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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소정방이 쳐들어 왔고(기벌포), 고려말 대규모 왜구들이 침범해 왔던(진포) 금강 하류의 군산 내항. 군산근대역사관은 물론, 옛 군산세관 등 일본 관련 역사가 깃들어 있는 수많은 답사지들이 이 주변에 있다.
 당나라 소정방이 쳐들어 왔고(기벌포), 고려말 대규모 왜구들이 침범해 왔던(진포) 금강 하류의 군산 내항. 군산근대역사관은 물론, 옛 군산세관 등 일본 관련 역사가 깃들어 있는 수많은 답사지들이 이 주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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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년, 당나라 소열(호: 정방)이 군대를 몰고 백제 땅으로 쳐들어 왔다. 전함을 타고 서해를 건너온 당군은 덕적도에 머물면서 고구려로 진격하는 양 속임수를 쓰다가 곧장 기벌포로 진입했다. 기벌포, 뒷날 진포로 이름이 바뀌었고, 지금은 군산 내항이라 부른다.

물론 소열이 기벌포로 온 것은 금강 하류에서 배를 이용하면 백제의 수도 부여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 시대에도 진포에는 적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대표적인 것은 1380년(우왕 6), 500척이나 되는 왜구들이 진포를 침입했다. <고려사>의 나세(羅世) 열전에 따르면, 1만 명 이상이나 되는 왜구들은 주변 고을들을 무자비하게 침탈했다.

우리 백성들의 시체가 산과 들을 덮었고, 왜구들이 약탈한 곡식을 가져가며 흘린 쌀이 또 다시 한 자 두께로 땅을 덮었다. 나세, 심덕부(沈德符), 최무선(崔茂宣)이 전함 100척을 이끌고 진포로 달려가 왜구를 공략했다. 이때 최무선은 자신이 만든 화포(火砲)를 사용해 함포 사격으로 왜구의 배들을 불태웠다. 세계 해전 역사상 처음으로 화포를 사용한 전투였다. 진포대첩(鎭浦大捷) 이후 한동안 왜구들은 우리나라를 넘보지 못했다.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는 조선의 문제

(사진 왼쪽부터) 선유도, 무녀도, 신시도 등이 수평선 위로 보이는 고군산군도의 풍경. 조선 초에는 선유도에 수군 부대가 주둔했는데 그 진지를 군산진이라 했다. 군산진의 군산이 뒷날 옥구를 대신해 시의 이름이 되었다.
 (사진 왼쪽부터) 선유도, 무녀도, 신시도 등이 수평선 위로 보이는 고군산군도의 풍경. 조선 초에는 선유도에 수군 부대가 주둔했는데 그 진지를 군산진이라 했다. 군산진의 군산이 뒷날 옥구를 대신해 시의 이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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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군산시'가 태어나는 1995년 이전의 군산시 지역은 조선 초기에 옥구현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1906년 대한제국 때 옥구부가 되고, 1914년 일제 강점기 때 군산부로 개명되었다.

군산부라는 이름은 군산진(群山鎭)에서 왔다. 군산진은 본래 산(山)들이 무리(群)를 짓고 늘어선 듯한 모양의 섬들(群島)인 군산군도(群山群島) 중 선유도에 주둔해 있던 수군 부대였는데, 왜구들이 선유도를 우회하여 해안을 침범하는 사태가 빚어지자 세종 이후 현재의 군산시 금동(구 군산의료원과 청구여상 자리)으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1596년(선조 29), 충청수사 최호(崔湖)가 부하 장졸들과 함께 전함을 이끌고 한산도를 향해 떠난 곳은 군산진이 아니다. 그는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설치되어 있던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에서 출격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군선 142척과 수군 8414명이 배속되어 있었다고 증언한다. 최호도 아마 그와 비슷한 전력을 지휘하였을 것이다.

