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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한국사> 국정교과서 현장검토본
 고등학교 <한국사> 국정교과서 현장검토본
ⓒ 교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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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밝혀둘 게 있다. 한국사 국정교과서는 '내용'이 아니라 '체제'의 문제다. 내용이 괜찮다고 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주지하다시피, 우리가 국정교과서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정부의 입맛대로 획일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 때문이다. 단언하건대, 이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명백한 퇴행이자 폭력이다.

그럼에도 굳이 그 많은 분량을 모두 출력해서 꼼꼼하게 살펴본 건, 한국사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당위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적어도 아이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제대로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밑줄 그어 가며 읽다 보니 꼬박 이틀이나 걸렸다. 이를 지켜보던 한 동료교사는 머지않아 폐기될 교과서인데 왜 시험 공부 하듯 파느냐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오류나 편향된 부분을 부러 찾아 지적하려는 건 아니다. 그런 거라면 이미 여러 시민단체나 언론 등에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쏟고 있고, 수많은 문제점이 백일하에 드러난 상태다. 그보다는 정부가 중요한 국정과제라며 밀어붙인 이 책이야말로 우리 사회 기득권 세력의 역사에 대한 천박하고 기회주의적인 인식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글은 현직 한국사 교사로서, 국정교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한 후 '사심 없이' 쓴 독후감이다. 어차피 정부가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느닷없이 벌인 사업이다 보니 애초 독선적이고 편향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은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겠다. 차마 '국정교과서'로 쓰지 못하고, 구차하게 '올바른 교과서'라고 명명한 것만 봐도 정당성이 없다는 걸 스스로 드러낸 셈이니 말이다.

독재 미화, 정통성 부정 '참 나쁜 교과서'

약490여개 사회시민단체로 구성된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관계자들이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앞에서 '국정교과서 현장 검토본 공개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에 공개된 국정 역사교과서는 '박근혜에 의한 박정희를 위한 효도 교과서'"라고 비판하고 있다.
 약490여개 사회시민단체로 구성된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관계자들이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앞에서 '국정교과서 현장 검토본 공개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에 공개된 국정 역사교과서는 '박근혜에 의한 박정희를 위한 효도 교과서'"라고 비판하고 있다.
ⓒ 최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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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박근혜 대통령의 '가족사 교과서'가 되리라는 걸 예상 못 한 이는 없다. 오죽하면 정부 발표 때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한정판 교과서'라는 조롱이 쏟아졌겠는가. 그런 탓에 대부분 찬양 일색인 박정희 관련 내용이 무려 10쪽이나 된다는 것도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전체 분량이 315쪽이니, 대략 1/30을 오로지 박정희에 할애한 셈이다.

가장 큰 논쟁거리였던 '대한민국 수립' 부분도 그랬다. 기존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용어를 폄훼하기 위해 논리에 맞지 않는 억지 주장까지 내놓는 걸 보면 측은하기까지 하다. '올바른 교과서'임을 강조하기 위해 인터넷에 교과서 검토본과 함께 별도의 'Q&A' 자료까지 탑재해 놓았는데, 역사 인식에 관한 문제인데도 애먼 교육과정까지 끌어다 장황한 해명을 내놓고 있다.

'대한민국 수립'으로 표현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대한민국의 긍지를 일깨워주고자 한다는 설명은 쓴웃음을 짓게 한다.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고 서술하여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했다는 해석까지 덧붙였다. 국가 대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이유로 기존의 모든 책들은 졸지에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한 '참 나쁜 교과서'로 전락해버렸다.

또, 기존의 검인정 교과서가 경제 성장 과정에서 나타난 부작용을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비판에서는 정부가 재벌의 이해를 대변하는 듯한 인상마저 준다. 최근 '박근혜 게이트'를 통해 드러났듯 불법적 정경유착의 관행이 여전하고, 어느덧 우리 경제의 짐이 돼버린 그들을 '균형적 시각' 운운하며 짐짓 두둔하려는 건 시대착오적인 행태다. 하물며 미래세대 아이들에게 가르칠 교과서다.

'통일 대박'이라더니, 기-승-전-북한 책임?

