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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의 고도'라 불리는 일본 교토에 우리나라 유물 1700여 점을 모은 미술관이 있다. 그곳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1500년이 넘은 역사가 담긴 예술품인 도자기류·불교조각·회화·금속공예품 등이 전시돼 있다. 바로 '고려미술관'이다.

1988년에 세워진 이 미술관의 초대 이사장은 재일교포 고(故) 정조문씨다. 지난해 초, 그의 일대기와 고려미술관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정조문의 항아리>를 만든 최선일(50) 프로듀서를 지난달 21일 인천국제공항에서 만났다. 불교미술사학자인 최 피디는 현재 인천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남도 북도 내 조국이고 고향이다

일본 교토에 있는 고려미술관 입구.<사진제공·최재용>
 일본 교토에 있는 고려미술관 입구.<사진제공·최재용>
ⓒ 최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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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미술관을 처음 방문한 게 2001년입니다. 불상 연구자라 그곳에 '목조아미타삼존불감'이 있다는 걸 알고 실견(實見)하러 간 거죠. 그게 인연이 됐습니다. 교토라는 지역은 굉장히 보수적인 곳이에요. 천왕이 살았다는 자부심이 강하고, 인맥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곳이거든요. 재일조선인이 그런 곳에 미술관을 만든다는 것은 사실 가능하지 않아요. 그걸 가능하게 한 건 정조문 선생의 인품과 열정에 감동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토대학교 교수이자 전 고려미술관 관장인 우에다 마사아끼씨와 소설가 시바 료타로씨 등이 그들이다. 시바 료타로씨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0년에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구명운동에 나선 사람이기도 하다.

최종 학력이 초등학교 3년을 다닌 게 다이고, 파친코 가게를 개업해 돈을 벌었다는 정조문 선생의 이력이 궁금했다.

1918년 경상북도 예천군 우망리에서 태어난 정조문은 여섯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중국 상해에서 민족 지도자 김구 선생과 독립운동을 했던 그의 아버지 정진국이 기울어진 가세를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아내와 세 자녀를 데리고 간 것이다.

교토에 터를 잡은 가족은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지 못했다. 정조문은 가난해서 학교에 갈 엄두를 못 내고 8세에 직물점 수습공이 됐다. 소학교 4학년 나이에 겨우 4학년으로 입학한 정조문은 소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3년 동안이 학교 교육의 전부였다. 1~3학년 교육 과정은 교과서를 빌려 독학해 진도를 따라잡았다. 신문배달을 하면서도 열심히 공부해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단상에 올라 답사를 읽은 그였지만, 일본 사회 어디에서도 '조센징'이라는 따돌림을 피할 순 없었다.

1937년 어머니가 과로로 사망하자,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할머니와 동생을 데리고 오사카로 이주한 그는 공사 현장에서 노동해야 했다. 언젠가는 기필코 조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했으나, 해방 후 먼저 귀국한 아버지가 '1946년 대구 10.1 사건'으로 사망하자, 조국과 인연이 다했다고 생각했다.

1951년 33세인 정조문은 교토에서 파친코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날이 갈수록 번창했지만 폭력배의 간섭이나 경찰의 비협조로 운영에 차질을 빚었다. 그는 선술집이나 초밥집, 찻집을 개업하며 사업을 확장했다.
   
사업이 안정될 무렵 어느 날, 정조문은 교토 뒷골목을 산책하다 고미술거리의 한 상점에서 아무 장식도 없는 순백의 이조백자를 보고 매력을 느꼈다. 더욱 놀란 것은 집 한 채 값의 가격이었다. 어디서도 자랑할 게 없던 '조선'이었는데, 고미술 상점에서 가장 높은 가격으로 진열된 것을 보고 '조선의 자랑거리'를 발견한 것이다. 1년간 할부로 물건 대금을 지급하기로 협상한 그는 이후 평생 우리 문화재 수집에 힘썼다.