충남 보령 오천성에서 바라본 바다. 사진은 충청수사 최호가 머물던 이곳의 위치를 짐작하게 해준다. 최호는 충청수사로 이곳에서 해안 국경을 지키던 중 남해안으로 원균을 도와 출정했다가 칠천량에서 전사했다.
 충남 보령 오천성에서 바라본 바다. 사진은 충청수사 최호가 머물던 이곳의 위치를 짐작하게 해준다. 최호는 충청수사로 이곳에서 해안 국경을 지키던 중 남해안으로 원균을 도와 출정했다가 칠천량에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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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수영 자리인 오천성에 가보면, 전쟁터 느낌은 맡을 수 없지만 조선 시대의 시인 묵객들이 왜 그렇게 많이 이곳으로 몰려 들었는지는 저절로 헤아려진다. 가파른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는 성곽은 안면도와 보령항 사이의 천수만 입구를 저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어, 찾아오는 이 아무도 없어도 저 혼자 낭만과 풍류를 즐기느라 여념이 없다. 게다가 성 동쪽 2km 쯤에는 백제가 낳은 슬픈 전설의 도미부인 사당까지 있어 더욱 이채롭다. 

하지만 충청수사 최호는 오천성을 떠나 한산도로 가면서 그처럼 한가하고 유쾌한 기분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전쟁의 참화로 온 나라는 옥토조차도 황무지로 변했고, 포탄에 맞아 또는 칼에 찔려 죽거나 아사한 사람들의 시체가 사방에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명나라와 일본이 강화 협상을 하느라 절반쯤 휴전 상태이기는 했지만, 그가 소속된 수군은 연전연승을 하던 기백을 뽐내기는커녕 온통 우왕좌왕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조선 수군의 양대 기둥인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였다. 1594년 11월 12일, 이순신은 3도수군통제사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11월 28일, 군대 문제를 총지휘하는 정부 기관인 비변사는 '두 장군의 극심한 불화 때문에 조선 수군 전체의 지휘력과 전투력이 크게 떨어졌다'면서 '성상(聖上, 임금)께서 두 사람을 화해시키시거나, 아니면 한 사람을 육군으로 돌리는 것이 좋겠다' 하고 선조에게 건의했다.

최호 장군 사당
 최호 장군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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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선조는 원균을 충청병사로 보내는 대신에 그 빈 자리에 누구를 앉히면 좋겠느냐고 대신들에게 물었다. 대신들은 곽재우, 배설, 이광악을 추천했다. 이윽고 12월 9일, 진주목사 배설에게 경상우수사 임명장이 떨어졌다.

결정적인 사건은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이 보낸 비밀 사신이 경상우병사 김응서를 찾은 1596년 12월 1일부터 터졌다. 밀사는,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이 내년 1∼2월 중에 현해탄을 건너오니 조선 수군이 부산 앞바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죽여버리면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출정을 명했다. 이순신은 임금의 지시를 거부했다. 적들의 간교한 꾀에 넘어갈 수는 없다는 것이 이순신의 판단이었다. 선조가 계속 출정 명령서를 보내고, 마지막에는 도원수 권율이 직접 한산도를 향해 말을 달렸지만, 이순신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최호 장군 부부의 묘소(사진의 오른쪽이 장군의 묘)가 들판과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최호 장군 부부의 묘소(사진의 오른쪽이 장군의 묘)가 들판과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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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 1월 13일, 가등청정의 군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선조는 "왜추(倭酋, 왜의 대장, 소서행장)가 모든 것을 손바닥 보이듯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우리는 해내지 못했다. 우리나라야말로 천하에 둘도 없는 용렬한 나리다. 우리는 왜추보다도 못하다. 한산도의 장수(이순신)는 편안히 누워서 어떻게 해야할 줄을 몰랐다"면서 "그런 자는 가등의 목을 베어와도 용서할 수 없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하고 내뱉었다. 

