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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여행에 대해 '여행은 살아보는 것'이라는 표현이 많이 들리곤 한다. 이는 한 숙박 공유 플랫폼 회사의 스토리북을 대표하는 표현이다. 여행자들은 보통 한 번의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듣기 위해 길고 잦은 이동과 겉핥기 식의 여정을 힘들게 소화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꼭 어느 곳에서 긴 시간을 보내며 여유롭게 현지인들과 친구도 되어보고 차도 한 잔 나누어보리라 생각하곤 했을 것인데, 이러한 동경과 소망을 간파한 이 작은 문구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슬라이드 필름. 대둔산 가는 길, 차가운 아침 공기에 물안개가 만들어졌다. 강한 햇살이 물안개를 역광으로 비추어 더욱 눈에 잘 보인다.
▲ 물안개 슬라이드 필름. 대둔산 가는 길, 차가운 아침 공기에 물안개가 만들어졌다. 강한 햇살이 물안개를 역광으로 비추어 더욱 눈에 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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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당일치기 여정 같은 비교적 짧은 여행에서는 어떤 의미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까.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여행은 만남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만남이란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 뿐 아니라 자연이나 지역과의 만남 또한 포함한다. 이러한 생각은 여행에 대한 작은 목표 혹은 여정의 지표가 되어 혹여 정처없이 떠나게 되었을 때에도 내가 그 시간 그 자리에 있는 것에 의미를 부여해줄 것이다.

슬라이드 필름. 대둔산 단풍이 빨갛게 물들었다. 시퍼런 하늘과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 대둔산 단풍 슬라이드 필름. 대둔산 단풍이 빨갛게 물들었다. 시퍼런 하늘과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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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함께 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처음 이루어지는 만남은 아마도 그 동행자와의 만남이 될 것이다. 나는 이날 외할머니를 만났고 부모님을 만났으며 대둔산을 만났고 태고사와 스님을 만났다.

슬라이드 필름. 어릴 때 함께 살았고 지금도 근처에 살고 있으며 언제나 우리 집안의 정신적 지주가 되시는 분.
▲ 외할머니 슬라이드 필름. 어릴 때 함께 살았고 지금도 근처에 살고 있으며 언제나 우리 집안의 정신적 지주가 되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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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인격이 형성되는 매우 중요한 시기인 생후 3년 정도를 그곳에서 보냈다. 이모와 이모부, 두 외삼촌, 그리고 2살 위의 누나와 4살 위의 누나와 함께였다. 외동아들로 태어났지만 식구들과 북적거리면서 컸던 까닭인지 혼자 자란 티가 많이 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누나들은 이제 외지로 시집을 가서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1년에 한두 번 만나도 어제 만난 것 같은 친근함이 있다. 실제로 작은 누나는 매형과 결혼할 때 "사을이는 내 친동생이나 마찬가지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친조부모님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외할머니를 외할머니라 불러본 적이 없다. 우리 외할머니의 호칭은 '할머니', 혹은 '할미'였다. 이는 나 뿐 아니라 모든 사촌들이 사용하는 공통 호칭이다.

할머니는 몇 개월 전 대장암 수술을 받으셨다. 다행히 전이가 되지 않았고 발병 부위 외에는 건강하셨기 때문에 수술 결과 및 회복의 경과가 좋은 편이었다. 천성이 부지런하신 할머니는 요즘에도 새벽 6시에 집을 나서서 걷는 운동을 꾸준히 하신다. 이런 할머니에게 수술 이전과 이후에 확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여행에 대한 할머니의 태도이다.

큰 병을 한 번 앓고 나니 삶에 대한 애착이 더 생기셨던 것 같다. 예전에는 어딘가로 모시려고 하면 좀처럼 나서려고 하시지 않았고 가끔 가까운 나들이를 가더라도 몇 번의 변덕을 부리신 후에서야 외출복을 챙겨입곤 하셨다. 하지만 지금은 "엄마, 우리 OO에 갈까?"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래, 가자"라고 하신다. 가끔은 마실 계획이 혹시 있는지를 먼저 묻기도 하신다.

