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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누구와 싸우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싸워야 하는가? 또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11·12 1백만 촛불항쟁의 현장에서 떠올랐던 몇 가지 생각들을 옮겨보고자 한다.

현 사태의 본질은 무엇인가

현재 언론에서는 작금의 사태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고 부른다. 드러난 사실만 놓고 보면 얼핏 그럴싸한 규정이다. 그러나 과연 사태의 진상이 그러한가? 단순히 이 사태를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출된 대표자(대통령)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과 국정운영의 권한을 일개 사인(私人)에게 의탁한 사건으로만 볼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재벌들은 막대한 돈을 내 박근혜와 최순실의 의중을 뒷받침하였고, 특히 삼성은 정유라의 승마선수로서의 앞날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경제민주화를 위해 제기됐던 각종 법안과 대안들을 박근혜 새누리당 정권을 통해 무력화시켰다. 또 이화여대는 정권과 어떤 은밀한 뒷거래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정유라에게 입학부터 학사과정까지 온갖 특혜를 주며 떡고물을 기대했고, 이에 분노한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총장을 쫓아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면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은 어떠한가? 우선 박근혜를 대선 후보로 내세운 당시 새누리당 구성원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을까? 더욱이 이명박은 2007년 당시 한나라당에서 박근혜 후보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박근혜가 지닌 치명적 문제들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그런 정보들이 최근 보도되고 있다). 더욱이 이명박 정권의 국정원은 박근혜 당시 의원을 사찰하기도 하지 않았는가? 김무성 전 대표는 본인 입으로 직접 "박근혜 후보 옆에 최순실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사람이 어디 있는가. (누구든) 몰랐다는 것은 거짓말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이미 여당 내에서도 진상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는 뜻일 게다. 설령 최순실의 존재를 집권여당이 몰랐다고 치자. 하지만 몰랐다면 무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더욱 큰 문제다. 최소한 집권 여당이라면 국정운영이 이렇게까지 망가지도록 방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는 새누리당이 집권여당, 더 나아가 정당으로서의 자격이 없음을 보여준다. 돌이켜보면 여태까지 새누리당은 청와대의 시녀노릇만 주구장창 해오지 않았는가?

다음으로 권력의 견제기관인 검찰과 사법부, 언론은 어땠는가? 검찰의 경우 일일이 예시할 필요도 없이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국가기관 대선개입 의혹 수사를 지휘하다 청와대에 의해 강제 사퇴를 당한 이후 정권의 호위무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온 사실을 전 국민이 다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우병우가 있었다. 단적으로 이른바 '정윤회 문건파동' 당시 검찰이 제대로 수사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했다면 과연 사태가 지금에 이르도록 방치될 수 있었을까? 이 점에서는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조선일보를 위시한 이른바 보수언론은 여태까지 이 형편없는 정권을 보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종북'으로 매도하고 괴롭혀 왔는가? 그들은 '권력 비판자', '민의 대변자'로서의 언론 본연의 역할이 아니라 권력자·강자와 결탁, 공모하여 스스로 정치를 하고 있었고, 처음 몇몇 언론에서 최순실 문제를 취재 보도했을 때도 이들 보수 언론은 무시로 일관하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태도를 싹 바꾸어 청와대와 야당을 향해 양비론적 입장을 취하고, 내치-외치가 구분되는 거국내각을 외치며 마치 정의로운 언론인양 포장하면서 살길을 찾고 있다. 최소한 염치는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하기야 이미 그들 스스로 부패한 세력임을 한때 박근혜 정권이 입증해주지 않았던가?

이상과 같은 몇 가지 단편적 편린만 보더라도 이번 사태는 새누리당-국정원-검경 공권력-사법부-재벌 자본-수구 언론-사립대학으로 연결되는 한국의 반동적, 수구적 기득권 네트워크가 야기한 종합적 참사요, 그들의 재산·지위·기득권·정권의 영속을 향한 탐욕과 공모가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꼭두각시와 꼭두각시 조종자에 집약된 사태인 것이다. 여기에 더해 박근혜와 최태민(최순실)의 관계가 박정희 유신체제의 산물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번 사태의 기원은 박정희 유신체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이번 사태는 이들 기득권 네트워크, 즉 한국에서 이른바 '보수'라고 불리는 세력이 자정 능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우리 시대를 선도해나갈 능력도, 자격도 없음을 명백하게 입증한 사건이다. 이제 이들은 '역사의 퇴물'로 전락했음을 스스로 인증한 것이다. 이들은 일제 때는 일본에,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는 군부에 빌붙어 기생해왔으며, 현재까지 이어지는 분단 상황에 기대어 자신들이 국가를 보위하는 세력인양 호도하지만, 이들이야말로 우리사회를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는 리스크이자 안보의 위협세력임에 분명한 것이다. 이들이 권력을 유지하면 할수록 우리 시민들은 불행해질 뿐이다. 당장 이 와중에도 한일군사정보협정을 추진하는 저 결기를 보라!

