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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5월, 일본 <아사히신문> 한신지국. 정체불명의 괴한이 침입해 엽총을 난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불행하게도 현장에 있던 두 명의 기자가 괴한의 총에 맞았고, 그중 한 명은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오시리 지히로. 향년 29세였다.

사건 발생 직후, 스스로를 배후라고 밝힌 단체가 성명을 보내왔다. 세키호타이(赤報隊)라는 극우 단체였다. '일본 국내외에 우글거리는 반일분자를 처형하기 위해 결성된 실행부대'를 자처하며 "모든 아사히 사원들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반일분자에겐 극형이 있을 뿐이다"라고 밝혔다. 그들은 왜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면서까지 무고한 생명을 앗아야만 했을까.

오시리 지히로 기자는 재직 당시 재일교포의 인권 문제를 집중적으로 취재했던 기자였다. 당시 일본 사회는 재일 한인교포들에 대한 차별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시리 기자는 이들의 인권 향상을 위해 펜을 무기로 일본 사회와 싸워왔다.

일본 극우 세력에게 오시리 기자의 이런 행태는 눈엣가시였던 것. '아사히신문 총기 난사 사건'은 극우 세력의 위협이 상당히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진실만을 보도해야 하는 언론을 크게 위축시킬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위안부 보도 기자, 살해협박 받는 까닭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 책 표지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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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리 기자가 비명에 간 지 내년이면 꼭 30주년을 맞는다. 그런데 지금 일본에서는 또 한 명의 언론인이 극우 세력의 살해 협박을 받고 있다.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다. 공교롭게도 그는 30년 전 살해당한 오시리 기자와 입사동기였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극우 세력의 표적이 되었을까?

우에무라는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의 증언을 보도한 기자다. 위안부의 존재는 전쟁범죄를 부정하고 과거 군국주의 시절의 일본으로 회귀하려는 극우 세력들에겐 걸림돌이나 다름없다. 이들은 그가 쓴 위안부 기사를 '날조 기사'라며 강력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날조 기자로 낙인찍힌 그는 무너지기 직전까지 몰렸다. 교수 임용이 취소되고, 고등학생인 딸까지 살해 협박을 받았다. 자신의 가족까지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그는 반격을 시도했다.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 이 책은 바로 20년 동안 이어진 그리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일본 극우세력과의 분투기인 셈이다.

"<아사히신문> 기자였던 나는 젊은 시절에 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기사로 지난 2년 반 동안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세력들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고 있다. ...이 책은 우에무라 공격의 기록과 그에 대한 반증 등 투쟁의 기록이다. 또한 내가 지금까지 한국과 맺어온 관계를 담은 자서전이기도 하다" - 한국어판에 부쳐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의 증언을 보도하다

1991년 8월, 평소 한국에 관심이 많았던 저자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결정적 증언을 입수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서울로 달려갔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측에서 조선인 위안부 출신 할머니의 증언을 녹음한 테이프를 들려줬다. 테이프 속에서는 "어떻게든 잊고 살자고 생각했지만, 잊을 수가 없다",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지고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는 생생한 육성 증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테이프를 들었던 날의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일중전쟁(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쟁터에서 일본인 병사의 성적 상대가 되도록 강요당한 위안부. 이들 가운데 다수의 조선인 여성이 있었지만, 전후 한국에서 그 체험을 말한 이는 한 명도 없었다" - p.50

테이프를 청취한 저자는 곧바로 <아사히신문> 오사카 본사판에 위안부의 증언 소식을 보도했다.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 / 전 조선인 종군위안부 / 전후 반세기 만에 무거운 입을 열다 / 한국 단체가 청취조사"라는 제목의 단신 기사였다. 그가 쓴 기사는 이튿날인 8월 11일 <아사히신문> 오사카 사회면 톱으로 실렸다. 이 기사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통틀어 위안부의 증언을 최초로 보도한 기사였다.

저자에 따르면, 보도가 나간 지 3일 뒤인 8월 14일, 테이프 속 할머니는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최초의 위안부 증언자인 김학순 할머니였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에 용기를 얻은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도 하나 둘 증언을 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위안부의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 역사적 순간이었다. 저자는 바로 그 역사적 현장을 최초로 보도한 기자였다.