슬라이드 필름. 외할머니를 부축하여 큰 계단을 오르고 있는 부모님.
▲ 가족 슬라이드 필름. 외할머니를 부축하여 큰 계단을 오르고 있는 부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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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산은 '호남의 금강산'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만큼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자가용을 운전해서 가면 전주에서 50분, 대전에서 1시간이면 넉넉히 도착한다. 산의 높이도 높지 않은 데다가 케이블카도 설치되어 있어서 그리 힘들이지 않고도 웅장한 경관을 쉽게 볼 수 있다. 환경적인 측면에서 비판적인 시각도 충분히 존재하지만 노약자나 장애인에게 접근성을 제공하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다.

슬라이드 필름. 케이블카가 막 정류장을 떠나 올라가고 있다.
▲ 대둔산과 케이블카 슬라이드 필름. 케이블카가 막 정류장을 떠나 올라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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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필름. 정류장에서 케이블카를 기다리고 있다.
▲ 대둔산 케이블카 정류장 슬라이드 필름. 정류장에서 케이블카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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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서둘러 출발한 덕에 생각보다 대기시간이 길지 않았다. 9시부터 운행을 시작하는데 우리가 받아온 시각은 9시 35분. 그 시간 동안 카메라를 정비하고 필름을 챙기고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네거티브 필름. 중형파노라마. 케이블카 정류장에서 같은 눈높이로 보이는 풍경.
▲ 대둔산의 가을 네거티브 필름. 중형파노라마. 케이블카 정류장에서 같은 눈높이로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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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거티브 필름. 중형파노라마. 케이블카 정류장에서 같은 눈높이로 보이는 풍경.
▲ 대둔산의 가을 네거티브 필름. 중형파노라마. 케이블카 정류장에서 같은 눈높이로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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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카 정류장에 내리면 곧바로 시원한 경관이 펼쳐진다. 스무 걸음만 걸으면 전망대에 오를 수 있다. 사실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채 물들지 않은 나뭇잎을을 보면서 아쉬워했었는데 높은 곳에 올라와보니 가을이 한창이었다. 일주일 정도 후면 완전한 절정이 이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으나 온도, 하늘, 미세먼지 농도 등 모든 면에서 이 날의 날씨는 완벽 그 자체였기 때문에 채도의 미연함을 채워주고도 남을 만한 햇살이 바위와 생물들을 화사하게 비추고 있었다.

슬라이드 필름. 대둔산 케이블카 승강장 지점에서 바라본 남쪽의 능선들. 가장 높이 솟아 있는 능선이 무등산이라고 한다. 오전 10시, 남동쪽에 떠있는 저 태양이 바로 대둔산의 모습을 화사하게 비춰주는 천연의 조명이었다.
▲ 대둔산에서 바라본 산의 능선들 슬라이드 필름. 대둔산 케이블카 승강장 지점에서 바라본 남쪽의 능선들. 가장 높이 솟아 있는 능선이 무등산이라고 한다. 오전 10시, 남동쪽에 떠있는 저 태양이 바로 대둔산의 모습을 화사하게 비춰주는 천연의 조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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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침 일찍 출발한 이유는 사람들이 덜 붐비는 시간을 이용하고자 했던 것 외에도 중요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빛의 방향 때문이었다. 대둔산의 방위상 오전에 전망대를 올라야 동쪽에서 떠오르는 햇빛을 그대로 받아 순광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대둔산의 앞면(남동쪽)에서 오전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는 대둔산의 뒷면(북동쪽)으로 돌아가 사진을 찍을 심산으로 해가 떠오르기 전부터 부산을 떨었던 것이다.

인간의 눈은 정말로 그 기능이 훌륭해서 역광의 상황에서도 모든 사물을 볼 수 있지만 카메라의 눈은 정확하게 기계적으로 작동하기에 노출의 차이가 있는 여러개의 사물을 동시에 담을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예로 사람의 눈으로는 달과 구름을 동시에 볼 수 있지만 카메라로 촬영을 하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하는 것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출사나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항상 지도를 꼼꼼히 살펴서 피사체의 방위를 파악한다. 지도로 파악하기 힘든 곳이면 여러 블로그나 카페에 올라가있는 사진들을 계속 찾아보고, 혹여 가까운 곳이라면 본격적으로 출사를 가기 전에 답사를 통해 정확한 방향을 파악해서 돌아오곤 한다.