결국 2월 6일, 이순신 검거령이 떨어졌고, 3월 4일, 이순신은 감옥에 갇혔다. 원균이 3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선조와 조정은 원균에게 부산 앞바다로 출정하여 신속히 왜적들을 무찌르라고 독촉했다. 당시 남해안은 일본군들이 성을 쌓은 채 점령하고 있었다. 만약 조선 수군이 부산 앞바다로 가면, 앞에는 부산항에 머무르고 있든 일본 수군, 뒤에는 남해안 왜성들에서 나와 배를 타고 따라온 일본 육군 사이에 저절로 포위되는 꼴이었다.

최호 장군 묘역으로, 상당히 장엄하다. 계단 끝까지 올라가야 묘소가 있다.
 최호 장군 묘역으로, 상당히 장엄하다. 계단 끝까지 올라가야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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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은 망설이다가 도원수 권율에게 끌려가 병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곤장을 맞는 치욕까지 당했다. 결국 7월 5일, 원균은 조선 수군 전부를 이끌고 부산 앞바다로 출발했다. 그러나  갑자기 몰아닥친 풍랑 때문에 부산 앞바다에서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거제도 북서쪽 해안의 칠천량으로 후퇴했다.

7월 16일 새벽 4시, 칠천량의 사방 육지에 매복해 있던 일본 육군과 배를 타고 달려든 일본 수군의 야습이 벌어졌다. 이런 일을 염려하여 경상우수사 배설,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 대장들이 한결같이 칠천량 주둔을 반대했지만, 원균의 고집을 꺾지 못한 것이 큰 화근이었다. 칠천량은 물이 얕아 크고 무거운 조선 판옥선은 움직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조선 수군 최초의 패전, 최대의 참패 칠천량해전

20년 전인 1576년(선조 9) 무과에 장원급제했고, 함경도 병마사 등을 역임한 무장 최호도 어쩔 수가 없었다. 지난해에는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李夢鶴)의 군대를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 등과 함께 홍산(부여 홍산면)과 임천(부여 임천면)에서 크게 무찔러 1604년 청난공신(淸難功臣) 2등에까지 책봉된 최호였지만 사방이 포위된 상태에서는 적들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최호는 이몽학의 반란군을 홍성에서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사진은 홍주성의 조양문으로, 성 자체는 실제 모습과 일치하지만, 도심인 배경이 너무 지저분하여 포토샵 활용을 통해 조선 시대 풍경으로 재구성해 보았다.
 최호는 이몽학의 반란군을 홍성에서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사진은 홍주성의 조양문으로, 성 자체는 실제 모습과 일치하지만, 도심인 배경이 너무 지저분하여 포토샵 활용을 통해 조선 시대 풍경으로 재구성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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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날 칠천량에서 충청수사 최호, 전라우수사 이억기를 비롯한 장졸들이 한꺼번에 전사했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구출해낸 10여 척의 판옥선(뒷날 이순신에게 인계되어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말의 바탕이 된다.)을 제외한 조선 수군의 대부분 전함들도 불에 타고 바다에 가라앉아 사라졌다. 3도수군통제사 원균은 탈출하여 육지에 올랐지만 매복해 있던 일본 육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임진왜란 전체 전쟁사에서 가장 처참하게 당한, 그리고 최초로 당한 조선 수군의 패전, 그것이 바로 칠천량 전투이다. 그 전투에서 충청수사 최호는 끝까지 왜적들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729년(영조 5) 장군의 후손 최호선이 지금의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421번지(도로명주소 : 원발산길 33-2)에 사당을 세웠다. 장군의 묘소와 사당 충의사(忠義祠) 일대는 전라북도 기념물 32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 이곳에는 최호 장군이 남긴 유품들도 있었는데, 지금은 후손들이 군산근대역사관에 기증, 영구히 보관 및 관리되고 있다. 그중에는 최호 장군을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임명한다는 선조의 1592년 교지와 용양위 부호군에 임명한다는 선조의 1596년 교지도 있지만, 특히 역사관 답사자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날카롭고 단단한 칼 한 자루와 그것의 집이다. '삼인보검'이라는 이름을 지닌, 선조가 최호 장군에게 내린 호신용 보검이다.

