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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영 변호사
 박준영 변호사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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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파산 변호사'로 널리 알려진 박준영 변호사를 처음 만나게 된 건 다시 생각해봐도 신기한 일이다. 2014년 8월의 일이었다. 박준영 변호사와 내가 인연을 맺게 해준 사람이 찾아왔다. SBS의 대표적인 시사 프로그램인 <그것이 알고 싶다>의 주시평 피디였다.

당시 나는 국회 김광진 의원실에서 의무복무 중 사망하는 군인들의 명예회복과 관련한 입법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알고 싶다> 피디가 찾아오겠다고 하니 처음엔 군 의문사 관련 프로그램을 촬영하자는 것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목적은 다른 것이었다.

주 피디는 내가 오래전부터 관여해 온 '완도 존속살인 무기수 김신혜 사건'을 다시 한 번 다뤄보고 싶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나는 주 피디의 요청을 사실상 거절했다. 그러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랬다. 그 거절이 '박준영'이라는 변호사를 만나게 된 인연의 시작이었다.

무기수 김신혜의 무죄를 확신한 이유

그동안 나는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는 분들을 참 많이 만났다. 그리고 그들과 상담하다 보면 결론은 거의 대부분 자기 사연을 방송으로 내 보내 줄 수 있냐는 하소연이었다. 그렇기에 방송사 피디가 '스스로 찾아와' 방송하겠다며 도움을 요청한다면 이는 거절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고맙다며 인사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거절했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먼저 찾아와 제안까지 했는데 이를 거부했으니 담당 피디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내가 김신혜씨의 사연을 처음 알게 된 때는 2000년 12월 28일의 일이었다. 당시 나는 '반부패 국민연대'(현 한국투명성기구)라는 시민단체에서 국민신문고 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때 단체 홈페이지로 한 통의 이메일 민원이 접수되었다. 사연은 이랬다.

"안녕하세요. 누나가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되었는데 누나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며 억울함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누나와 여동생을 아버지가 성추행하여 누나가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합니다. 누나는 현재 무기징역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 중인데 저희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어 애만 태우고 있습니다. 제발 저희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당시 19살이었던 김신혜씨의 남동생이 보내온 이 한 통의 이메일은, 이후 만 16년의 시간이 지나가는 지금까지도 내가 내려놓지 못한 사건이 되었다. 이후 나는 짧은 몇 문장의 글로 되어 있는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고자 당사자인 김신혜씨와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또 전남 완도의 사건 현장을 수도 없이 찾아갔다. 경찰 등 수사기관이 외면한 이 사건의 또 다른 증인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내린 결론은 '아버지를 살해한 진범은 김신혜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확신한 것은 김신혜씨의 주장 때문만이 아니었다. 경찰과 검찰 등의 수사 결과 자체가 엉터리였다. 재판부가 이러한 잘못된 결론을 토대로 유죄 선고를 내렸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그저 무고한 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고자 했을 뿐이다. 이를 위해 때리고 심지어 증거를 조작하기도 했다. 그냥 필요한 범인을 만들기 위해 '김신혜'라는 사람을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세상에 알릴 수 있을까'였다. 그래서 처음 찾은 곳이 2001년 당시 SBS 시사 프로그램이었던 <뉴스 추적>의 정명원 기자였다. 고맙게도 정 기자는 김신혜씨의 억울함에 공감해 줬다. 그렇게 해서 김신혜씨 사연이 그해 <뉴스 추적>을 통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김신혜씨의 억울한 사연을 방송으로 접한 시청자들이 이후 이 사건을 수사한 완도경찰서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맹폭하기도 했다. 그러자 완도서 측은 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나에게 민형사 소송을 제기하겠다며 경찰서장 명의의 입장문을 밝히기도 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글을 본 후 내심 기뻤다. 이유는 간단했다. 김신혜씨 사건은 그 당시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끝난 상태였다. 따라서 더 이상의 법적 절차는 남은 것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남은 방법은 재심 청구인데, 이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기대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완도서 측이 나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면 다시 한 번 이 사건의 진실을 법정에서 다퉈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피소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김신혜씨의 억울한 진실이 풀린다면 그것 역시 인권운동가로서의 숙명이라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완도경찰서 측은 그 후 아무런 법적 대응하지 않았다. 처음 완도서 측이 소송을 불사하겠다고 밝힐 때 나 역시 반부패 국민연대 차원의 공식 성명으로 '소송을 제기한다면 기꺼이 화답하겠다'고 응답했는데 그 후 지금까지 소송 제기는 없었다.

어쩌면 나는 그때 김신혜씨의 무죄를 확신한 건지도 모른다. 김신혜씨를 존속살해범으로 수사했던 그들이 어떤 경위로 나를 상대로 한 소송을 포기했는지 여전히 알 순 없지만 다만 적어도 그들은 스스로가 틀렸음을 인정한 것이 아닐까 싶던 것이다. 그게 나의 확신이었다.

