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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균관 문묘의 수문장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 김종성
가을이 깊게 익어가는 11월 이맘때쯤, 멀리가지 않아도 도심 속에서 가을의 색과 감성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다. 서울 종로구 성균관 대학교 안에 있는 문묘다. 문묘(文廟)는 유교를 집대성한 공자(孔子)와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위패(位牌)는 죽은 사람의 이름과 죽은 날짜를 적은 나무패로 고인의 혼을 대신한다.

문묘는 조선초기인 태조 1398년(태조 7)에 만들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소실된 것을 1601년(선조 34)에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육시설인 명륜당과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대성전 등으로 이뤄져 있다.

이곳 문묘나 궁궐, 왕릉 등 옛 선인들이 조성한 유적이나 유산은 클래식 음악처럼 비슷비슷해 지루할 때가 있지만, 그곳에 사는 노거수 나무(老巨樹, 수령 100년 이상의 크고 오래된 나무)들은 왠지 친근하고 가을이 오면 보고 싶어진다. 연초 어른들에게 세배하는 기분으로 찾아갔다. 요즘 노거수 나무보다 못한 어른들이 너무 많아선지 고목나무들을 보는 느낌이 각별했다.

성균관 문묘엔 은행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측백나무, 단풍나무 등이 살고 있다. 모두 수백 살 먹은 고목(古木)이고, 크고 우람한 거목(巨木)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늙고 굽은 데다 외과수술까지 받아서 그런지 돌아가신 내 할아버지, 할머니를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나무들이다.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문묘의 수문장, 고목 은행나무

명륜당 앞 뜰에 사는 탄성이 터져 나오는 노거수 은행나무. ⓒ 김종성


문묘의 익살스런 잡상들. ⓒ 김종성


대부분 나무는 산이나 숲속에서 군락을 이루고 있지만 문묘의 나무는 서로 적당한 거리로 떨어져 사는 독거나무다. 입을 반쯤 벌린 채 노거수 나무를 넋 놓고 바라보는 필자를 흐뭇하게 쳐다보던 나이 지긋한 관리인 아저씨가 문묘에 사는 노거수 나무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문묘에 들어서면 나오는 명륜당은 성균관 유생들의 공부방이었다. 명륜당 앞뜰의 절반 넘는 땅에 장대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살고 있다. 무성한 가지와 잎으로 눈부신 노란 그늘을 드리워 누구나 탄성을 터트리게 하는 나무다. 문묘와 역사를 함께 한 수문장 나무로 천연기념물이기도 하다. 공자의 사당인 문묘는 '문성왕(文聖王)의 묘'의 줄임말이다. 학자가 성인(혹은 군자)에 이어 왕 이름까지 수여받았으니 중국에서 얼마나 존경을 받았는지 알 만하다.

은행나무 또한 원산지가 중국으로 공자와도 인연이 깊다. 공자가 은행나무 단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비롯, 예로부터 공자를 모시는 문묘에 은행나무를 널리 심었다. 유생들이 공부하는 명륜당에서 은행나무를 성균관의 상징이자 학문의 표상으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다. 성균관 대학의 상징 마크 역시 은행잎이란다.
고목 은행나무에서 볼 수 있다는 기형뿌리, 유주. ⓒ 김종성
수 백 살 나이에도 땅을 굳게 움켜진 튼실한 은행나무 뿌리. ⓒ 김종성
문묘엔 모두 네 그루의 노거수 은행나무가 사는데 신기하게 모두 수나무다. 덕택에 이맘 때 은행나무 열매에서 나는 지독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우리조상들은 암수 은행나무를 가려서 심을 줄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암튼 명륜당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은 은행나무 열매 냄새에 시달리지 않고 공부에 정진할 수 있었겠다.

우리나라에서 은행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것은 모두 열아홉 그루로 전통의 인기 수목 소나무를 2위로 제칠 정도로 대접받는 나무다. 천 년을 산다는 은행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팽나무는 4대 장수나무다. 그 가운데 제일의 장수목은 은행나무지 싶다. '늙음은 쇠퇴가 아닌 완성'이란 명언을 몸소 보여주는 나무다.

천연기념물이라 울타리가 쳐져 있어 가까이 가서 보진 못했지만, 마치 종유석처럼 길게 밑으로 자라는 게 나무의 혹처럼 해학적으로 생긴 유주(乳柱, 젖기둥)도 흥미롭다. 수나무라고 하더니 은행나무의 남근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들게 한다. 유주는 오래된 은행나무의 가지에서 땅을 향해 아래쪽으로 자라는 일종의 기형 돌기란다.

명목 노거수 나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네
문묘 대성전 뜰에 사는 노거수 나무들. ⓒ 김종성
우리나라 자생수종인 느티나무의 끈질기고 놀라운 생명력. ⓒ 김종성
명륜당 건너편 대성전으로 들어서면 둔중한 덩치의 노거수 느티나무가 맨 먼저 여행자를 맞는다. 시골 마을 어귀마다 정자마냥 자리하고 있었던 친근한 나무다. 나무 품이 넓고 푸근해 한자어 쉴 휴(休)자의 나무는 느티나무가 아닐까 싶다. 이 나무 앞에서 동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서 영목(靈木) 혹은 신목(神木)이라 추앙 받기도 한다.