군산근대역사관에서 볼 수 있는 최호 장군의 칼 <삼인보검>. 선조가 내린 호신용 보검으로, 칼몸에 三寅寶劍(삼인보검) 護身將令(호신장령)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박물관의 진열대에는 칼 앞에 확대경이 놓여 있는데, 그 안을 들여다 보면 여덟 글자가 보인다. 사진의 위는 칼집이다.
 군산근대역사관에서 볼 수 있는 최호 장군의 칼 <삼인보검>. 선조가 내린 호신용 보검으로, 칼몸에 三寅寶劍(삼인보검) 護身將令(호신장령)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박물관의 진열대에는 칼 앞에 확대경이 놓여 있는데, 그 안을 들여다 보면 여덟 글자가 보인다. 사진의 위는 칼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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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진열대 안을 들여다보니 삼인보검 앞에 확대경이 놓여 있다. 확대경이 있는 것은 그것으로 칼을 유심히 관찰하라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장군의 칼에 애정과 관심을 쏟아달라는 요청이다.

확대경 안을 들여다본다. 아, 놀랍게도 유리알 위로 글자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칼몸에 새겨져 있는 '三寅寶劍(삼인보검) 護身將令(호신장령)' 여덟 글자이다.

문득 나는 삼인보검 앞에서, 최호 장군을 비롯 임진왜란 극복을 위해 피를 흘린 수많은 선열들의 정신을 떠올린다. 삼인보검도 칼이기 때문이다. 칼은 피를 연상시킨다. 피를 흘린 사람들을 생각하게 한다. 앞으로는 어느 누구도 공동체를 위해 피 흘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나라, 아름다운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최호 장군을 1592년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임명한다는 선조의 교지와, 1596년 용양위 부호군에 임명한다는 선조의 교지로, 군산근대역사관에 진열되어 있다.
 최호 장군을 1592년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임명한다는 선조의 교지와, 1596년 용양위 부호군에 임명한다는 선조의 교지로, 군산근대역사관에 진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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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는 일본과 관계되는 답사지가 유난히 많다. 글 첫머리에 언급한 군산 내항, 세계 최초의 함포 공격으로 왜구들을 격퇴했던 진포 대첩의 의의가 서려 있는 곳이다. 최호 장군을 기리는 사당 충의사와 묘소는 우리나라 최대의 전쟁 비극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역사 유적지이다.

그런가 하면, 최호 장군 사당에서 1km밖에 안 되는 발산초등학교 교정에도 일본의 자취가 가득 배어 있다는 사실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학교 건물 자체가 일제 강점기 당시 거대한 농장을 운영했던 일본인의 사무실이었고, 뒤뜰에 있는 보물 276호 5층석탑과 보물 234호 석등, 그리고 문화재자료 185호 6각부도는 그 일본인이 자기 마음대로 다른 곳에 있던 문화재들을 지금 위치로 옮겨놓았다.

나라를 빼앗긴 약자의 고통과 서글픔, 제국주의 강자의 끝없는 약탈과 탐욕을 확실히 깨닫게 해주는 발산초등학교야말로 전국 방방곡곡 학생들의 수학여행지로 추천할 만한 곳이다. 게다가 학교 안에는 그 일본인의 3층짜리 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진 금고용 창고도 남아 있다. 농장의 문서, 귀중품, 현금, 미술품 등을 보관했던 곳으로, 1950년 6.25전쟁 때에는 북한군이 사람을 넣어두는 감옥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문화유산도 마치 사유물인 양 아무렇게나 가져갔다. 사진은 개정면 발산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보물 276호 5층석탑이다. 당시 이 학교 건물을 사무실로 썼던 일본인은 다른 곳에 있던 이 탑, 석등(역시 보물), 6각부도(문화재자료) 등을 자기 마음대로 이곳으로 가져와 정원 부속물로 썼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문화유산도 마치 사유물인 양 아무렇게나 가져갔다. 사진은 개정면 발산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보물 276호 5층석탑이다. 당시 이 학교 건물을 사무실로 썼던 일본인은 다른 곳에 있던 이 탑, 석등(역시 보물), 6각부도(문화재자료) 등을 자기 마음대로 이곳으로 가져와 정원 부속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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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군산에는 유형문화재 200호인 이영춘 가옥(개정동 413-7), 등록문화재 183호인 신흥동 일본식 가옥(일명 히로스 가옥, 신흥동 58-2), 일제 강점기 시절의 건축 양식을 복원하여 일본식 가옥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고우당(월명동 16-8) 등 일본인들이 살던 집이 많이 남아 있다. 