이러한 시도들은 삼척동자라도 다 예측한 바라서 어처구니없고 황당할지언정 솔직히 이해할 수는 있다. 오히려 국정교과서 강행 의도를 'Q&A' 자료에 있는 그대로 아이들에게 소개하며 토론수업을 진행해본다면 올바른 역사의식을 기르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있다. 아이들이 박정희에 대한 더 많은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고, 그동안 찬밥 신세였던 현대사를 더욱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진짜 충격적인 것은 북한에 대한 맹목적인 폄훼다. 검인정 교과서의 내용에 견줘 보면, 북한에 관한 내용은 사료에 입각한 사실일지라도 무조건 간략하고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장래 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상대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함에도 마치 다시는 보지 않을 원수처럼 표현하고 있다. '통일 대박'이라는 대통령의 말이 무색해질 지경이다. 차라리 '저주'라고 해야 옳을 만큼 편파적이다.

하긴 애초 정부는 금성교과서 등 기존의 검인정 교과서들을 뭉뚱그려 '친북 교과서'로 낙인찍었으니, 이 또한 예상 못 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도가 지나치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인데도, 해방 후 분단에서 냉전 시기에 겪었던 우리 현대사의 모든 문제의 책임을 북한에 돌리고 있다. 현대사 서술의 상당 부분이 '기-승-전-북한의 책임'처럼 느껴질 정도다.

교육부가 공개한 '올바른 국정교과서'의 내용 발췌. 1948년 유엔 총회의 결의안에 적시된 '선거가 가능했던 한반도 내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표현마저 문제 삼으며, '한반도(코리아)에서 수립된 유일한 합법 정부'로 고쳐 적었다.
 교육부가 공개한 '올바른 국정교과서'의 내용 발췌. 1948년 유엔 총회의 결의안에 적시된 '선거가 가능했던 한반도 내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표현마저 문제 삼으며, '한반도(코리아)에서 수립된 유일한 합법 정부'로 고쳐 적었다.
ⓒ 교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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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가 빈약하니 서술도 조잡하다. 1948년 유엔 총회의 결의안에 적시된 '선거가 가능했던 한반도 내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표현마저 문제 삼으며, '한반도(코리아)에서 수립된 유일한 합법 정부'로 고쳐 적었다. 당시 결의안의 내용이 합법 정부의 범위를 남한으로 한정하고 있어서라는 이유에서다. 사료의 내용을 '편집'해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심산일까. 굳이 괄호를 사용해 '코리아'라는 말을 덧붙인 모양새가 초라해 보인다.

북한의 핵 개발과 군사적 도발 상황 등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대목도 눈에 띈다.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이후 핵 개발 과정과 끊임없는 대남 군사 도발 상황을 한쪽 넘게 자세히 다뤘는데, 기존의 검인정 교과서와 비교하면 열 배도 넘는 분량이다. 물론, 결론은 어떠한 내용이건 한결같다. 북한이 남북 간 교류 협력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문장으로 단원이 마무리된다. 나아가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문제에 관한 한 우리의 잘못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교육부가 공개한 '올바른 국정교과서'의 내용 발췌. 북한의 핵 개발과 군사적 도발 상황 등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대목도 눈에 띈다.
 교육부가 공개한 '올바른 국정교과서'의 내용 발췌. 북한의 핵 개발과 군사적 도발 상황 등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대목도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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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인권 문제를 다룬 부분에서도 성찰을 찾아볼 수 없다. 수만 명의 북한 주민들이 탈북을 감행할 정도로 인권 상황이 심각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우리 정부가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기존의 검인정 교과서의 관련 내용이 소략하다는 걸 염두에 둔 듯한데, 북한의 집권세력을 향해 반인륜적 정권이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북한이 3대가 권력을 세습하고 있는 전근대적 국가라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다만 그들의 왜곡된 모습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교육이고, 그런 걸 담고 있어야 올바른 교과서라 할 것이다. 만약 그들이 얼마 전 개봉해 화제가 된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을 본다면, '너나 잘하세요'라며 비웃지 않을까. 그것이 '제 눈의 들보는 못 보고 남의 눈의 티끌만 탓하는' 꼴일지라도 말이다.