슬라이드 필름. 금강구름다리를 건너기 전에 재빨리 한 컷 담아보았다. 2차원의 사진으로는 아찔한 느낌을 다 표현할 수 없다.
▲ 금강구름다리 슬라이드 필름. 금강구름다리를 건너기 전에 재빨리 한 컷 담아보았다. 2차원의 사진으로는 아찔한 느낌을 다 표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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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사진을 몇 컷 찍고 나니 어느새 10시 반이 되었다. 내가 가진 카메라의 특성상 한 컷을 찍는 데에 짧아도 3~4분의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구도를 잡고 삼각대를 설치하고 수평을 조절하고 노출을 계산하고 릴리즈를 설치하고 필름을 감고 셔터를 누르는 이 시간이 참 길기는 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은 것은 이 모든 과정이 즐겁고 흥미롭기 때문이다. 구도 및 노출에 대한 고민을 조금 더 깊이 할 수 있는 고마운 시간이기도 하다.

나는 심하지는 않지만 고소공포증을 가지고 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들 놀랄 만한 소리다. 스카이다이빙도 거침없이 해낼 것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구름다리 뿐 아니라 꽤나 안전할 것 같은 철계단을 오르는 것도 사실 버겁다. 금강구름다리를 건널 때에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심호흡을 하면서 걸어야 했다. 다리를 건너는 도중에 사진을 찍는 중국인 관광객들에 의해 가만히 서 있어야 했을 때가 두 차례 있었는데 정말이지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눈을 감아도, 뜨고 있어도 공중에서의 불안정함은 어찌 할 수가 없다.

네거티브 필름. 중형파노라마. 금강구름다리를 건너서 삼선계단 쪽으로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풍경. 병풍같은 가을 대둔산과 아찔한 삼선계단을 오르는 관광객들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 대둔산 정상과 삼선계단 네거티브 필름. 중형파노라마. 금강구름다리를 건너서 삼선계단 쪽으로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풍경. 병풍같은 가을 대둔산과 아찔한 삼선계단을 오르는 관광객들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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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필름. 삼선계단은 안전상의 이유로 일방통행이다. 내려오는 길은 우회로로 나있는데 올라갈 때도 이용할 수 있다.
▲ 대둔산 정상과 삼선계단 슬라이드 필름. 삼선계단은 안전상의 이유로 일방통행이다. 내려오는 길은 우회로로 나있는데 올라갈 때도 이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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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공포증을 가지고 있으니 저기 사진에 보이는 삼선계단은 언감생심, 절대 가지 못하는 그림의 떡이었다. 게다가 배낭 안에 들어있는 카메라 무게가 10킬로그램이 넘었고 십자인대 파열, 반월상 연골판 파열로 인해 수술을 했던 이력이 있는지라 30분 정도의 오르막에도 슬슬 무릎이 뻐근한 신호를 내고 있었다.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은 이미 정류장에 가있다고 하여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도 배낭에 넣고 다시 정류장으로 향했다.

슬라이드 필름. 승강장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 저렇게 겹쳐 보이는 산들의 능선을 참 좋아한다.
▲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슬라이드 필름. 승강장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 저렇게 겹쳐 보이는 산들의 능선을 참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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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산에서 국도를 타고 북쪽 방향으로 달리면 대전이 나온다. 대전으로 가기 전 왼쪽(서쪽)으로 방향을 틀면 태고사와 낙조대로 갈 수 있는 대둔산의 또 다른 입구가 나온다. 할머니를 모시고 있기도 했고 나 또한 무릎이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낙조대까지 오르는 등산은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고 태고사를 한 번 가보기로 했다.

사실 태고사는 지도에서 대둔산의 위치와 방향을 살펴보다가 처음 발견한 곳이었다. 그 규모와 생김새, 유래도 전혀 모르는 곳이었는데 순전히, 지도상에서 보니 차로 올라갈 수 있는 위치가 사찰과 상당히 근접한 곳인 것 같아서 행선지로 결정했었다.

