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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 은에게! 상투적인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아빠는 너를 많이많이 사랑한다. 그리고 너의 미래를 진심으로 응원하며 네가 행복해지기를 바라왔다.

오늘 새삼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4년 전 너에게 아빠의 생각을 강요했던 일이 생각나서다. 너도 기억하고 있겠지만 2012년 12월 18일 저녁 우리 가족은 다음날 있을 대통령선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었다.

자기주관이 확실하고 적당히 고집스러운 너는 B후보가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지. 그때 아빠는 군인으로 30여 년을 살아온 경험을 들먹이며 분단 상태의 우리나라 안보를 굳건히 하고 경제를 살려 국민들의 살림살이를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박근혜 후보를 찍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그러면서 박근혜 후보에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DNA가 흐르고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이야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너는 다음날 너의 뜻과는 다른 선택을 했고 그렇게 박근혜 후보는 우리나라의 18대 대통령이 되었다.

2012년 12월 19일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당선이 확실시된 상황에서 꽃다발을 들고 있다.
 2012년 12월 19일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당선이 확실시된 상황에서 꽃다발을 들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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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채 4년도 안 돼서 원칙과 신뢰로 자신을 포장하고 대통령 직을 수행해온 박근혜 대통령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는 놀랍게도 이제까지 세간에 떠돌았던, 나를 포함한 많은 국민들이 사실이 아니기를 기대했던 소문들이 모두 사실임을 고백했다. 그야말로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원칙이라는 말은 자신의 고집을 실현시킬 때만 사용하는 구두선에 불과했으며, 신뢰라는 말은 자신을 공주로 떠받들며 아첨을 일삼았던 몇몇 사인(私人)에게만 적용되는 특권이었다는 것을 실토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은 '최순실 게이트'라 쓰고 있지만 많은 국민은 그것을 '박근혜 게이트라 읽고 있다.

대통령 퇴진 집회에 같이 가자던 딸

어제 너는 나에게 박근혜 퇴진 집회에 같이 참석하자고 했다. 나는 '대통령이 퇴진하고 헌정 중단사태가 되면 대한민국이 더 큰 혼란에 빠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의 국민들이 더욱 힘들어질 것'이라는 이유를 대며 너의 제안을 거절했다.

너도 지지 않고 '그럼 국민에게 위임받은 최고의 권력을 사유화하고 국가 시스템을 붕괴시킨 대통령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계속해서 권력을 행사하려는 것을 보고만 있을 거냐고' 나에게 따지듯 물었다.

아빠는 너의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그저 박근혜 대통령에게 소중한 한 표를 던진 일을 후회하며 반성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부녀 사이마저 갈라놓는 대통령이 너무 미웠다.

은아! 아빠는 지난 대통령선거 때 가족들에게까지 올바르지 않은 선택을 주장했던 것에 대해 한없이 반성하고 있다. 그리고 '대통령이 잘못했을 때 그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은 국민뿐이며 그 책임의 형태는 대통령의 직무를 그만두게 하는 것뿐'이라는 너의 주장을 반박하며 퇴진집회에 참석하려는 너를 만류한 것을 후회한다.

아빠로서는 우리나라가 안정된 상태에서 선진국으로 발전하여 국민의 한사람인 너도 풍요롭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에서 했던 행동인데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했으니 미안할 뿐이다.

아직도 너를 철부지 같은 어린애로 취급하고 있는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다. 이제까지 상명하복의 가치를 가족들에게 주입시키며 잘못된 행동이나 선택에 대해 사과 한번 하지 않은 나에게 반성문까지 쓰게 만든 무능하고 무책임한 대통령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그래. 네 말이 옳았다! 많은 국민들이 '이게 나라냐?'고 묻고 있는데 대통령은 사과 대신 변명만 늘어놓고 있다. 자존심을 송두리째 짓밟힌 국민들을 위로해줘야 할 대통령이 자신의 신세타령만 하며 국민들의 위로를 받으려 한다.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라는 말을 들으며 정말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을 뽑았다는 생각을 했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정상적인 국가운영을 기대했던 것이 애당초 무리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난 4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담화 발표 생중계를 여의도 정치권에서 지켜보고 있다.
▲ 이목 집중된 박 대통령의 대국민담화 지난 4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담화 발표 생중계를 여의도 정치권에서 지켜보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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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잘못을 단죄하고 국민이 위임한 대통령의 권한을 정지시킬 수 있는 사람은 국민밖에 없다'는 너의 주장에 동의한다. 대통령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집어던졌는데 아직도 '대통령의 권위'를 생각해 잔여임기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스스로 집어던진 사람은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그나마 명예로운 길이라 생각한다.

나아가 대통령의 지근 거리에서 대통령을 보좌한답시고 자리만 지키고 있었던 청와대와 새누리당에 포진한 간신들 또한 응징해야 한다. 대통령과 독대한번 못한 정무수석이 한일이 무엇이고 핵심 국가보안시설인 청와대의 보안과 경비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한일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국가나 국민이 아닌 대통령 개인에게 충성한 대가로 권세를 누려온 정치인들 또한 이 기회에 쓸어내야 한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았으니 직무유기죄에 해당하거나 국정운영을 농단하는 비선실세들의 눈치만 보며 권세를 유지하고 재산을 축적했으니 간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국회에서 특별법을 제정하여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축적한 재산은 환수해야하고 기간 중 받았던 국록이나 서훈 등도 모두 반환 받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너의 주장에 공감한다.