처음으로 위안부임을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의 인터뷰 기사. 1991년 8월 15일자 경향신문에 게재됐다. 우에무라 다카시의 기사는 이보다 4일 전에 먼저 보도됐다.
 처음으로 위안부임을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의 인터뷰 기사. 1991년 8월 15일자 경향신문에 게재됐다. 우에무라 다카시의 기사는 이보다 4일 전에 먼저 보도됐다.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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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세력의 공격이 시작되다

극우세력이 이를 그냥 두고 봤을 리 없다. 책에 따르면, 니시오카 쓰토무(현 도쿄기독교대학 교수)는 월간 <문예춘추> 1992년 4월호를 통해 '중대한 사실 오인'이 있다고 (저자가 쓴 기사를) 비판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니시오카는 저자가 위안부를 '정신대'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조차 정신대와 위안부의 용어가 확실히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는 당시 한·일 양국 언론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표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20년도 훨씬 지난 2014년 1월, <주간문춘>에 "'위안부 날조' 아사히 신문 기자가 아가씨들의 여자대학 교수로"라는 기사가 실린 것. 20여 년 전, 저자의 기사를 '중대한 오인'이라며 비판했던 니시오카 교수가 이번에는 아예 '날조'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비판의 수위를 높였다.

"우에무라 기자는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쟁터에 연행됐다'고 기사에 쓰고 있지만, 정신대라는 것은 군수공장 등에 근로동원된 조직으로 위안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게다가 이때 신분을 밝힌 여성은 (일본 법정에 제출한) 소장에 부모가 자신을 팔아서 위안부가 됐다고 적고 있고, 한국 신문의 취재에도 그렇게 답하고 있다. 우에무라 씨는 그런 사실은 언급하지 않고 강제연행이 있었던 것처럼 기사를 쓰고 있어, 날조 기자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 p.21

<주간문춘>의 기사를 시작으로 <산케이>, <요미우리> 등 일본의 주요 언론들이 20년도 더 된 저자의 기사를 들춰냈다. 해당 기사를 보도했던 <아사히신문>조차 대응에 소극적이었다. 기사 날조는 기정사실인 것처럼 일본 사회에 퍼져나갔다.

언론인에게 날조 기자란 낙인은 치명적이다. 더 이상 펜을 들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천상 언론인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던 저자에게 이보다 더 치욕적인 순간이 또 있었을까.

"날조라는 말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왜곡하는 것. (없는 일을) 꾸며내는 것을 말합니다. '날조 기자'라는 비판을 받는 것은 신문기자에겐 '사형 판결'과 같은 것입니다. 기자가 정말로 날조를 했다면 곧 징계면직이 됩니다. 물론 나는 날조 같은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징계면직도 당하지 않았습니다"- p.209

당시 저자는 <아사히신문>을 조기 퇴직하고 고베쇼인여자학원대학의 교수 임용이 결정된 상태였다. 그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 학교 측에도 항의 전화와 메일, 팩스 등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결국 저자는 교수직 부임을 스스로 포기해야만 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저자가 이미 시간강사로 근무하고 있던 호쿠세이학원대학에도 공격이 쏟아졌다. 설상가상으로 고등학생 딸 사진이 온라인에 유출되며 딸에 대한 각종 협박성 발언까지 난무했다고 저자는 고백했다.

"학교 누리집에 게재된 딸의 사진이 유출돼 있었다. 그 사진은 내가 찍어서 학교에 제공한 것이었다. 어떤 블로그엔 딸의 사진과 함께 '이 년의 애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본인이 고생을 했는가. 자살할 때까지 몰아붙여야 하지 않겠냐'는 말까지 쓰여 있었다" - p.115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

가족에 대한 협박으로까지 이어지자 저자는 반격을 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몸 담았던 <아사히신문>에 자신의 기사에 대한 검증 기사를 보도해줄 것을 요청한 것. 아울러 자신을 비판했던 <산케이>, <요미우리>의 기자들을 만나 근거를 제시하며 자신은 날조하지 않았음을 주장했다.

이 책에서 저자가 기사를 날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정신대와 위안부의 혼동 문제다. 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용어 정립이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비롯된 실수였다. 그러나 이것이 날조의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다.

두 번째, 김학순 할머니의 '기생학교' 전력을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저자는 "당시 테이프에는 기생학교 이야기가 없었다"며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생학교에 다닌 것이 자발적으로 위안부에 지원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생학교는 단순히 음악과 춤을 배우는 곳일 뿐이다"라고 반박한다.