물론 촛불항쟁에 나선 우리 시민들은 현재 이 사태의 본질과 함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촛불항쟁의 현장에서도 단순히 "박근혜는 퇴진하라"는 구호만 나온 것이 아니라 "새누리당 해체하라", "재벌도 공범이다. 재벌을 해체하라"는 구호가 동시에 터져 나온 것이다. 그런 만큼 우리 촛불시민들이 향해야 할 곳은 단순히 청와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새누리당 여의도 당사, 조선일보사, 대검찰청, 삼성 사옥, 상암동 박정희기념관 등 서울 도심과 전국 도처에 널려 있다. 광장에 총집결한 우리 촛불시민들이 길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 질풍노도의 기세로 도처에 퍼져나갈 때 전선(戰線)은 확연히 드러날 수 있다.

또 한 가지, 향후 철저히 규명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국정과 관련해 최순실이 결정한 사안들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선출된 국민의 대표자가 아닌 자가 몇몇 개인들과 협의해 내린 국정 결정을 국민들은 결코 용인할 수 없다. 앞으로 최순실이 그 결정과정에 개입한 것으로 확인된 국정 결정 사항들은 반드시 백지화시켜 원점으로 되돌려놔야 한다.

어떻게 지배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것인가

민중! 11·12 1백만 촛불항쟁의 정식 명칭은 '민중총궐기'였다. 민중 담론 혹은 민중 사상은 한국 고유의 사회적 약자를 주체로 하는 反지배담론으로 볼 수 있다. 민중 담론의 생명력이 여전한 점에서 우리는 담론의 힘, 사상의 힘을 느낄 수 있다.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담론의 기원을 찾는다면 단연 단재 신채호를 꼽을 수 있다. 신채호는 유명한「조선혁명선언」에서 민중과 민중혁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일부 현대어로 고침).

구시대의 혁명으로 말하면, 인민은 국가의 노예가 되고 그 위에 인민을 지배하는 상 전 곧 특수세력이 있어 그 소위 혁명이란 것은 특수 세력의 명칭을 변경함에 불과하 였다. … 금일 혁명으로 말하면 민중이 곧 민중 자기를 위하여 하는 혁명인 고로 '민 중 혁명'이라 '직접 혁명'이라 칭함이며, 민중 직접의 혁명인 고로 그 비등·팽창의 열 도가 숫자상 강약 비교의 관념을 타파하며, 그 결과의 성패가 매양 전쟁학상의 정해 진 판단에서 이탈하여 돈 없고 군대 없는 민중으로 백만의 군대와 억만의 부력(富力) 을 가진 제왕도 타도하며 외국의 도적들도 쫓아내니, 그러므로 우리 혁명의 제일보는 민중각오의 요구니라. 민중이 어떻게 각오하는가? … 오직 민중이 민중을 위하여 일 체 불평·부자연·불합리한 민중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함이 곧 민중을 각오케하는 유일한 방법이니, 다시 말하자면 곧 먼저 깨달은 민중이 민중의 전체를 위하여 혁명 적 선구가 됨이 민중 각오의 첫째 길이다.

일반 민중이 배고픔, 추위, 피곤, 고통, 처의 울부짖음, 어린애의 울음, 납세의 독촉, 사채의 재촉, 행동의 부자유, 모든 압박에 졸리어 살려니 살 수 없고 죽으려 하여도 죽을 바를 모르는 판에, 만일 그 압박의 주인 되는 강도정치의 시설자인 강도들을 때 려누이고, 강도의 일체 시설을 파괴하고, 복음이 사해(四海)에 전하여 뭇 민중이 동정 의 눈물을 뿌리어, 이에 사람마다 그 '아사(餓死)' 이외에 오히려 혁명이란 일로가 남 아 있음을 깨달아, 용기 있는 자는 그 의분에 못 이기어, 약자는 그 고통에 못 견디 어, 모두 이 길로 모여들어 계속적으로 진행하며 보편적으로 전염하여 거국일치의 대 혁명이 되면, 간활 잔포한 강도 일본이 필경 쫓겨 나가는 날이리라. 그러므로 우리의 민중을 깨우쳐 강도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민족의 신생명을 개척하자면 양병 10만 이 폭탄을 한번 던진 것만 못하며 억 천 장 신문 잡지가 일회 폭동만 못할 지니라.

신채호는 민중직접혁명론을 역사의 경험으로부터 반추해냈다. 그는 갑신정변은 특수세력 간의 궁중 활극이었고, 구한말의 의병은 충군애국의 사상으로 일어난 독서계급의 사상이었으며,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폭력적 행동이 열렬하였지만 그 배후에 민중적 역량의 뒷받침이 없었고, 3·1운동은 민중적 일치의 의기가 발현되었지만 폭력적 중심을 가지지 못했다고 비평했다.