나는 왜 '그것이' 피디의 방송 협조를 거절했나

경찰이 작성한 '김신혜 수사기록'.
 경찰이 작성한 '김신혜 수사기록'.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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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김신혜씨의 억울한 사연은 2년에 한 번꼴로 주요 방송사의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보도되었다. 그때마다 나는 김신혜씨의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협조했다. 방송사가 원한다면 하루를 꼬박 달려가야 하는 전남 완도까지 안내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같은 말을 수도 없이 반복하며,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또 했다.

그렇게 해서 김신혜씨의 억울한 사연이 풀릴 수만 있다면, 그래서 마침내 김신혜씨가 '저 감옥 문을 열고 뚜벅뚜벅 나올 수만 있다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싶었다. 그것이 이 사건의 진실을 아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역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스스로 찾아온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 요청을 거부한 것은 더 이상의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절망 때문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방송으로 김신혜씨의 사연을 알렸으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방송 후 잠시 관심은 일었으나 거기까지였다. 김신혜씨는 그냥 감옥에 있었고 기대했던 석방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주 피디에게 이러한 말과 함께 정중하게 거절했다. 또한  김신혜씨 역시 그저 방송용 흥밋거리로만 자신의 이야기가 다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사연 출연을 원치 않는다고 전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내 거절에 잠시 고민하던 담당 피디가 매우 색다른 제안을 내놓은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어느 방송에서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이었다.

"보좌관님. 저희 역시 이전처럼 김신혜씨 사연을 방송에 한 번 내보고 그만두려는 것이 아닙니다. 재심을 맡아줄 변호사까지 저희가 책임지고 연결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잘못된 재심 제도를 바꿔보려고 합니다. 그러니 한 번만 더 믿고 가보시면 어떨까요?"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사람, 바로 '재심사건 전문 변호사'이자 '파산 변호사' 박준영 변호사였다.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 말고 또 김신혜의 무죄를 주장한 박준영 변호사

박준영이라는 변호사를 알게 된 후 나는 너무도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도무지 변호사 같지 않은 사람. 억울한 사람보다 더 억울한 사연에 분개하는 사람. 내가 만난 박준영 변호사는 그런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지난 십 수년간 저렇게 열심히 김신혜씨의 억울함을 대변해 주는 사람은 나 말고 처음 봤다. 지난 2000년 이후 그의 억울함을 주장하며 수없이 글로 쓰고 말해 왔지만 사실 외롭고 힘든 싸움이었다. 과연 김신혜씨가 억울함을 벗는 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 절망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김신혜씨의 억울함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박준영 변호사였다.

무엇보다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처음 박준영 변호사를 만나던 날 그가 준 명함이다. 박 변호사는 개업 변호사다. 그래서 대형 로펌에 속한 변호사가 아닌 그는 스스로 영업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러니 변호사 사무소 이름이 담긴 명함을 뿌려야 상식적인 일이다.

그런데 박 변호사가 나에게 준 명함은 달랐다.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문구가 쓰여 있었던 것이다.

바로 '김신혜의 다시 재판받을 권리'였다

2014년 당시 박준영 변호사가 줬던 명함. <김신혜의 '다시 재판받을 권리'> 그녀는 정말 아버지를 죽였나. 이런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변호사를 또 볼 수 있을까.
 2014년 당시 박준영 변호사가 줬던 명함. <김신혜의 '다시 재판받을 권리'> 그녀는 정말 아버지를 죽였나. 이런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변호사를 또 볼 수 있을까.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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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 변호사도 책임질 가족이 있고 또 사무실도 꾸려야 하는데 과연 이런 명함을 나눠주면 누가 돈 되는 사건을 맡길까 싶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아니, 박 변호사님.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명함을 나눠주면 누가 사건을 맡기려고 하겠어요?"

그러자 박 변호사는 "단 한 사람이라도 김신혜씨 사건을 알아야 재심이 됩니다. 구속 중인 상태의 재소자에게 우리나라 법원이 재심을 허용한 적이 없어요. 그러니 여론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려고요. 그래서 찾은 방법입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받은 감동은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면서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어느 가수의 노래 제목이었다.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그랬다. 정말 이런 사람 또 없을까 싶다. 단언컨대, 참 특이한 변호사다.

돈 '안 되는' 사건 위해 돈 '되는' 사건 거부한 변호사

박준영 변호사의 사무실 한켠.
 박준영 변호사의 사무실 한켠.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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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미담은 미담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이런 박 변호사가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소위 금수저 집안 출신도 아니다. 그렇다고 처가에 기대는 사람도 아니었다. 사무실에는 도와줄 직원이 한 명도 없고, 그래서 사건 기록 복사조차 자기가 직접 해야 한다는 말을 술자리에서 듣곤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느 날이었다. 박 변호사에게 도움 줄 수 있는 일이 나에게 생겼다. 박 변호사에게 뭐라도 도움 될 만한 일이 없을까 싶던 차에, 잘 아는 사람에게 전화가 온 것이다.