기념물 87호인 옛 군산세관 건물(장미동 49-38), 유형문화재 372호인 근대미술관(일본18은행 군산지점, 장미동 32), 등록문화재 374호인 근대건축관(조선은행 군산지점, 장미동 23-1) 등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강탈하기 위해 세웠던 관공서 건물들이다. 이들은 모두 군산 내항 인근에 있다.

옛 군산세관 건물은 기념물 87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은행 본점 건물, 옛 서울역사와 더불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개 건축물이다. 군산근대역사관 바로 옆에 있다.
 옛 군산세관 건물은 기념물 87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은행 본점 건물, 옛 서울역사와 더불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개 건축물이다. 군산근대역사관 바로 옆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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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문화재 208호인 임피 역사(술산리 226-1), 등록문화재 184호인 해망굴(금동 9-3), 화물 수송을 위해 건설된 내항의 부잔교(뜬다리) 등은 일본이 수탈을 위해 만든 구조물들이다. 등록문화재 64호인 동국사(금광동 135-1)는 일본식 사찰 건물을 보여준다.

물론 군산에는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우리 손으로 세운, 미래의 문화유산들도 많다. 군산근대역사관, 군산3.1운동기념관(구암동 334), 군산 항쟁관(월명동 17-13), 옥구 농민 항일항쟁 기념비(임피 역사 내), 평화의 소녀상(동국사 내) 등이 바로 그들이다. 채만식문학관도 일제 강점기 시대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소설가를 기록한 공간이므로 역시 같은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고려 시대의 왜구 침략을 증언하는 진포해양공원도 물론!

일본식 건물로 유명한 군산 동국사에는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져 있다. 군산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일본식 건물로 유명한 군산 동국사에는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져 있다. 군산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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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그래서 군산시는 <군산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이라는 소형홍보물을 관광객들에게 나눠준다. 앞뒤 두 가지의 답사 여정을 소개하고 있는데, 앞은 (1)군산 근대역사박물관, (2)진포해양공원, (3)은파호수공원, (4)금강철새조망대, (5)새만금방조제 (6)고군산군도를 순회하는 여정이다.

다른 면은, 대략 군산 시내를 답사하는 여정이다. 이 여정은 (1)옛 군산세관, (2)장미 공연장과 장미 갤러리, (3)근대미술관, (4)근대건축관, (5)부잔교, (6)해망굴, (7)초원사진관, (8)테디베어박물관, (9)신흥동 일본식 가옥, (10)고우당, (11)군산 항쟁관, (12)동국사, (13)군산3.1운동기념관, (14)채만식문학관, (15)이영춘 가옥, (16)임피 역사로 이루어져 있다.

(1)-(5)는 군산근대역사관에서 걸어서 5분 이내에 닿는 곳들이다. (7)-(11)은 15분 이내에, (6)과 (12)는 20분 이내에 닿는다. (13)-(16)은 약간 시외에 있는 편이다. 가장 먼 곳은 임피역사로 근대역사관에서 대략 15km 거리에 있다.

최호 장군 유적지와 발산초등학교는 근대역사관에서 대략 8km 거리에 있다. 하지만 <군산 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에는 빠져 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겠지만, 최호 장군이 알면, 아니 임진왜란 때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왜적과 싸우다 죽은 선열들이 아시면 매우 서운해 하실 것이다.


태그:#최호, #평화의소녀상, #발산초등학교, #칠천량, #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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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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