 것을 청문회에서 어필한다.

하지만 인간을 두려워하며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과학부 장관 자리우스는 테일러를 거세하고 뇌 절제 수술을 시키려 한다. 테일러는 지라와 코넬리우스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하고 자리우스는 병력을 이끌고 뒤쫓아온다. 꾀를 내 자리우스를 인질로 삼는데 성공한 테일러는 말과 식량을 요구하며 인류와 유인원의 비밀을 간직한 금지 구역으로 떠난다.

그런 테일러에게 자리우스는 "인간은 탐욕에 눈이 멀어 유희로 신의 창조물을 죽이고, 땅을 차지하기 위해 형제를 살해하는 존재"라며 "원하는 걸 찾으면 실망하게 될 거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마침내 해안선 끝에서 테일러는 '자유의여신상'을 발견하고 이 행성이 지구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고는 지구를 핵으로 날려 죽음의 땅으로 만든 "미치광이" 인류를 저주하고 울부짖으며 영화는 끝난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시간이다.

영화를 애매하게 만든 아쉬운 점

 테일러는 자신과 합방한 원주민 여성에게 '노바'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테일러는 자신과 합방한 원주민 여성에게 '노바'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 20세기 폭스


이처럼 <혹성탈출> 오리지널 1편은 시대적 요구와 공명한 작품으로 영화사에 길이 남고 있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은 미국보다는 유럽 특히 68혁명의 진원지인 프랑스에서 태동한 사상적 조류이므로 감독이 이를 미리 알았으리라 장담은 어렵다. 다만 미국 역시 68혁명과 반전 시위의 탈중심적 성격을 많이 수용했기에 이런 분위기에서 자유롭기는 어렵고, 테일러 역을 맡은 찰턴 헤스턴이 정치적으로 리버테리안(자유지상주의자)이라는 점에서 미국인 나름의 색깔을 녹여낸 작품이 탄생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이 영화도 아쉬운 점은 있다.

특히 애매한 부분은 여성의 역할이다. 유인원들에게 테일러와 함께 잡혀온 인간 중에는 노바라는 이름의(테일러가 지어줬다) 원시인이 있었다. 지라 박사는 마치 신이 아담에게 이브를 선물하듯 노바를 테일러의 감방으로 합방시켰고, 영화 내내 노바는 테일러를 쫓아다니지만 어떠한 능동적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다. 의사표현도 할 수 없고 백치 콘셉트로 소유물처럼 테일러 옆에 붙어있을 뿐이다. 이러한 설정으로 영화가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인종차별 및 전쟁 반대의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여성차별은 극복 못 한 시대적 한계가 드러난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자신들의 시대가 갖는 모순을 전시한 것인지. 딱 부러지게 정의하기 어렵다. 여주 리플리를 앞세워 다양한 페미니즘적 해석을 낳은 비슷한 시기의 영화 <에일리언> 시리즈와는 다르다. 그래서 애매하고 아쉽다. 그저 좋은 쪽으로 관대한 해석을 해볼 뿐. 그렇다면 반대로 포스트모던한 세계관이 주도하는 세상은 살기 좋은 세상일까.

<혹성탈출> 오리지널 2편(1970)을 다음 연재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혹성탈출 베트남전 68혁명 포스트모더니즘 에일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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