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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공원 전경. 자이승 승전탑에서 불상공원의 거대한 불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 노시경
울란바토르(Ulaanbaatar) 시내 남쪽의 자이승 승전기념탑(Zaisan Memorial)을 둘러보고 아래로 내려가려는데 산 아래에 거대한 크기의 불상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봐도 한국에서 많이 보아온 익숙한 모습의 불상이 서 있었다. 자이승 기념탑 밑에 한국에서 불상을 만들어 기증해 만든 불상공원이 있다고 하던데 바로 그 공원인 것 같았다. 나는 우리나라와 관련된 공원을 둘러보기 위해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자이승 기념탑 아래로 내려오니 어느덧 울란바토르 시민들의 출근시간이 되었고 거리에는 차들의 이동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나는 널찍한 터에 자리잡은 불상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울란바토르 고급주택가에 자리잡은 불상공원 안에는 인근 주민들이 들어와서 불상을 향해 기도를 하고 있었다.

불상공원 내에는 거대한 부처님 입상은 있지만 대웅전이나 사천왕문이 없어 완성된 사찰의 구조를 하고 있지는 않다. 이 불상공원을 고려사(高麗寺)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한국인이 지은 사찰이라는 의미로 불리는 것 같고 '고려사'라는 현판을 찾지는 못했다. 경내를 둘러보아도 공원 같은 조경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불상공원(Buddha park)이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린다.

몽골 불상공원, 한국에 있는 듯한 기분이...
불상공원의 불상. 불상의 높이가 몽골에서 두 번 째로 높은 대불이다. ⓒ 노시경
황금으로 도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화려한 불상은 아침 햇살을 받아 번쩍거리고 있었다.  우리나라 불교도들이 기증한 이 불상은 기단부분까지 합친 높이가 무려 25m에 달한다. 불상 옆에 최근에 지어진 고층 아파트가 있는데, 아파트 6, 7층은 되어 보이는 높이이다. 몽골 최대의 불교 사찰인 울란바토르 간단사(Gandan Temple)에 있는 몽골 최대 관음대불의 높이 26m에 살짝 못 미치는 높이이다. 이 불상공원의 한국 대불은 간단사 관음대불의 높이를 초과할 수 없다는 불문율 때문에 그 높이가 25m까지만 가능했다고 한다.

무소유를 설파하는 불교에서 불상의 높이를 따지는 것에 실소가 나왔다. 부처님이 발현하는 자비는 불상의 크기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최대 불상이 최고의 사찰을 만드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 사찰 중에서 한 사찰이 으뜸이 되는 것은 그 사찰이 얼마나 인간계의 삶에 대해서 고민하고 우주의 진리를 고민하고 있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대불 바로 앞에 육중한 아파트들이 막아선 모습도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생소한 광경이다. 이 주변이 공터였을 당시에 불상공원이 먼저 들어서고 그 다음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공원 주변은 아파트로 둘러싸인 거대한 광장 같이 되어버렸다. 공원 주변에 고급 아파트를 지으면서 이렇게 넓은 공원과 불상은 건드리지 못했으니 아파트를 지어 파는 업자들 입장에서는 아쉽게 입맛만 다셨을 듯하다.

석가모니불 입상의 얼굴은 상반신에 비해 과분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거북스럽게 크다. 불상의 정수리 뼈가 솟아 상투 모양이 된 육계(肉髻)는 단순하고, 부처님이 입고 계신 법의는 너무 두꺼워서 작품성도 떨어져 보인다. 하지만 마치 동자승이 웃고 있는 듯 얼굴에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있다. 마치 친근한 이웃 같은 부드러운 부처님의 얼굴은 한국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공원의 종과 북. 한국 신자들이 시주한 이 종과 북은 한국양식 그대로 만들어졌다. ⓒ 노시경
기도하는 신자들. 성금을 내고 마니차를 돌리며 불상 앞에서 복을 빈다. ⓒ 노시경
불상공원의 이곳 저곳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낯익은 것들이 많이 있다. 불상 오른쪽에 걸려 있는 종은 경주의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을 그대로 복사한 한국 종이다. 종의 종신(鐘身)에는 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飛天像)이 몽골에서도 하늘을 날고 있고, '세계평화 인류복지'라는 염원이 한글로 돋을새김 되어 있다. 한국 종이 울릴 때마다 한글로 기록된 이 염원이 몽골에도 멀리 퍼져나갈 것만 같다.