기존의 검인정 교과서가 북한의 체제 선전용 자료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했다며 보완한 대목도 황당하긴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주체사상'의 사전적 의미를 그대로 옮기지 말고, 북한 사회에 끼친 악영향을 강조하라는 의미다. 실제로 해방 직후 무상몰수 무상배분 원칙에 입각해 실시된 북한의 토지개혁도 폐해를 부각하는 식으로 서술되었다. 김일성 우상화에 대한 국정교과서 내용을 잠시 읽어보자.

'김일성 우상화는 단순한 지도자 개인의 권력 극대화를 넘어 김일성이 수령으로서 북한 사회 모든 영역에 걸쳐 절대적인 영향과 권위를 미쳤고, 북한 주민들의 자유를 억압해왔다.'

위 서술에서 '김일성'을 '박정희'로, '수령'을 '대통령'으로, '북한'을 '남한'으로 바꿔 대입해보면 어떤가. 그다지 어색하거나 이상하다는 느낌이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볼 때 정확하게 부합하는 완결된 문장이다. 서로 욕하면서 닮아간다고 했던가. 같은 시대 분단된 땅의 두 절대 권력자는 이처럼 서로를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인데, 대체 누가 누구를 탓하나.

친일파가 반공 투사로... 단언컨대, 반북 교과서

교육부가 공개한 '올바른 국정교과서'의 내용 발췌. 6.25 전쟁의 책임을 묻는 부분에서도 남한은 마치 남의 일인 듯 빠져있다.
 교육부가 공개한 '올바른 국정교과서'의 내용 발췌. 6.25 전쟁의 책임을 묻는 부분에서도 남한은 마치 남의 일인 듯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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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의 책임을 묻는 부분에서도 남한은 마치 남의 일인 듯 빠져있다. 오로지 북한의 불법 남침에 의한 피해자라는 내용뿐이다. 북한이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시작된 전쟁이라는 건 모르는 이 없지만, 모름지기 역사 교과서라면 그것만을 기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과 관계가 설명되지 않은 전쟁사는 여느 스포츠 중계와 하등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보다 일어난 배경과 원인, 그리고 전쟁이 남긴 상흔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유사 이래 전쟁의 책임을 일방에게 지우는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6.25 전쟁이라고 다를까. 곧, 북한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 해서, 남한이 면책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국정교과서에는 이러한 '만고불변의 진리'를 찾아볼 수 없다. 교과서 내용대로라면 북한은 '호전광'이며, 차라리 '악마'다.

특히 6.25 전쟁은 수많은 친일파들을 반공 투사로 둔갑시켜 장차 대한민국의 주류 기득권 세력이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주지하다시피 그들은 전쟁 이후 정계와 군, 경찰의 핵심 요직을 독식하다시피 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이 '친일파들의 해방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은 것이 우리 국민의 가치관이 전도된 근본적인 원인일진데, 이와 관련된 서술이 아예 없는 건 국정교과서를 강행하려는 이들의 속내를 짐작하게 한다.

단언컨대, 국정교과서는 '반북 교과서'다. '북핵'과 '안보 위기'로 국민을 겁박하지 않으면 단 하루도 연명하지 못하는 정부가 전가의 보도마냥 '색깔론'으로 덧칠해놓은 저질 교과서다. 나아가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을 '종북 세력'으로 낙인찍기 수월하도록 만든 악의적인 교과서다. 아무런 생각 없이 반복해 읽다 보면, 어느새 북한은 언젠가 다시 만날 형제가 아니라, '쳐부숴야 할 원수이자 암 덩어리'로 여기게 될 것이다.

사족 하나 덧붙이자. 지금 정부가 우려하는 대로 북한에 정통성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 중에는 없다. 설령 있다 한들, 수십 년 전의 낡은 인식 틀에서 헤어나지 못한 극소수일 뿐이다. 남과 북 사이에 경제력과 체제 경쟁이 이미 오래전에 끝난 마당에, 너그러이 포용하지는 못할망정 교과서 내용을 두고 정통성 시비를 거는 건 치졸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국정교과서는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스러져야 할 대표적인 '순장조'다. 더 늦기 전에 반민주적이고, 통일을 저해하는 한국사 국정교과서를 당장 폐기해야 옳다.


태그:#국정교과서, #박근혜, #한국사, #교육부, #반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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