보통의 수집가들이 재산 가치가 있는 문화재만을 모으는 데 반해 생활용품과 민화 등, 민족의 삶과 연관한 것은 무엇이든 모았다. 일본 속의 '조선'을 모아 자신의 정체성을 잃었던 동포들에게 조선의 자랑스러움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에 고려와 조선의 고미술품 수집에 집념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수장가(收藏家)는 많습니다. 그러나 문화재의 가치를 가장 잘 담보해낸 사람이 정조문 선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모으고 싶어 했던 건 갈 수 없었던 조국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죠."

정조문은 문화재를 모으는 작업을 독립운동이라 여겼다.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흩어져있는 문화재들을 모아 통일된 조국에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려미술관'이라고 한 것도 '고려'가 통일된 나라이기 때문이다.

정조문의 국적은 죽을 때까지 '조선적'이었다. 조선적(朝鮮籍)이란 1945년 일본 패망 이후 재일조선인 가운데 대한민국이나 일본의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일 미군정이 외국인 등록제도의 편의상 만들어 부여한 임시 국적이다.

일본 정부는 '구 조선호적등재자 및 그 자손(일본 국적 보유자는 제외) 가운데 외국인 등록상 국적 표시를 아직 대한민국으로 변경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공식 해석한다. 사라진 조선을 국적으로 가지고 있으니 무국적자인 셈인데, 일본에 4만여 명이 있다. 정조문은 남한과 북한이 온전한 조국이 아니라고 판단해 어디든 선택하지 않았다.

"남도 북도 내 조국이고 고향입니다. 부모님이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어디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슬픔을 견디면서 재일교포로 살면서 이곳 교토에서 눈을 감겠습니다."

1988년 고려미술관 개관 즈음에 일본 <NHK>와 한 인터뷰의 일부다.

고려미술관은 지하1층·지상2층 규모로, 소장품은 도자기가 주류를 이룬다. 그중 100여 점은 매우 뛰어난 국보급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부설기관으로 고려미술관연구소가 있는데, 한국 문화 연구와 관련 강좌 개최 등을 하고 있다.

정조문이 40년간 고민한 끝에 이 미술관을 만든 이유는 후손들이 민족정신을 잊지 않고 한국인과 일본인이 서로 이해하는 공간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개관 4개월 후 고려미술관에서 사망한 정조문은 '통일된 조국에 미술관을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좋아하고 존경해 시작한 일 '정조문을 알리고 싶다'

최선일 프로듀서 핸드폰 바탕화면에는 고(故) 정조문 선생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있다.
 최선일 프로듀서 핸드폰 바탕화면에는 고(故) 정조문 선생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있다.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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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일 피디의 핸드폰 바탕화면은 정조문 선생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다.

"2013년 4월에 '정조문과 고려미술관'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고 학술대회를 했어요. 그러고 나서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왜냐고요. 좋아하고 존경하니까요.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손을 잡고 싶은 것처럼 자연스러운 거죠. 만난 적이 없는 게 제일 아쉽습니다. 사람들한테 어떻게 알릴까 고민하다가 영화를 만들었고, 내년에는 정조문과 고려미술관을 주제로 한 연극을 할 계획입니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게 됐어요. 언론에 많이 홍보도 됐고요"

영화 <정조문과 항아리>는 많은 이들의 후원과 재능기부로 만들어졌다. 추진위원 김성태 캘리그래퍼가 영화의 타이틀을 만들어주고 김금훈 헉스뮤직 대표가 영화 주제곡을 제공했으며, 최재용 사진작가가 포스터와 팜플렛 제작 등에 재능기부를 해줬다. 추진위원과 후원인 500명을 모았는데 일본 추진위원장은 전 고려미술관 우에다 마사아끼 관장이, 한국 추진위원장은 고은 시인이 맡았다. 고은 시인은 1989년에 고려미술관을 방문했는데, 정조문이 입원해 있을 때라 직접 대면하지는 못했다.

이 영화를 위해 누구보다 헌신한 사람은 최선일 피디, 황철민 감독, 최광희 작가다. 자신을 '영화의 문외한'이라고 말한 최 피디는 어떻게 영화를 만들 용기를 냈을까?

