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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밖에서는 거의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고,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던 아웃사이더 대통령의 당선으로 세상이 깜짝 놀라고 있다. 비록 총 득표수에서는 힐러리가 더 많지만, 미국식 선거제도인 대통령 선거인단을 트럼프가 많이 얻었으니 트럼프가 이긴 것이 확실하다.

미국의 아웃사이더 대통령 탄생만큼이나 지금 전세계가 주목하는, 놀랍고도 우스꽝스러운 정치적 사건이 바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불리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위기인 것 같다.

대통령 하야나 탄핵하면 더 큰 혼란? 그럼 미국은 벌써 망했다!

학생과 시민이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2차 범국민대회'에 참석해 '최순실 게이트'로 불거진 국정농단을 규탄하며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고 있다.
▲ "새누리당도 공범이다" 학생과 시민이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2차 범국민대회'에 참석해 '최순실 게이트'로 불거진 국정농단을 규탄하며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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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촛불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12일에는 전국에서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서울로, 광화문으로 모일 것이라는 예상이다. 정치인도, 친인척도, 공직자도, 그렇다고 전문가도 아닌 '강남 아줌마'에게 나라 운영을 맡긴 결과이다.

'무당 대통령', '사이비 종교에 빠진 대통령'이라는 비아냥 섞인 패러디가 쏟아진다. 여론조사 결과는 대통령 지지율이 5~10% 정도밖에 안 된다. 국민 10명 중에 1명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국민들의 마음 속에서는 이미 "탄핵 당한 대통령"이라 해도, '박근혜, 대통령 아님 통보'를 받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런데, 민주당 등 야당뿐 아니라 국민들 일부는 대통령의 자격을 상실한 건 맞지만 대통령의 하야나 탄핵에 반대하기도 한다. 이유는 "헌정중단으로 더 큰 혼란이 올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 두려움 역시 나라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마음의 발로로 좋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이 무슨 신정정치나 절대왕정 시대도 아니고, 아니 그 시대라고 하더라도 그건 아닌 듯하다. 대통령 국가에서 대통령에게 유고가 생기면 나라가 망하나?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수상(총리)이 물러나면 헌정이 중단되는 건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어떤 대통령제 국가도, 의원내각제 국가도 대통령이나 수상의 급작스런 유고로 나라가 망하거나 민주주의가 중단되지는 않는다. 지도자 한 사람의 갑작스런 유고로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긴다면 그건 민주국가가 아니라 독재국가, 전제국가였다는 증명 아닌가?

미국 대통령의 예상치 못한, 임기 중 유고(有故) 사태의 역사를 한번 살펴보자.

제9대 대통령 윌리엄 해리슨은 1841년, 제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는 1850년 각각 급성폐렴과 콜레라로 병사했다.

노예해방의 영웅인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1865년, 제20대 대통령 제임스 가필드도 1881년, 제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는 1901년, 각각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제29대 대통령 워런 하딩은 1923년 심장마비,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도 1945년 뇌출혈로 각각 병사했다.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1963년 총격으로 사망했으며, 37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974년 워터 게이트 사건으로 탄핵의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1789년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후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44명이 대통령 자리에 올랐는데, 9명이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링컨이나 케네디처럼 총격으로 사망한 경우도 있고, F.D 루스벨트나 해리슨처럼 병사한 경우도 있으며, 닉슨처럼 스스로 사임한 경우도 있다.

미국 역대 대통령 5명 중 1명은 임기 중 대통령 자리에 궐위가 발생했다는 의미이다. 우리 정치인들의 표현을 빌리면 '헌정 중단'이다. 그러면 미국은 (최소) 9번이나 헌정이 중단되었는데, 그런 미국이 망하기라도 했는가?

망하지 않았다. 오늘 새로운 대통령의 당선에서 보듯, 미국은 그 자리에 그렇게 있다. 미국 헌법에 따라서 대통령의 유고시 부통령이 그 자리를 대신할 뿐이다. 대통령에게 유고가 생겼다고 망할 나라면 그건 나라도 아니다. 대통령이 물러난다고 헌정이 중단되면 그건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도 없다.

의원내각제 국가는 어떤가? 얼마 전 영국이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EU 탈퇴가 통과되자 책임을 지고 내각 수반인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스스로 물러났다. 그렇다고 영국이 헌정이 중단되고 망했나? 왕조국가인 태국에서조차 왕이 갑자기 죽었다고 태국이 망했다고 하지 않는다.

