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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동아시아 사람들은 국가권력이 실제로 작동한 시점이 아니라 국가의 기본이념이 생긴 시점에 나라가 세워졌다고 생각했다.
지난 5일, 교육부는 국정교과서의 건국절 문제를 역사학계에 맡기겠다고 밝혔다.

우리나라 헌법 전문의 첫 문장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한다. 이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법적 정통성은 1919년 3·1운동으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있다. 이 임시정부의 수립이 대한민국의 출발점이 된다.

이에 의거해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당시의 정부 관료들도 1948년 8월 15일의 행사를 '대한민국 건국'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행사로 명명했다. 대한민국은 1919년부터 시작됐으므로, 1948년에 할 수 있는 일은 그 대한민국의 정부를 수립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은 헌법 전문을 무시하고, 1948년을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인정하는 국정교과서를 내놓았다.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일본 식민통치에 맞선 3·1운동과 임시정부를 부정한다는 것은 박근혜 정권이 일본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인정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국정교과서 현장검토본에 나타난 ‘대한민국 수립’이란 표현(맨 위). 형광펜 표시는 인터넷에 공개된 현장검토본에 있었던 것이다.
 국정교과서 현장검토본에 나타난 ‘대한민국 수립’이란 표현(맨 위). 형광펜 표시는 인터넷에 공개된 현장검토본에 있었던 것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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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고조부에서 왕조의 정통성 찾은 세종

교육부는 이 문제를 역사학계의 토론에 맡기겠다고 했다. 학계의 토론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학계에 맡기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서울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그는 이 문제에 관해 명확한 답을 줄 수 있는 인물이다.

세종은 집권 29주년인 1447년에 그 유명한 <용비어천가>를 편찬했다. 이 책은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처럼 조선왕조의 법적 정통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첫 구절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하다.

"해동 육룡이 나라샤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해동 육룡은 세종 이전의 여섯 왕을 상징한다. 그런데 세종은 태조·정종·태종에 이어 제4대 주상이다. 그리고 제3대 주상이자 큰아버지인 정종은 찬밥 신세였다. 그래서 세종이 말한 육룡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종의 전임자 중에서 육룡에 포함된 사람은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와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 둘뿐이다.

나머지 넷은 누구인가? 그들은 목조·익조·도조·환조다. 이성계의 고조부·증조부·조부·부가 바로 그들이다. 세종은 <용비어천가>를 편찬하면서, 목조·익조·도조·환조를 조선왕조 정통성의 시작으로 보았다. 조선왕조가 태조 이성계 때부터가 아니라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 때부터 시작됐다고 본 것이다.

4대조 때부터 이성계 집안은 한반도 동북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래서 조선 왕실은 그 4대조 때부터 자신들의 정통성이 시작됐다고 보고,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4대조를 왕으로 추존했다. 그래서 목조·익조·도조·환조라는 칭호가 나온 것이다. 이것이 조선왕조의 역사관을 형성했다.

이성계가 주상이 된 해는 1392년이다. 이안사가 죽은 해는 1274년이다. 세종이 이안사를 왕조의 시작으로 본 것은 이안사 때부터 조선의 국가권력이 작동했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다. 1392년 이전에는 조선의 국가권력이 작동되지 않았음을 세종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안사를 왕조의 시작으로 본 것은 나라의 정통성이 거기서 기원한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서울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서울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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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왕조의 역사관

조선왕조만 이런 식의 역사관을 가진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의 다른 왕조들도 그랬다. 왕조가 지배권력을 행사하기 전부터 국가의 정통성이 이미 시작된다고 보는 관념은 다른 왕조들에도 있었다. 일례로, 고려 중기에 해당하는 12세기부터 13세기까지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여진족 금나라를 들 수 있다. 이 나라의 왕들도 조선 세종과 똑같은 역사관을 견지했다. 

금나라를 세운 사람은 태조 아골타(재위 1114~1123년)다. 금나라의 국가권력은 아골타 때부터 작동됐다. 그런데 금나라는 자국의 정통성이 아골타의 7대조 때부터 시작됐다는 역사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금나라는 아골타의 7대조에게 시조(始祖)라는 묘호를 부여하고 그를 황제로 인정했다. 묘호는 왕실 사당인 종묘에 위패를 모실 때 붙이는 칭호다. 이렇게, 금나라는 자국의 국가권력은 태조 아골타 때부터 시작됐지만 정통성은 시조황제 때부터 시작됐다는 역사관을 갖고 있었다.

