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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처럼 다정한..." 이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한 이석 선생(의친왕의 아들, 사진 왼쪽)과 전북 김제 아리랑문학마을 하얼빈 역사에서 만났다. 기념으로 사진 한 장을 남겼다.
 "비둘기처럼 다정한..." 이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한 이석 선생(의친왕의 아들, 사진 왼쪽)과 전북 김제 아리랑문학마을 하얼빈 역사에서 만났다. 기념으로 사진 한 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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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장편소설 <아리랑>을 기려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화초로 180 일원에 세워진 '아리랑 문학마을'에는 죽산 주재소, 죽산 면사무소, 죽산 정미소 등이 복원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하얼빈 역사까지 건립되어 있어 마치 만주 벌판에 당도한 듯한 기분을 맛볼 수 있다.

하얼빈 역사 뒤에는 기차가 있고,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한 바로 그 순간의 모습이 조형물로 놓여 있어 보는 순간 가슴이 막 뛰어오른다. 게다가 건물 내부에는 독립운동가들의 초상화, 전투 및 항일운동 장면을 그린 기록화, 소설 <아리랑> 속의 지문과 대화 등이 게시되어 있어 여느 문학관보다도 훨씬 높은 역사적 의의를 보여준다.

아리랑문학마을 하얼빈 역사 안에 게시되어 있는 독립만세운동 기록화
 아리랑문학마을 하얼빈 역사 안에 게시되어 있는 독립만세운동 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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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아리랑 문학마을이 조성된 것은 내촌과 외리마을이 소설 <아리랑>의 발원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국에 살지 못하고 만주로 옮겨간 이주민들의 생활 근거지인 너와집과 갈대집도 세워 두었고, 소설속 인물들인 감골댁, 송수익, 지삼출, 손판석, 차득보 등의 집도 실제 가옥 크기로 지어 두었다. 동학혁명에 가담한 남편의 빚 때문에 아들이 하와이로 팔려간 뒤 감골댁은 만주로 이주하지만 끝내 일본군에게 피살된다.

나라를 빼앗긴 선조들은 그토록 고생했지만, 살아남은 후손들 중 하나인 나는 한 끼라도 건너뛰면 배가 허리에 붙는다. 그래도 아리랑문학마을 끝에 있는 내촌마을회 직영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것으로 나름의 위안을 삼고자 한다. 사실은 마을 주민들이 직접 재배한 콩으로 만든 두부 요리를 즐기는 재미가 쏠쏠하다. 두부 돈까스, 두부 전골, 순두부가 주요리인데, 역시 주민들이 직접 재배한 울금으로 만든 울금막걸리도 곁들일 수 있다. 게다가 식당 바로옆 건물에서는 두부 만들기 체험도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고대의 3대 저수지 중 한 곳인 벽골제

아리랑 문학마을에서 불과 2km 거리에 벽골제가 있다.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에 있는 벽골제는 330년(백제 비류왕 27)에 축조된 거대 제방이다. 제천 의림지, 밀양 수산제와 더불어 우리나라 고대의 3대 저수지로 유명한 벽골제는 사적 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도 약 3km에 이르는 제방이 남아 있고, 장생거와 경장거로 추정되는 두 곳의 수문 터가 남아 있어 훌륭한 역사여행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수문 중 하나인 장생거 터와 벽골제 제방 위로 맑은 가을 하늘이 보이는 풍경
▲ 벽골제 제방과 수문 중 하나인 장생거 터 수문 중 하나인 장생거 터와 벽골제 제방 위로 맑은 가을 하늘이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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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생거 왼쪽에 있는 중수비는 1415년(조선 태종 15) 신털미산에 처음 세워졌다. 벽골제는 790년(신라 원성왕 6), 1143년(고려 인종 21), 1415년 등 네 차례에 걸쳐 개축되었는데, 1429년(세종 2)에 홍수를 만나 크게 무너졌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파괴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25년으로, 일제는 농지 관개용 수로를 개설하면서 둑 가운데를 파괴해 버렸다.

벽골제(碧骨堤)라는 이름은 한자의 뜻으로만 보면 푸른 뼈로 쌓은 둑이라는 의미이다. 못둑을 축조할 때 말의 뼈를 묻으면 자연재해가 있어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도사의 말씀에 따라 무수히 많은 말을 죽여 그 뼈를 제방 안에 넣었는데, 말뼈의 인에서 나온 푸른 빛으로 제방이 푸르게 보인다고 하여 뒷날 벽골제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제의 옛 지명으로 볼 때 그런 추측은 민간의 자의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김제의 마한 시대 지명은 벽비리국이었다. 백제 때는 벽골군이었다. 원래는 도향(稻鄕), 즉 벼(稻)가 많이 생산되는 골(鄕)이라 하여 벼골로 불렸는데, 한자로 옮겨지면서 벽골로 변했다고 보는 것이다.