물론 브렉시트에 대한 찬반은 있을 수 있지만,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캐머런 총리를 보면서 영국 민주주의가 중단되었다고 하지는 않는다. 절차를 거쳐 테레사 메이라는 새로운 총리가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영국 민주주의는 계속되고 있다.

대통령제와 더불어 현대 민주주의의 대표적인 형태인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임기 중 수상 또는 총리가 물러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다수당 내에서 총리만 바꾸기도 하지만 아예 선거를 다시 하는 경우도 있다. 심한 경우에는 1년에 선거를 몇 번을 다시 하기도 한다. 그래도 안 망한다. 대통령이든 수상이든 물러난 만한 이유가 있으면 물러나는 것이다. 이게 민주주의다.

무엇이 진짜 헌정중단이고, 민주주의를 혼란에 빠트리는 것인가?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태로 퇴진 요구를 받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이 8일 오전 정세균 국회의장과 면담한 뒤 국회의사당을 떠나고 있다.
▲ 국회 떠나는 박근혜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태로 퇴진 요구를 받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이 8일 오전 정세균 국회의장과 면담한 뒤 국회의사당을 떠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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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도 미국의 헌정과 민주주의가 9번이나 중단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어느 누구도 의원내각제 국가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나라가 혼란스러워진다고 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렇게 취약한 민주주의를 왜 인류가 피를 흘려서 만들었겠는가?

현재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 나라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APEC 정상회담에 불참한다고 발표했다. 대한민국 헌법 제88조에 의하여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심의하는 최고 헌법기구인 국무회의는 몇 달째 제대로 진행도 안 된다. 국무회의 의장인 대통령은 참석도 못하고 있다. 나아가 총리도 임명하지 못하고 있으며, 장관 하나도 제대로 바꾸지 못하는 상황이다.

밖으로는 국제 정상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안으로는 국무회의도 못 하고, 총리나 장관 같은 국무위원 임명도 제대로 못한다. 그러나 당연히 새로운 국가 정책 제시는커녕 진행 중인 정책의 추진에도 힘이 실릴 리가 없다. 이게 진짜 헌정 중단이고, 민주주의를 혼란이다. 이런 게 진짜 무정부 상태 아닌가? 이것보다 더 큰 정치적 혼란이 또 무엇인가?

이러니 대통령이 물러나는 것 때문이 아니라 대통령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자체가 헌정중단이고 민주주의 혼란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미국 대통령이 임기 중에 유고가 생기면 부통령이 대신하듯이, 영국 수상이 임기 중에 유고가 생기면 총리를 바꾸듯이 우리나라는 (부통령이 없으므로) 총리가 대행하다가 다음 대통령을 뽑으면 된다. 이것이 또한 민주주의고, 헌법과 법률을 만든 이유다.

모두 물러나면 누가 나라 일 하냐고? '친일파와 패주 선조의 논리!'

아무런 대비 없이 토요토미 히데요시 왜(倭)의 침략을 받은 선조 임금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간다. 그를 잡겠다는 왜군이 대동강에 이르자 그는 명나라로 가겠다고 압록강을 건너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우스꽝스럽게도 명나라에서 거부하여 압록강을 건너지 못한다.

당시 선조의 논리는 '조선의 왕인 내가 잡히면 조선이 망한다. 어떻게 하든 일단 왕이 살아야 조선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봉건왕조시대에 있을 수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왕의 급작스러운 유고 때문에 망한 왕조는 별로 없다. 왕도 인간이기에 날짜를 정해 두고 죽지는 않으니까 사실 왕의 급작스러운 유고는 왕조시대의 숙명이다. 왕조시대에도 플랜B가 존재한 이유이다.

백성이야 어찌되든, 국토야 어떻게 망가지든 '왕이 살아야 나라가 있다'는 그 선조의 주장과 지금 집권세력의 "대통령이 있어야 헌정중단을 막고 나라의 혼란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 얼마나 다른 것인지 잘 모르겠다.

멀리 임진왜란의 선조까지 갈 것도 없고 우리 현대사에서도 이 논리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바로 친일파들의 논리다. "친일파라고 모두 다 처벌하고, 모두 다 그만 두면 나라는 누가 운영하냐?"면서 친일 청산을 반대했던 자들의 논리와 판박이로 닮았다.