그래서 봄에 느티나무에 싹이 풍성하게 잘 트면 풍년이 들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여겼단다. '느티'라는 나무 이름에서 느껴지듯 한반도에서 살아온 자생수종이라 그런지 더욱 정감이 간다. 한국의 4대 장수나무 중 은행나무와 회화나무는 중국이 원산지고, 느티나무와 팽나무는 우리나라의 자생 수종이다.

문묘에 사는 느티나무가 놀라운 건, 노화로 인해 몸의 반 이상 외과수술을 받았는데도 주황색으로 물든 단풍잎을 피워내고 있었다. 아직 끄떡없다는 듯 주먹 쥔 모양의 뿌리들이 땅을 굳세게 잡고 있다. 공기와 물과 햇볕을 양분으로 사는 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에 경탄이 나왔다. 은행나무, 소나무에 이어 천연기념물이 많이 지정된(열세 그루) 나무다.
허리는 굽고 지팡이를 짚었어도 푸른 잎이 돋아나는 상록수 소나무. ⓒ 김종성
독특한 수피에 성향도 남다른 측백나무. ⓒ 김종성
뭐니뭐니해도 나무가 인간에게 주는 미덕은 공기 정화다. 사람에게 해로운 이산화탄소를 마시고 다시 산소를 내놓는다. 이와는 반대로 나무가 준 산소를 같이 마시고도 이산화탄소를 너무 많이 내뿜는 어쩌다 어른이 된 권력자와 사익에 눈 먼 주변 공직자들을 보면, 나무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보다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한 어른들로부터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 사회는 망한 사회라고 봐도 무방하지 싶다.

독야청청의 대명사 소나무도 명목 나무로 빠질 수 없다. 철제 지지대에 기대 선 모습이 허리가 굽어 지팡이를 쥔 영락없는 노인의 모습이지만, 높다란 가지에서 자라나는 솔잎은 푸르기만 했다. 소나무는 햇볕 없이는 못사는 대표적인 양지식물이다.

대성전 앞뜰이 햇볕이 잘 들고 비가 많이 와도 물이 잘 빠지는 명당이라 소나무가 이렇게 오래살 수 있다고 관리인 아저씨가 알려줬다. 애국가에 나오는가 하면 국보1호인 숭례문, 보물1호인 흥인지문은 물론 오래된 목조건축물 중 하나인 부석사 무량수전도 소나무로 지을 정도로 한민족과 친한 겨레의 나무이기도 하다.
동서양에서 모두 학자목으로 대접받는 회화나무. ⓒ 김종성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자세로 고사한 나무. ⓒ 김종성
가까이에 같은 상록수인 측백나무와 잣나무가 이웃처럼 살고 있다. 세로로 갈라진 수피가 독특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측백나무는 특이한 성향이 있단다. 모든 나무들이 햇빛을 좇아 동쪽으로 향하는 데 반해, 이 나무만이 서쪽으로 향한다고. 그래서 나무이름 앞에 '기울다'는 뜻의 측(側)자가 들어갔다니 재밌다. 고소하고 영양가 풍부한 잣 열매가 열리는 잣나무도 느티나무처럼 우리나라 자생종으로 영명도 'Korean Pine (한국 소나무)'다.

은행나무 다음가는 장수나무이자 궁궐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회화나무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와 중국 유교문화를 상징하는 나무다. 하늘을 향해 자유분방하게 뻗어나가면서도 수형이 아름답고 품격이 느껴져서인지 학자나무로 통한다.

그래서 예부터 고결한 선비의 집이나 서원, 절간, 대궐 같은 곳에만 심을 수 있었다고. 서양 사람들도 비슷하게 느꼈는지 영문명도 같은 뜻인 '스칼라 트리(Scholar Tree)'다. 회화나무 앞에 가만히 서 있다 보면 반듯하고 인자한 할아버지가 덕담을 들려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성균관 문묘엔 정정한 노거수 나무들이 대부분이지만 뼈대만 남아 죽은 고사목들도 그대로 남아있다. 어느 고사목은 번개를 맞았는지 땅에 쓰러지지 않고 그대로 서서 죽은 모습이 성불한 후 열반에 든 스님 같고, 나무 미이라를 보는 듯했다. 늦은 오후 문묘를 떠나려는 내 발길을 자꾸만 붙잡았다.

덧붙이는 글 | - 찾아가기 : 서울 전철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로 나와 성균관대학 입구 (도보 10분)
- 지난 11월 13일에 다녀 왔습니다.
- 서울시 '내 손안에 서울'에도 송고했습니다.

태그:#성균관 문묘, #소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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