절에서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법고(法鼓)도 북통이 온통 황금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만 제외하면 우리나라 법고와 똑같이 생겼다. 법고마저 같으니 마치 우리나라 사찰 안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쉽다. 나는 북의 몸통에 잔뜩 새겨진 데이트 족들의 몽골어 낙서를 보고 나서야 이곳이 몽골이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대불 앞에서는 몽골 신자들이 부처님께 복을 빌고 있다. 그들은 불상 정면에 마련된 투명한 성금함에 성의를 보인 후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했다. 성금함 내부의 몽골 지폐 금액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 여인은 성금함 앞에 오더니 성금함 안에 있는 금빛 소형 마니차(摩尼車)를 돌리면서 소원을 빌었다.

한국 양식으로 불상공원을 만들다 보니 몽골 라마교의 상징인 마니차를 만들지 않았고, 몽골인들은 몽골 불교의 상징인 마니차를 작게나마 스스로 마련해 둔 것이다. 소원을 비는 방식은 조금 다르지만 몽골이나 우리나라나 불교 사찰에서 개인들이 복을 비는 모습은 다를 바가 없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따라 산속 우리나라 절에 답사여행을 많이 갔던 나는 나도 모르게 불상 앞에서 합장을 하고 기도를 드렸다.

거대한 석가모니 대불 뒤로는 산 위의 자이승 승전기념탑이 멀리 보였다. 자이승 기념탑 바로 북쪽 아래, 불상공원 바로 옆에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과 관련된 공원이 있어서 발걸음을 서둘렀다. 나는 자이승 몽골 승전의 역사 아래에 남아 있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흔적을 찾아 가기로 했다. 그곳에는 울란바토르에서 몽골인들에게 의술을 베풀며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던 애국지사 이태준(李泰俊) 열사를 기념하는 공원이 있다.

애국지사 이태준 열사의 안타까운 죽음
울란바토르의 태극기. 이태준 공원 입구에는 몽골 국기와 함께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 노시경
이태준 기념공원. 기념비와 기념석 등이 모두 한글로 적혀 있을 정도로 친한국적인 공원이다. ⓒ 노시경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도 불상공원과 같이 몽골의 고급 아파트와 주택가로 둘러싸인 길가에 있었다. 공원 안으로 들어서니 상당히 넓은 터의 공간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이 외국의 수도에 한국인 이름의 공원과 기념관을 설립하였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이례적인 일로 느껴졌다.

기념공원 정문 앞에는 몽골 국기와 함께 우리나라의 태극기도 자랑스럽게 게양되어 있어서 한국과 몽골의 우호관계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공원 기념비와 묘비, 기념관 설명문도 모두 한글로 되어 있고, 한국 양식의 팔각정에서는 한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몽골 외무부에서는 몽골 국왕의 어의였던 이태준에게 수여한 훈장까지 동판으로 만들어 공원 내의 비석으로 만들어두었다. 이태준은 1914년 몽골에 입국하여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병원을 열고 몽골인들을 괴롭혔던 성병 매독 치료 등 근대적 의술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몽골 마지막 왕인 복드칸(Bogd Khaan)의 주치의로도 활동하면서 몽골인들도 마음 깊이 추앙하는 인물이 되었다고 한다. 몽골인들은 그에 대해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이처럼 넓은 기념관 부지를 제공한 것이다.
공원의 팔각정. 먼 이국 땅에서 우리나라의 한 공원 같은 한국적 정취가 느껴진다. ⓒ 노시경
기념비석. 이태준 선생을 추모하는 비석과 몽골정부 훈장수여를 알리는 비석이 함께 있다. ⓒ 노시경
경내 한쪽에는 과거 이태준 기념관으로 사용되었던 게르 천막이 남아 있고, 그 옆에 말끔하게 지어진 새 기념관이 있다. 나는 이태준 기념관 안에 들어가 그의 생애가 기록된 글들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그는 무려 백여 년 전인 1911년에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한 지식인이었다. 독립지사들과 교류하던 이태준은 일제의 손길이 아직 미치지 않던 몽골에서 항일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하여 몽골로 와 있었다. 그는 몽골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몽골 왕의 어의로도 활약하면서 조선 독립을 위해 열정을 태웠다. 그는 의원에서 확보한 자금으로 중국 본토와 만주 등에서 진행되던 조선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는 각지의 애국지사들과 연계하여 항일 투쟁활동을 함께 했다. 당시 그의 병원은 항일 독립투사들의 중간연락 거점이자 군자금 유통경로로 활용되었다. 이태준은 의열단(義烈團) 단원으로서 중국의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전달하는 독립운동에도 힘썼다. 그는 폭탄제조 기술자를 찾던 의열단의 김원봉(金元鳳)에게 몽골에 있던 헝가리인 폭탄 전문가를 소개해 주기도 하였다. 그의 소개로 인해 의열단은 비로소 고성능 폭탄을 만들게 되었고, 의열단의 폭탄 투척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나는 기념관의 이태준 선생 일대기를 읽다가 길게 탄식하였다.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방문했을 때 느꼈던 엄숙함과 비장함이 가슴 속에 다시 살아났다. 당시 척박한 몽골 땅에서 독립자금을 모으고 폭탄 전문가를 찾아 다니던 그의 모습이 머리 속에 마치 파노라마처럼 나타나는 듯했다. 몽골에 있던 헝가리인이 자기 나라도 아닌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수류탄 제조비법을 발벗고 나서 전해 주는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헝가리인은 이태준 선생의 열정과 인덕에 감화되어 있었다.
이태준 기념관. 기념관 안에는 한국인들을 숙연하게 하는 글들이 남아 있다. ⓒ 노시경
'아! 요새 우리나라 영화에 많이 나오는 독립운동가, 의열단 김원봉에게 폭탄을 제공한 이가 바로 이태준 선생이었구나! 나도 이태준 선생의 역사를 몽골여행을 준비하면서야 알게 되었는데...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에서도 이런 분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더 크게 알려야 하지 않을까?'