기실 지금의 사태 또한 사태를 움직여 나갈 수 있는 칼자루는 검찰이 쥐고 있는 형국이 아닌가? 청와대, 국회, 언론, 시민들이 모두 검찰의 수사 과정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검찰은 보수정권의 공범으로서 국민적 신뢰를 상실한지 오래이며, 현재의 국면에서도 과연 얼마만큼 제대로 된 수사를 해낼 수 있을지 회의적인 관측이 많다. 위에서 신채호가 설파했듯 작금의 사태 또한 '특수 세력의 명칭을 변경하는 사태'로 흘러가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기만 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식민사회'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그러면 식민사회란 무엇인가? 식민사회란, 단순히 이민족에게 지배받는 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세계를 '우열(優劣)'의 관점에서 규정짓고 불평등과 독점적 소유,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식민주의적 세계관이 일상을 지배하는 사회라 규정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도 식민 사회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결과가 초래되었는가? 진정 우리의 식민지 역사가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로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여태껏 식민 권력의 주체가 교대되어 왔을 뿐이며, 그런 점에서 지금의 한국 지배세력은 '한국말을 사용하는 일본 식민통치자'들에 불과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의 이른바 '보수 세력'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두려움이 없다. 웬만해선 꿈쩍도 하지 않는다. 동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서 다 같은 동시대인이 아니다. 2016년인 오늘에도 저들의 인식 수준은 1960년 4월 경무대 앞에서 학생 시민들에게 발포한 정신 상태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때는 총을 쏘았지만, 이제는 살인적 물대포를 동원하는 점이 조금 달라진 점일 뿐이다. 우리는 지금 비상한 각오를 지니고 성패에 구애받음이 없이 장기간의 태세를 갖추어 처절하게 싸워야 한다. 우리 스스로가, 각 개개인마다 일상 속에서 기존의 법과 관념과 시스템과 질서와 가치, 그리고 그것이 경계 짓고 있는 틀들을 모조리 넘어서야 한다. 기존의 시스템과 경계에서 기대할 것이란 좌절과 분노뿐이다. 우리는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투쟁은 지배자가 짜놓은 프레임 안에서의 일방적 외침일 뿐이다.

공권력을 어떻게 볼 것인가

11·12 민중총궐기 당시 청와대 진입로에 해당하는 내자동 사거리에 경찰은 차벽을 세워두고 차벽 뒤에 2만 명이 넘는 경찰과 의경 병력을 배치해두었다. 물론 경찰이 차벽을 세워 통행을 막아놓은 것은 그 자체 원천적인 폭력이다. 또한 법원의 판결대로 따져도 경찰의 행동이야말로 불법인 것이다. 그런데 저 선을 넘으려는 순간 정권과 주류언론들은 시위대를 폭력세력으로 매도할 것이다. '경계'는 이때 발생했다. 이 경계는 기득권 세력이 쳐놓은 폭력적 방어선이요, 그들의 최전선이었다.

당시 동원된 의경들은 우리 시민들의 자녀이며, 경찰은 우리 시민들이 납부한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권력이었다. 이로 인해, 즉 공권력이 지닌 이러한 모호한 속성이 피아의 구분을 어렵게 하고 적대의 경계와 대상을 흐리게 하고 있었다. 어쩌면 피지배자의 일부 구성원을 공권력에 동원해 피지배자의 저항을 막는 저들의 놀음에 우리 모두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경찰은 분명 촛불시민들이 아닌 청와대를 위해 봉사하고 있었다.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로 인해 사망했음에도 이날 경찰은 차벽 뒤에 물대포를 대기시켜두고 있었다. 그리고 시민들이 아무리 "비켜라"를 외쳐도 경찰은 비켜주지 않았다. 과연 경찰은 촛불의 편에 설 수 없는가? 과연 청와대 혹은 윗선의 지시대로만 움직여야 하는가? 당시 현장상황이 증명했듯 우리 시민들은 그 숫자가 1백만에 달했음에도 자발적으로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고, 대단히 이성적이었다. 오히려 비이성적이어서 통제를 받아야 할 대상은 시민들이 아니라 현재의 권력이다. 따라서 경찰과 같은 공권력은 자신들이 누구를 위한 기관인지 그 태도와 행방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경계를 넘는 주체는 시민이 될 수도 있지만, 공권력이 될 수도 있다. 과연 경찰이 권력을 방어하기를 포기하고, 시민들의 길을 터준 뒤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기여할 수는 없는 것인가? 만일 경찰 스스로 그러한 행동에 나서지 못한다면, 공권력이 지닌 모호성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러니한 역사의 반복?

지금 우리사회는 총체적 '해체'와 '청산'의 기회로 진입하고 있다. 1960년 4월혁명 직후 주어졌던 기회를 우리는 다시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한국사회는 3·15부정선거의 원흉인 자유당 간부 및 이승만 정권 고위 관리 처벌, 부정축재자 처벌, 과거사 청산 등의 과제를 풀어나갈 기회를 맞이하였고, 이를 위한 여러 정치적, 사회적 활동이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4월혁명으로 인해 열린 공간은 5·16쿠데타에 의해 전복되었다. 그로부터 55년이 지난 오늘,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그 5·16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의 딸이 우리에게 4월혁명 당시 열렸던 공간을 다시 제공해주고 있다. 이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물론 이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있다. 기존의 방식과 관성에 의거한 싸움은 필연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집단지성의 힘을 빌려 좀 더 새로운 발상과 새로운 방식으로 싸움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태그:#민중총궐기, #기득권 네트워크, #4월혁명, #조선혁명선언, #식민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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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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