"고려미술관 2층에 비디오를 틀어 놓은 코너가 있어요. 2001년에 처음 갔을 때부터 작은 브라운관에 계속 같은 화면이 나오더라고요. 이제는 너무 낡아 비가 오는 걸(=화질이 좋지 않은 상태) 보고 '내가 하나 만들자'고 생각한 게 시작이었습니다. 영화평론을 하는 지인에게 부탁해 영상을 만들어줄 학생을 물색하던 중 황철민 세종대학교 교수를 만났어요. 만들고 싶은 영화 내용을 말했더니, 황 교수가 직접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일이 커질지 몰랐습니다. (웃음)"

 최선일 프로듀서(왼쪽), 황철민 감독(가운데), 최광희 작가(오른쪽)가 고려미술관 안에 있는 고려시대 오층석탑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사진제공·최재용>
 최선일 프로듀서(왼쪽), 황철민 감독(가운데), 최광희 작가(오른쪽)가 고려미술관 안에 있는 고려시대 오층석탑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사진제공·최재용>
ⓒ 최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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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짜리 영화를 만드는 데 인건비도 전혀 없이 비용을 6000만 원으로 산출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황 교수가 나선 이유가 있었다. 독일에서 공부한 황 교수는 13년간 한국에 들어오지 못한 적이 있다. 세계적인 작곡가 고(故) 윤이상 선생과 독일에서 민주화운동을 했던 이력 때문이었다. 윤이상 관련 영화를 만드는 게 평생 숙제라 생각했던 황 교수는 타국에서 통일을 염원했던 정조문의 이야기가 마음에 다가왔다. 황 교수는 최광희 작가를 섭외했다.

"한국과 일본의 후원인 350여 명이 5000만 원 가까이 후원해주셨어요. 저는 꼭 극장상영을 하려 합니다. 2년간 고생한 감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해요.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감독이 돈도 안 되는 영화를 고생하면서 만들었습니다. 극장상영을 마치면 엔딩에 후원자들 이름을 넣어 시디(CD: 콤팩트 디스크)로 만들어서 주려고요. 그래야 마음이 편할 거 같습니다. 정조문 선생이 생전에 인복이 많았고, 그 좋은 인연이 저와도 연결돼 있는 거 같습니다. 이렇게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은 걸 보니까요"

전주국제영화제와 DMZ국제다큐영화제에 출품된 이 영화는 현재 공동체상영을 하고 있다. 공동체상영이란 대규모 자본의 영화산업 진출로 독립영화의 배급 활로가 열악해진 상황에서 극장 개봉과 별도로 요구가 있는 관객들이 있는 곳이면 언제, 어디서라도 영화 관람이 가능하게 하는 대안적인 상영·관람 방식을 말한다.

"저번 주에 광주광역시의 무등공부방이란 곳에서 50여 명에게 공동체상영을 했어요. '교토를 그렇게 많이 갔는데 고려미술관과 정조문을 몰랐다'며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를 묻더라고요. 이번 주에는 무등공부방에서 보셨던 분의 추천으로 원광대학교 학생들이 공동체상영을 예약했습니다"

정조문이 사재를 쏟아 만든 고려미술관은 현재 운영이 어렵다고 한다. 어느 곳에서도 지원이 없고, 정조문의 후손들이 운영비를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일동포 문학계의 거장 김시종 시인은 '고려미술관은 교토를 넘어 일본 전체 동포들에게 민족정체성을 향한 등대와 같은 곳'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 미술관을 운영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최 피디는 지난 25년간 버텨준 가족들에게 고마울 따름이고, 이후의 결정도 그들의 뜻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이나 영국 대영박물관, 일본 국립박물관 등, 세계적인 박물관에도 한국실이 있지만, 고려미술관은 우리 문화유산만을 전시하는 유일한 해외 소재 미술관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대영박물관 한국실의 경우 대기업에서 거액을 꾸준히 후원하고 있어요. 반면에 고려미술관의 운영이 어려운 게 무척 안타깝습니다"

극장상영을 하려면 최소 3000만 원이 필요하단다. 공동체상영의 문은 활짝 열려있다. (문의·김자영 010-9207-0139)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태그:#정조문, #정조문의 항아리, #최선일, #고려미술관, #일본 교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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