내용인즉, 자기가 어떤 억울한 일로 민사소송을 해야겠는데 믿을만한 변호사가 없냐는 것이었다. 평소 같으면 거절했을 부탁이지만 그날은 아니었다. 내심 기뻤다. 머리에 떠오른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내가 그를 도와줄 길이 열렸구나" 싶었다.

나는 바로 박준영 변호사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약간은 의기양양하게 좀 전에 받은 전화 내용을 전했다. 그러면서 사건을 소개해 주는 나에게 박 변호사가 얼마나 고마워할까 속으로 생각도 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었다. 반응은 내 기대와 완전히 달랐다. 박 변호사에게 돌아온 답은 이랬다.

"아니요. 형님. 저는 됐습니다. 필요하면 다른 변호사를 연결해 주세요."
"아니, 왜?"


뜻밖의 답변에 내가 되묻자 박준영 변호사의 답은 또 이랬다.

"사실 제가 지금 너무 바빠서 다른 사건을 할 수가 없어요. 김신혜씨 사건도 해야 하고 또 삼례 3인조 사건이나 약촌오거리 재심 사건 때문에 너무 바빠 다른 사건을 할 여력이 안돼요. 그러니 형님 마음은 고맙지만 못해요."
"아니, 그 사건들은 전부 무료로 하는 거잖아. 그런데 돈 버는 사건을 안 하면 사무실 임대료나 가족들 생계는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러자 돌아온 박준영 변호사의 답변.

"뭐 어떻게 되겠죠? 전 걱정하지 않습니다. 형님. 하하."

착한 이들의 진심 믿는 파산 변호사, 박준영

그리고 몇 달 후, 불행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박 변호사가 끝내 '파산'하고 만 것이다. 사무실 임대료를 내지 못해 쫓겨나는 상황에 이르렀고 또 무료 변론 비용과 생계비 등으로 대출받아 써 온 마이너스 통장 역시 한도가 꽉 차 더 이상의 대출 연장도 거부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내 이럴 줄 알았다. 돈 안 되는 사건을 위해 돈 되는 사건을 거부하더니. 나는 처음에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개털 중에도 상 개털'이었다. 결국 걱정되는 마음에 소주나 한 잔 하자며 불러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돌아온 답은 또 황당했다.

"형님. 전 착한 사람들의 진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스토리 펀딩을 통해 저를 좀 도와달라고 감히 부탁해 보려고 해요. 그래서 앞으로도 제가 계속해서 억울한 사람들 도울 수 있게 저 좀 도와달라고 하면 그래도 우리 사회에서 착한 분들이 도와주시지 않을까..."

그날, 나는 그냥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과연 저 사람의 기대에 사람들은 어떤 화답을 들려줄까? 나로서는 뭐라고 답하기 어려웠다. 그때는...

그리고 스토리펀딩이 시작된 이후, 나는 감동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파산 변호사 박준영이 절망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그리하여 당신의 신념이 옳다고 동의해준 많은 이들의 화답에 나는 뭐라고 할 수 없는 감격을 경험했다.

무엇보다 옳은 일에 공감해 주는 분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그래서 용기를 갖고 박준영 변호사가 앞으로 더 나아갈 힘이 생겼다는 점에서 나 역시 무척 기뻤다.

그래서 나는 확신한다. 파산 변호사 박준영 변호사가 만든 정의의 작은 물결이 보다 더 많은 분들의 공감을 통해 불의를 뒤덮는 거대한 해일로 변할 것을. 그 길 위에 함께 해 주는 모든 분들을 위해 박준영 변호사, 더 힘내시라!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진행하고 있는 '하나도 거룩하지 않은 파산 변호사' 펀딩. 공익 변론과 재심 사건 전문 변호사 박준영씨를 돕기 위해 시작했다. 당초 펀딩 목표 금액은 1억 원이었으나, 11월 4일 현재 목표 금액의 약 5배인 4억 9천만 원을 달성했다.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진행하고 있는 '하나도 거룩하지 않은 파산 변호사' 펀딩. 공익 변론과 재심 사건 전문 변호사 박준영씨를 돕기 위해 시작했다. 당초 펀딩 목표 금액은 1억 원이었으나, 11월 4일 현재 목표 금액의 약 5배인 4억 9천만 원을 달성했다.
ⓒ 스토리펀딩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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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박준영 변호사, #파산 변호사, #김신혜, #약촌오거리, #삼례3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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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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