몽골족 원나라도 이런 태도를 존중했다. 원나라는 금나라의 역사서인 <금사>를 편찬할 때 금나라 역사가 시조황제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서술했다. 중국 땅을 정복한 왕조들은 이전 왕조의 역사서를 자신들이 편찬했다. 몽골족이 금나라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몽골족 원나라가 <금사>를 편찬한 것이다.

<금사>에 따르면, 금나라의 시조황제는 신라에서 이주해간 김함보다.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통일하는 과도기에 고려왕조의 지배를 거부하고 말갈족 땅으로 망명한 김함보 때부터 금나라 역사가 시작됐다고 <금사>에 못 박혀 있다.

김함보는 고려 왕건을 반대했지만, 그의 아버지인 김행은 왕건에게 적극 협력했다. 경북 안동을 지역 기반으로 갖고 있던 김행은 왕건의 통일 전쟁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래서 왕건은 답례로 권씨 성을 하사했다. 이 때문에 김행은 권행이 되었다. 이것이 안동 권씨의 시작이다.

김함보는 그런 집안을 버리고 말갈족 땅으로 갔다. 한민족과 함께 발해를 구성했던 말갈족은 발해 멸망 뒤에 한동안 정치적 공백 상태에 빠졌다. 이 틈을 타서 김함보는 말갈족 사회에서 지도력을 획득하고 이 사회를 새롭게 재편했다. 이렇게 김함보에 의해 새롭게 재편된 뒤부터 말갈족은 여진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금나라가 자국의 정통성을 김함보에게 두는 것은, 그의 업적에 힘입어 금나라가 세워졌다는 역사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청나라 정부가 편찬한 만주 역사서인 <만주원류고>에서는, 금나라라는 명칭이 김함보의 성씨였던 금(金)에서 유래했다고 밝혔다.

김함보는 서기 10세기 사람이다. 태조 아골타에 의해 금나라의 국가권력이 실제로 가동된 것은 12세기부터다. 그런데도 금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김함보 때부터 시작된다는 역사관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김함보에 의해 여진족 국가의 기초가 형성됐다는 역사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1948년 8월 15일의 대한민국 정부수립 행사. 광화문광장 동북쪽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1948년 8월 15일의 대한민국 정부수립 행사. 광화문광장 동북쪽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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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기본이념이 생긴 시점'에 나라가 세워졌다고 해석

1948년 8월 15일부터 대한민국의 국가권력이 실제로 작동됐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헌법 전문에서 대한민국의 시작을 3·1운동과 임시정부로 보는 것은, 그 정신에 입각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작동된다는 기본 원칙을 선언하기 위해서다.

1919년에 폭발한 자주독립운동의 기억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국가적 의지를 그렇게 표출한 것이다. 이런 것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1948년 당시의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이 48년 8월 15일의 행사를 대한민국 건국이 아닌 대한민국 정부 수립 행사로 치렀던 것이다.

이번에 국정교과서를 집필한 필진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건국됐다는 식으로 교과서를 기술한 데는 정치적 속뜻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해방 직후에 김구를 위시한 임시정부 세력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구성을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그러다가 김구 암살 사건과 함께 이 세력은 무너졌다. 그래서 임시정부와 김구는 통일을 훼방하는 세력의 적이 되었다.

박근혜 정권은 임시정부와 김구의 편이 아니라, 그 반대편에 서 있다.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한 임시정부와 김구의 반대편에 섰다는 것은, 박근혜 정권이 말로는 통일 대박을 외쳤지만 실제로는 통일을 꺼렸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이 헌법 전문을 무시하면서까지, 다시 말해 국정농단이 아니라 헌법농단까지 하면서 1919년을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는 그런 속뜻이 담겨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통일을 향한 국민적 공감대가 견고해지는 게 싫은 것이다.

그런 의도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이란 표현이 국정교과서에 나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교육부는 이 문제를 학계 토론에 맡기겠다고 밝혔다. 학계는 의견 통일을 하고 토론을 종결하는 곳이 아니라, 저마다 각자의 의견을 내놓고 계속해서 토론을 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학계 토론에 맡기겠다는 것은 이대로 쭉 밀고 나가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문제의 해법은 간단하다. 광화문광장의 세종을 포함해서 과거 동아시아 사람들이 갖고 있던 역사관을 생각해보면 쉽게 풀린다. 국가권력이 실제로 작동한 시점이 아니라 국가의 기본이념이 생긴 시점에 나라가 세워졌다고 해석함으로써, 특정한 정체성을 부여해 국가를 이끌어가고자 했던 옛사람들의 지혜를 음미해보면 쉽게 풀릴 수 있는 문제다. 


태그:#국정교과서, #건국절, #임시정부, #김구,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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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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