그 선조와 친일파의 계승자들을 우리는 현대 정치권 곳곳에서 목격하고 있다. 어떤 비리를 저질러도 재판에서 형이 확정되어 쫓겨나기 전에는 "도정(시정)의, 교육계의 안정"을 위하여, "찍어준 주민의 대의"를 위해 꿋꿋이 자리를 지킨다는 저 정치모리배들이 바로 그들이다.

선조가 침략 왜군과 싸우다 유고가 생겼으면 세자인 광해가 왕이 되면 된다. 그 뒤의 조선의 운명은 선조의 몫이 아니라 광해와 남은 자들의 몫이었을 것이다. 친일부역자들이 자신의 민족반역 행위에 대해서 책임지고 물러난 후 나라가 어찌 되었을지는 역시 남은 사람들의 몫이지 친일파들이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역사는 그런 것 아닌가? 그들이 하는 나라 걱정, 그런 나라 걱정은 안 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었음을 역사는 우리들에게 증명하고 있다.

질서 있는 퇴장?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자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미르·K스포츠 재단의 강제 모금과 청와대 문건 유출 등 국정 개입 의혹을 받고 있는 최순실씨가 10월 3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소환조사에 앞서 취재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검찰 포토라인에 선 최순실 미르·K스포츠 재단의 강제 모금과 청와대 문건 유출 등 국정 개입 의혹을 받고 있는 최순실씨가 10월 3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소환조사에 앞서 취재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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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대통령의 유고가 바람직한 일도 아니고 자주 일어나야 하는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일어나지 말라고 일어나지 않는 일도 아니다. 대통령이 잘못했으면, 자격이 없으면, 국민에게 버림받으면 물러나는 것이 또한 민주주의다. 그 다음은 다음 사람들의 몫이다.

지금의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뭐라고 해도 믿을 국민이 별로 없다. 철학자 니체의 말처럼, 대통령의 거짓말 자체보다 더 이상 대통령의 어떤 말도 믿을 수 없게 된 것에 분노한다. 이것이 더 이상 현 집권 세력이 국민을 대변할 수 없게 된 진짜 이유이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가?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기 혼자서, 자기 마음대로 해야한다는 대통령의 아집에서, 단 한 사람과만 소통했던 대통령의 불통 때문 아닌가? 교복입은 중고생들이 교내에 대자보를 붙이고,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직접 거리에 나섰다.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대통령을 비아냥거린다. 유모차를 끄는 엄마들이, 아이를 목마태운 아빠들이 거리에 나섰다.

이 정도면 정말 깨달아야 한다. 그 자리에서 내려와 자연인으로 돌아가 자신의 운명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 18대 대통령이 해야할 일이 아닐까?

지금은 신정정치시대도 아니고, 봉건왕조시대도 아니고, 왕권신수설의 절대왕정시대도 아니다. 탱크와 총부리로 국민을 협박하던 군사독재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다. 어느 거리에 붙어있는 현수막의 내용처럼 계엄령을 선포하는 순간 대통령 박근혜의 운명뿐 아니라 자연인 박근혜의 운명도 끝나는 것이다. 여소야대의 국회가 계엄령을 동의해줄 가능성도 없다.

이제 박근혜 대통령의 선택지는 별로 없는 듯하다.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자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는 것이 그 선택지인 듯하다. 그나마 마지막으로 박수 받으며 떠나는 길은 이것 하나밖에 없어 보인다. 마지막 고별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으면 좋지 않을까?

"국민의 뜻을 받들어 이제 모든 것을 책임 지고 떠나려 합니다. 국민이 차기 대통령을 선택할 때까지 새로운 총리가 중심이 되어 '순실왕조실록'으로 비판받는 국정교과서는 중단하고, '2년 내 북한 붕괴'라는 예언 때문에 문 닫은 개성공단도 다시 열고, 군사독재시대에나 있었던 전교조 법외노조화와 통합진보당 해산 같은 것도 되돌리는 걸 검토해 주세요. 저는 떠납니다."


태그:#박근혜, #최순실, #탄핵,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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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육에 관심이 많고 한국 사회와 민족 문제 등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글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가끔씩은 세상 사는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고 싶어 글도 써 보려고 합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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