이태준 기념공원의 묘는 귀부를 갖춘 비석과 함께 잘 정비되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이태준 공원의 이태준 묘비 뒤에 있는 묘는 가묘이다. 그는 1921년 몽골혁명 당시 울란바토르를 일시적으로 점령한 러시아 백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일본과 긴밀한 관계였던 러시아 백군의 미친 남작, 운게른 슈테른베르크(Ungern Sternberg)의 부하들은 울란바토르에 있던 많은 외국인을 처형했고 항일 운동을 위해 남아있던 이태준 선생도 밧줄로 교살하였다. 나는 함께 여행 중인 몽골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이태준 가묘와 이태준 선생. 이태준 선생은 보그드 산 근처 알 수 없는 곳에 묻혀 있다. ⓒ 노시경
"한창 젊은 나이인 38세에 죽임을 당하다니... 그것도 느닷없이 나타난 놈들이 목을 졸라 죽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히셨을까? 이 러시아 백군들은 뭐야?"
"당시 러시아 혁명에 반대하던 운게른 남작이 러시아 백군을 이끌고 몽골 땅에 쳐들어왔지. 그의 병사들은 말을 타고 다니며 심심풀이로 학살을 하고 눈에 띄는 여자들마다 성폭행하고 닥치는 대로 약탈을 했지. 지금도 몽골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말하면 치를 떨어."

"운게른, 정말로 미친 사람 아냐?"
"그는 자신이 윤회를 촉진시키는 살아있는 부처라고 우기고 몽골의 칸까지 자처했던 미치광이였어. 그는 몽골을 강압통치하다가 1년도 되지 않아 몽골의 독립영웅 수흐바타르 (Sukhbaatar)군에게 패배를 당하고 결국 총살 당하였지. 그 후 그에 대한 시신 부검이 이루어져서 그의 뇌를 연구해 보았더니 젊었을 때 결투로 인해 좌측 전두엽이 손상되어 있었던 것이 밝혀졌지. 즉 운게른은 정말 미쳐있었던 거야."

애국지사 이태준 선생은 황당하게도 러시아의 한 미치광이 손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태준 열사가 묻힌 곳은 이 공원 근처인 울란바토르의 성산(聖山) 보그드(Bogd) 산 근처였다고 한다. 이 근처 지하의 알 수 없는 곳에 선생의 시신은 묻혀 있는 것이다.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한다고 하니 너무나 애통하다.

이태준 기념공원은 몽골의 자연을 만끽하러 온 한국인들에게 아주 색다른 곳이다. 나와 아내는 이 울란바토르의 땅에서 예상치 않게 일순간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옆에 있는 몽골 친구는 느끼지 못할 한국인만의 먹먹함이다.

나는 이태준 기념공원을 나오면서 이태준 열사의 큰 뜻이 최근 어려움을 겪는 현대의 우리를 비추는 등불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 넓은 부지를 이태준 열사의 기념공간으로 내준 몽골과 우리나라의 우정이 더욱 깊어지기를 바랐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여행기 약 520 편이 있습니다.

태그:#몽골, #몽골여행, #울란바토르, #이태준, #불상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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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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