세 번째, '강제연행'이라는 표현이다. 위안부 모집 당시 강제연행이 이루어졌는지 여부는 첨예한 논쟁거리 중 하나다. 일본 정부를 비롯한 극우 세력은 '강제연행의 직접적인 증거가 없기에 법적 책임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저자가 근거도 없이 '강제연행'을 의미하는 표현을 써서 일본의 국제적 위신을 떨어뜨렸다고 공격했다.

저자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기사에서 '강제연행'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여자정신대라는 명목으로 연행돼 일본군을 상대로 매춘행위를 강요당했다'고 썼다. 이것은 우익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냥하듯 여자를 낚아채는 의미가 아니다"라고 항변한다.

일본의 양심들, 우에무라를 변호하다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위치한 '평화의 소녀상'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위치한 '평화의 소녀상'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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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9일, 마침내 저자는 도쿄지방법원에 자신에 대한 비판 기사를 쓴 니시오카 쓰토무 교수와 <주간문춘>을 발행하는 <문예춘추>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의 배경에는 저자를 응원하기 위한 일본의 양심들이 있었다.

그를 지키는 것이 곧 일본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라 믿었던 이들은 자발적으로 응원모임을 결성했다. 모임을 결성한 이들은 협박에 시달리는 호쿠세이학원대학에 응원 메일 보내기 운동을 전개했다. 170명의 변호사들이 모여 대형 변호인단을 구성하고 저자에 대한 변론도 맡았다.

법정에 선 저자는 진실을 보도하고자 했던 이유만으로 자신과 가족이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하는 상황에 대해 성토했다. 자신의 딸이 살해협박을 받고 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는 재판부에 강력하게 호소했다.

"내 기사가 날조가 아니라는 것을 판결을 통해 증명하고 싶습니다. 사법부의 이런 판단이 내려지지 않으면 비열한 공격은 끝나지 않습니다. 이번 재판은 저의 오명을 걷어내고 보도의 자유, 학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싸움입니다. 재판장, 재판관 여러분들께서 부디 올바른 사법 판단에 의해 '나를' '내 가족을' 그리고 '호쿠세이학원대학을' 구해주십시오." - p.210

제2의 오시리가 나타나서는 안돼

저자의 소송은 아직 진행 중이다. 현재 일본 사회는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주목하고 있다. 작게 보면 한 개인의 명예가 달린 일이지만, 크게 보면 일본 언론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의 등에는 '일본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 '언론인의 양심' 등 일본 사회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들이 잔뜩 짊어져 있다. 그러나 그가 걷는 길이 외롭지만은 않을 것 같다. 그가 짊어진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 함께 걷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법정 투쟁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과거로 돌리려는 역사수정주의 세력과, 역사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반성하려는 양심 세력과의 일대 투쟁이기도 하다. 일본의 극우세력이 저자를 공격한 배경에는 결국 '위안부 문제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피해 당사자인 우리도 한 목소리로 그를 응원하고 지켜줘야 하는 까닭이다. 양심을 지키기 위해 펜을 꺾지 않은 한 언론인이 '제2의 오시리'가 되도록 방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자가 유독 '강제연행'에 집착하는 까닭
책에서 저자는 유독 '강제연행'이라는 표현에 집착하고 있다.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개인적으로는 조선에선 위안부의 강제연행이 없었고, 적어도 지금까진 이와 관련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한겨레>, 2014년 12월 21일)고 말한 바 있다. 위안부의 강제동원을 주장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석연치 않은 구절이다.

이에 대해서는 옮긴이의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옮긴이는 "살벌한 2014~2015년 일본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일본이 조선인 위안부 여성들을 강제연행했다'는 표현은 매국노만이 입에 담을 수 있는 엄청난 사실왜곡으로 단죄당했다"며 "저자가 거듭 '나는 강제연행을 당했다고 쓰지 않았다'고 강조한 것은 이 같은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해명한다.

일본 사회의 그와 같은 분위기를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입장에서는 못 미더운 것이 사실이다. 속아서 끌고 간 것이나, 현장에서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성행위를 강요당했다는 점에서 강제연행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강제연행'이라는 표현을 두고 벌어지는 저자와 극우세력의 논쟁은 일본에서 바라보는 위안부 논쟁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일본 정부가 전쟁범죄의 책임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뒤집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안하무인의 태도로 나올 수 있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 - 우에무라 다카시 전 기자의 위안부 최초 보도, 그리고 그 후

우에무라 다카시 지음, 길윤형 옮김, 푸른역사(2016)


태그:#위안부, #일본, #언론, #한겨레, #우에무라 다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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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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