호남평야는 전남이 아니라 전북에 있다

아무튼 벽골제가 완성되면서 호남(湖南)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호남은 호수의 남쪽 지역이라는 뜻인데, 이때의 호수는 벽골제를 가리킨다. 벽골제가 워낙 거대하다 보니 사람들은 벽골제 위와 그 아래 지역을 구분하게 되었고, 호남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흔히 호남이라면 전남을 떠올리지만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호남은 전북 일원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따라서 호남평야 역시 전북 일원이다. 전남 일대의 평야는 보통 나주평아라고 부른다. 나주평야의 면적은 550㎢로, 호남평야 1850㎢의 29.7%밖에 안 된다.

2016년 9월 29일부터 10월 3일까지 진행된 제18회 김제 지평선 축제의 일부 모습(김제시 누리집 사진)
 2016년 9월 29일부터 10월 3일까지 진행된 제18회 김제 지평선 축제의 일부 모습(김제시 누리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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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골제 답사자는 벽골제 제방, 수문 터인 장생거, 중수비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서 '조정래 대하소설 아리랑 문학비'를 만나게 된다. 작가는 "김제 들판은 한반도 땅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이루어내고 있는 곳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김제시는 해마다 '지평선 축제'를 연다. 올해로 벌써 18회째 열었는데, 4년 연속으로 문화관광부 지정 '대한민국 대표 축제'로 지정되었다. 축제는 끝났지만 지금도 누리집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 행사에 못 가본 사람들을 잘 달래준다.

그런데 전북 일원에는 호남 평야의 지평선에 거의 준하는 지평선이 한 곳 더 있다. 2010년 세계 최장 방조제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새만금 방조제가 낳은 지평선이다. 새만금홍보관(부안군 변산면 새만금로 6)에 당도하여 그 지평선을 본다. 무려 409㎢(토지 209㎢, 담수호 118㎢)나 되는 면적이니 지평선에 버금가는 풍경이 탄생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평선만이 아니다. 홍보관에서 출발하여 새만금 방조제 33.9km를 타고 시원하게 달리노라면 수평선도 볼 수 있다. 고군산군도로 향하는 33.9km 도로는 왼쪽으로 수평선을 보여주고, 오른쪽으로 새만금벌판을 넘어 호남평야로 연결되는 지평선을 보여준다.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 아득한 수평선과 광활한 지평선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이곳 새만금, 우리나라 안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을 오늘 하루 느끼고, 또 즐긴다.

바다를 가로질러 고군산도, 그리고 군산까지 이어지는 새만금 제방
 바다를 가로질러 고군산도, 그리고 군산까지 이어지는 새만금 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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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에 본 새만금홍보관 옆 작은 공원의 '신석정 시비'에는 시인의 시 '파도'가 새겨져 있었다. '이대로 / 차마 이대로 / 눈 감을 수도 없'어서 '소나무 성근 숲 너머 / 파도 소리가 / 유달리 달려드는' 정경을 시인은 노래했다. 방조제 위에서 서쪽 바다를  바라보니, 문득 시인의 지혜로운 감성에 감복이 된다. 놀빛을 받은 파도가 나를 향해 달려드는데, 마치 나를 꾸짖는 것만 같다.

그렇게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어릴 때 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신석정 시인의 시 '작은 짐승'이 떠올랐다.

란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란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란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란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란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작은 짐승' 시를 생각하며 청소년기를 회상하는 중에 어느덧 버스가 신시도에 당도했다. 최치원이 크게 깨달은 바 있는 대각산 정상에 가면 이 주변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정자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은 없고 일행은 많아 그렇게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음에 오면 반드시 대각산에 올라야지, 하고 다짐하며 도로 건너 바닷가에 조성되어 있는 전망 장소로 간다.

새만금홍보관에서 방조제를 타고 바다 안으로 들어가며 본 고군산도 풍경
▲ 고군산도 새만금홍보관에서 방조제를 타고 바다 안으로 들어가며 본 고군산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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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어둑어둑해진 탓인가, 기러기 떼가 줄지어 하늘을 날고 있다. 어디로 저렇게 무리를 지어 이동하고 있는 것일까. 일사분란하지만 그래도 조금 뒤떨어져 날고 있는 놈도 보인다. 나는 문득 '란이'가 내 옆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때 여행을 이끌고 있는 대장의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빨리 오세요. 무녀도로 출발합니다!"

무녀도?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와 무슨 연관이 있는 섬이란 말인가? 호기심을 품으며 나는 버스로 달려갔다.

고군산도 중 하나인 무녀도에서 본 풍경. 물이 빠지면 곧 작은 섬과 등대까지 땅이 이어질 기세이다.
 고군산도 중 하나인 무녀도에서 본 풍경. 물이 빠지면 곧 작은 섬과 등대까지 땅이 이어질 기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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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새만금, #아리랑문학관, #조정래, #벽골제, #하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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