내 차는 수동 변속기를 사용하는데 태고사로 오르는 길은 경사가 매우 심해서 중간에 차를 멈췄다가 출발하니 앞바퀴가 헛돌 정도였다. 평소 겁이 많으신 어머니께서 몇 번이고 그만 올라가자고 만류를 하셨지만 도중에 후진으로 내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조심 조심 차를 몰아 주차장으로 보이는 곳에 주차를 했다. 멀리서 들리는 대화 속에서 그곳에서 걸어서 10분만 올라가면 태고사를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슬라이드 필름. 태고사를 만나기 직전 통과하는 석문.
▲ 석문 슬라이드 필름. 태고사를 만나기 직전 통과하는 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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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필름. 걷기 시작한지 얼마 후 태고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고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웅장한 규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 대둔산 태고사 슬라이드 필름. 걷기 시작한지 얼마 후 태고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고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웅장한 규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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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10분 남짓 밖에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걷는 내내 할머니가 마음에 쓰여 그 시간이 참 길게 느껴지던 중 갑자기 나타난 축대와 사찰의 모습에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 높은 곳에 이런 큰 규모의 건물을 지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대체 누가 이곳에 사찰을 지을 생각을 했을까. 이 궁금증은 절을 소개하는 안내판을 통해 곧 해결되었다. 이 절을 처음 이 곳에 지은 사람은 다름아닌 원효대사라고 했다.

네거티브 필름. 중형 파노라마. 만연한 가을의 품에 안겨있는 사찰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 대둔산 태고사 네거티브 필름. 중형 파노라마. 만연한 가을의 품에 안겨있는 사찰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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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는 당시 이 절터를 발견하고 너무 좋은 나머지 3일 동안 춤을 추었다고 한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원효대사의 이미지 덕에 왠지 그 분의 춤 추는 모습이 눈 앞에 보이는 듯했다. 절의 모습, 주변의 비경에 입을 열고 있자니 비구니 스님께서 사람들을 불러모으셨다.

"여기 와서 차 한 잔씩들 해요."

스님은 따뜻한 차를 한 잔씩 나누어 주시며 태고사의 유래와 주지스님, 그리고 본인이 이곳에 눌러있게 된 연유에 대해서 차근차근 이야기해주셨다. 원효대사가 지었던 초가 절은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선대 주지스님께서 이곳을 다시 재건하셨다고 했다. 그분은 우리 나라에서 이름만 말하면 알 만한 도인이셨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두런두런 말을 해주시는 스님 본인은 건강상의 이유로 다리를 잘라내야만 하는 상태였는데 주지스님의 도움과 참선으로 인해 현재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하셨다.

사실 태고사라고 하는 절을 몰랐고 이런 유래와 경치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여분의 필름을 모두 차에 두고 그곳을 올라갔었다. 사진 많이 찍고 가라고 하셨던 스님께 그 안타까운 소식을 말씀드리고 차를 한 잔 더 얻어 마셨다.

아버지의 D-slr을 잠시 빌려서 몇 컷 찍었는데 영 마음에 차지 않았다. 한 번 필름으로 촬영을 했으면 그 통일성을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차장으로 내려가자마자 할머니와 부모님께 양해를 구하고 카메라에 필름을 감아 태고사로 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총각 아직도 안 갔어요?"
"아까 필름 없다고 했잖아요. 내려가서 필름 가지고 다시 뛰어왔어요."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스님은 한바탕 웃으시더니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셨다.

"여기가 사진 찍는 작가분들이 참 많이 오셔. 내가 그 사람들한테도 한 번도 안보여줬는데 이 총각한테는 보여주고 싶네. 따라와요."

이런게 바로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뜻밖의 만남과 예상 밖의 경험 말이다. 그 분은 나에게 이 사찰의 내연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창고 및 작업실과 그곳을 통과하면 볼 수 있는, 스님들의 수련 및 생활 공간, 그리고 사찰의 가장 기초가 되는 축대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슬라이드 필름. 외부인들에게는 좀처럼 개방되지 않는 곳을 나에게 안내해주시는 스님.
▲ 대둔산 태고사의 뒷편 슬라이드 필름. 외부인들에게는 좀처럼 개방되지 않는 곳을 나에게 안내해주시는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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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대 위에서 나무 두 그루가 한 그루 연리지가 되어 있었다.
▲ 연리지 축대 위에서 나무 두 그루가 한 그루 연리지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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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을 보면 콘크리트 벽에 작은 구멍들이 많이 나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스님은 이 구멍들에 담긴 특별한 일화를 설명해주셨다.

"주지스님이 갑자기 어느날 부터 눈이 빠질듯이 아픈거야. 아무리 기도를 해도 낫지를 않았는데 꿈에서 계시를 받고 이 곳에 구멍을 뚫었어. 곤충들이 다니는 길을 내준거야. 그랬더니 눈 아픈게 씻은 듯이 나았지. 이 옹벽이 생물들이 다니는 길을 막고 있어서 그렇게 아팠던거야. 원래 이 산의 주인들인데 말이지."