역설적으로 박근혜 게이트는 대한민국을 발전시킬 기회라고도 생각된다. 권력구조를 포함해 국가시스템을 개조할 기회이고 부정한 방법으로 부와 권력을 얻은 쓰레기 같은 기업인, 정치인들을 솎아낼 기회이기도 하다. 이제까지 켜켜이 쌓여온 구태의 먼지를 쓸어낼 기회다.

박근혜정부가 들어선 이후만 해도 얼마나 많은 부조리와 부정부패가 있었는가? 머지않아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낼 세월호가 밝혀줄 진실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얼마나 부조리한 세상인지 웅변으로 말하고 있다.

정운호로 시작하여 홍만표, 최윤정, 진경준으로, 그리고 대미를 장식한 최순실 사태를 보면서 우리 사회에 정의라는 말이 있기나 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야말로 대한민국에도 정의가 살아있음을,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너와 함께 소망한다.

꼴보수 아빠도 이제 변하려 한다

평생을 군인으로서, 보수의 가치를 지향하고 정부정책을 옹호하던 아빠가 갑자기 너보다 더 강한 어조로 대통령을 비판하고 진보주의자 같은 주장을 펼치는 모습에 네가 적잖이 당황할 것 같구나. 얼마 전에 있었던 전역식의 의미를 아빠는 군인에서 시민으로 변신하는 의식이라 생각했다.

평범한 시민이 되고 싶었던 아빠에게 너는 '시민의 교양'이라는 책을 선물했었지. 그 책의 내용 중 '평생 한 가지 정치적 성향만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시민은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에 크게 공감했다. 아빠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된 가치를 추구하고자 마음먹었다.

이제까지 인생 경험을 토대로 무엇이 옳고 무엇이 바람직한 일인지 판단하고 행동하리라 결심했다. 그래서 며칠 전에는 이제까지 터부(?) 시 해왔던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 학교'에도 등록했다.

글 쓰는 인권운동가 고상만 선생이 지도하는 '고상만의 글 잘 쓰는 법'이라는 강좌인데 본인이 시민운동가로 활동하게 된 계기, 생활 속에서 글감을 찾는 요령, 고발기사를 훈훈한 느낌으로 쓰는 요령 등을 자신이 실제 기고한 사례들을 들어서 쉽고 재미있게 강의하기 때문에 매주 월요일 그 시간이 기다려질 정도다.

강의 첫날 수강동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좌우의 균형된 시각을 갖고 싶어서'라고 솔직히 이야기했다. 글을 쓴다면 어떤 기조를 유지하고 싶냐는 질문에는 '함께 어울려 앞으로!'라고 했는데 아직까지 군대 물을 빼지 못하고 군대식 구호를 쓴다는 생각이 들지 않니?

강의 중에 '당신의 펜을 벼리고 벼린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제까지 두루뭉술했던 펜을 벼리고 벼려서 작으나마 세상을 바꿔 가는 글쓰기 공부를 하려 한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너도 아빠의 도전을 응원해 줄 거지?

작게나마 세상을 바꿀 수 있었으면...
 작게나마 세상을 바꿀 수 있었으면...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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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과 행동을 바꾸고 나니 너에게 '반성문'을 쓸 용기가 생겼다. 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지 않니? 반성문을 쓸 때는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해야하지만 그래도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네가 보기엔 여전히 꼴보수의 모습으로 비칠까 염려되는 말이지만 너도 생각해줬으면 한다.

너는 '대통령이 물러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입장인데 아빠는 '대통령이 물러나기 전후의 상황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헌정중단 사태가 일어나면 우리나라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것이고 안 그래도 피폐해진 국가경제의 추락으로 국민들의 삶이 더욱 악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박근혜 대통령이 물러나되 그 전후의 상황을 관리할 거국중립내각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앞으로 상황에 따라 비상시국이라든지 통치행위라는 명분의 비상계엄 등의 조치도 예상할 수 있는데 이를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향후 민의를 반영한 개헌이나 조기대선 등을 공정하게 관리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아빠의 고민에 대해 너의 생각은 어떠한지 궁금하구나.

아빠는 아직도 철부지라고 생각했던 네가 건강한 시민이 되어 올곧은 뜻을 떳떳하게 주장하는 모습을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앞으로 더욱 너의 뜻을 존중하고 배울 것은 배울게.

너 역시 아빠의 반성을 받아주었으면 좋겠다. 너를 사랑하고 너의 행복을 응원하는 아빠의 진심도 믿어주기 바란다. 이 글을 쓰면서 대통령도 이런 반성문을 한 번이라도 직접 써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통령이 진심어린 반성을 하지 않는다면 다음 퇴진집회에서 아빠도 너와 같이 촛불을 밝힐 것을 약속할게.

잘못 뽑은 대통령의 무능과 무책임으로 나라가 휘청거리고 있지만 지난번 광화문 집회 등에서 보여준 성숙하고 저력 있는 국민들이 우리나라를 반듯하게 일으켜 세울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2016.11.7. 변신 중인 아빠가

'비선실세' 최순실 국정농단에 분노한 수만명의 시민들이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박근혜 하야”를 촉구하는 촛불집회를 마친 뒤 경찰 저지선을 뚫고 청와대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 "하야하라!" 시민들 사이에 태극기 '비선실세' 최순실 국정농단에 분노한 수만명의 시민들이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박근혜 하야”를 촉구하는 촛불집회를 마친 뒤 경찰 저지선을 뚫고 청와대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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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꼴보수, #박근혜, #최순실, #반성문, #촛불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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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동안 입었던 군복을 벗고 사회 초년병으로 살고 있음. 군대에서 경험하지 못한 인권문제, 봉사활동, 인문학 등에 관심을 가지고 제 2의 인생을 가꾸어 가는 중. 다문화 사랑방을 운영하는 인생 3모작을 꿈꾸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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