참 신비하면서도 여러 번 생각하게 만드는 일화였다. 인간이 살 곳을 마련하자면 그곳에 원래 살고 있던 크고 작은 생물들을 어쩔 수 없이 밀어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만 그들과 함께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이다. 완벽한 해결책은 없겠지만 우리는 이에 대한 고민을 끊임 없이 해야 할 것이다. 인간 또한 결국 지구 안에서 살아가는, 생태계의 일원이니까.

슬라이드 필름. 태고사에 오르면 볼 수 있는 풍경. 이렇게 보면 이 사찰이 얼마나 높은 곳에 지어졌는지 알 수 있다.
▲ 태고사에서 바라본 풍경 슬라이드 필름. 태고사에 오르면 볼 수 있는 풍경. 이렇게 보면 이 사찰이 얼마나 높은 곳에 지어졌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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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필름. 태고사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고 계신 스님.
▲ 태고사와 스님 슬라이드 필름. 태고사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고 계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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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필름. 태고사의 법당. 이 곳은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 없다.
▲ 대둔산 태고사 슬라이드 필름. 태고사의 법당. 이 곳은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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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필름. 태고사에 있는 커다란 전나무. 풍수지리 등에 능통하신 분들이 이 나무에 대해서 매우 기가 센 나무라고 표현하신다고 한다.
▲ 태고사 전나무 슬라이드 필름. 태고사에 있는 커다란 전나무. 풍수지리 등에 능통하신 분들이 이 나무에 대해서 매우 기가 센 나무라고 표현하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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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필름. 태고사의 장독대. 장독대 뒤에 있는 곳은 전시물이 있기도 하고 오전에 한하여 식사를 제공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딱 정오 10분 전이었어서 어머니와 할머니도 저 곳에서 식사를 하셨다.
▲ 태고사의 장독 슬라이드 필름. 태고사의 장독대. 장독대 뒤에 있는 곳은 전시물이 있기도 하고 오전에 한하여 식사를 제공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딱 정오 10분 전이었어서 어머니와 할머니도 저 곳에서 식사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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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필름. 한 평 남짓 될까 말까 한 스님의 방. 벽면 빼곡히 사진 및 읽을 거리들이 스크랩되어있다. 가장 중앙 상단에 있는 사진은 선대 주지스님의 사리를 찍어놓은 사진이다. 현 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저 사리 중 하나는 스스로 빛을 냈다고 한다.
▲ 스님의 방 슬라이드 필름. 한 평 남짓 될까 말까 한 스님의 방. 벽면 빼곡히 사진 및 읽을 거리들이 스크랩되어있다. 가장 중앙 상단에 있는 사진은 선대 주지스님의 사리를 찍어놓은 사진이다. 현 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저 사리 중 하나는 스스로 빛을 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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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여행의 모든 것을 기록할 수 없다. 풍경조차 사람의 눈으로 보는 만큼 담아오지 못한다. 하물며 여행지에서 만나는 인연들, 그들과 나누었던 대화와 정들을 어찌 담을 수 있으랴. 하지만 사진은 최소한 그것들을 기억하게끔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풍경을 보면서 느꼈던 감동, 주고받았던 대화, 그리고 공감 등을 다시 꺼내어 볼 수 있게 한다.

전 국민이 상처를 받고 나라가 뒤숭숭한 지금, 여전히 아름다운 가을과 고즈넉한 사찰의 풍경이 우리의 마음에 조그마한 평화와 위로를 주기를 바란다. 더불어 주지스님의 소소한 일화에서도 볼 수 있었던 생명존중 사상이 이 나라의 위정자들에게도 덕목으로 자리잡기를 바란다. 본인의 안위만을 살피고 무능하게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유기적으로 잘 굴러가는 데에 꼭 필요한 중간 톱니바퀴로서 때로는 이가 나가고 짓이겨지더라도 그 목적의식을 잃지 않고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보수하는 정치인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태그:#대둔산, #가을, #태고사, #필름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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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 대안교육 특성화 고등학교인 '고산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필름카메라를 주력기로 사용하며 학생들과의 소통 이야기 및 소소한 여행기를 주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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