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기사] 배우 박중훈이 만나잡니다... 잠이 안 옵니다

가을비는 쓸쓸하다. 비가 그치고 난 후의 잿빛 하늘은 우울하기까지 하다. 비온 뒤 떨어지는 기온은 사람을 더욱 처량하게 만든다.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 날. 아침까지 간간이 보이던 빗방울은 사랑스러웠고, 회색 하늘은 융단처럼 부드럽게 느껴졌으며, 피부에 와 닿는 차가운 공기는 청량하기만 했다. 그날은 바로 배우 박중훈을 만나러 가는 날이었으므로.

토요일 오후의 서울행 기차는 만석이었다. 자리를 꽉 채운 승객들 하나하나를 붙잡고 "혹시 서울에 무슨 일로 가시나요? 저는 배우 박중훈을 만나러 간답니다, 하하" 라고 이야기 하며 삶은 계란이라도 하나씩 돌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에 비친 웃고 있는 사내의 얼굴이 유난히 낯이 익다. 내가 웃고 그가 웃고 그렇게 히죽거리기를 반복하며 서울에 도착했다. 오디션 프로그램에라도 가는 듯, 기타 하나를 둘러메고.

박중훈-1 50대가 믿기지 않을 만큼의 동안과 매끈한 피부를 실제로 지닌 배우 박중훈.

▲ 박중훈-1 50대가 믿기지 않을 만큼의 동안과 매끈한 피부를 실제로 지닌 배우 박중훈. ⓒ 이정혁


박중훈-2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해주는 그에게서 사람의 향기가 느껴진다

▲ 박중훈-2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해주는 그에게서 사람의 향기가 느껴진다 ⓒ 이정혁


드디어 박중훈 만나는 날, 하지만 청계광장 먼저


그와의 약속 장소로 가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시국이 어수선한 상황에 차마 모른 척 넘어갈 수가 없어서 고민 끝에 박중훈씨에게 부탁을 해서 약속시간을 뒤로 미뤘다. 안면이 있던 것도 아니고, 그토록 손꼽아 기다리던 그날인데, 내 쪽에서 약속시간을 변경한다는 게 정말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행히, 그는 흔쾌히 약속 시간을 변경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바로 청계 광장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한 시간 쯤 촛불을 들고 있다가 못내 아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 하면 솔직히 거짓말이다. 사실 한 시간의 대부분은 나라 걱정보다 박중훈 생각에 할애했다. 약속장소에 5분전 쯤 도착했는데 그는 이미 자리에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말끔한 외모와 톱배우가 뿜어내는 아우라에 기가 눌려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있는데 그가 손을 덥석 잡으며 인사를 건넨다. 예상대로 그의 손은 따뜻했다. 그렇게 그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네 시간 가까이 이어진 그와의 만남은 유쾌함 그 자체였다. 시종일관 호탕한 웃음과 함께 대화를 주도해 가는 동시에 안주를 챙겨주고 찍어먹는 소스까지 자세히 설명해 줄 정도로 자상함을 보였다. 내가 배우였더라도 그렇게 하기는 힘들었을 정도로 그는 내게 다정했으며, 영화계 최대 인맥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할 만큼 고도의 친화력을 보여주었다. 만난 지 30분 만에 우리는 형님, 아우 사이가 되었다.

친근한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 그가 아내와의 통화를 제안했다. 예고 없는 전화에 아내가 충격을 받아 뒷덜미를 부여잡고 쓰러지진 않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박중훈 특유의 재치와 입담으로 즐거운 통화가 이루어졌다. 그가 또 물었다. "통화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다 얘기해 봐." 예의상의 멘트였을 수도 있었지만, 덥석 물고 말았다.

오늘의 기쁨과 영광을 누구에게 돌려야 할까? 나를 이 자리에 설수 있게 만들어 준 바로 그 한 사람, 머릿속에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러시면, 혹시..." 그는 흔쾌히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큰 효도를 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우쭐해졌다. 그런데 무언가 가슴 한 편으로 구멍이 뚫리는 느낌이 왔다. 좌뇌는 여기까지다, 더 이상은 추태고 민폐다, 라고 뜯어말리는데, 우뇌에서는 장모님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죄송한데, 마지막으로 한 분만 더...". 이번에도 그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장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함께 간 지인의 장모님에게까지 전화를 걸어주는 다정다감한 그의 모습에서 진한 사람 냄새가 풍겼다. 귀찮게 여겨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그는 해맑은 표정을 잃지 않고 우리를 배려했다. 한국 영화를 주름잡던 대배우라기 보다 엊그제 만난 동아리 선배 같은 모습으로 무리한 부탁(?)을 서슴없이 들어 주었던 것이다.

박중훈-3 배우 박중훈의 즉석 기타 연주

▲ 박중훈-3 배우 박중훈의 즉석 기타 연주 ⓒ 이정혁


배우 박중훈이 나의 세 여인과 통화를

만남의 자리는 그의 즉석 연주와 노래로 절정에 오른다. 가보로 물리기 위해 짊어지고 간 기타에 사인을 한 그가 즉석에서 현란한 손놀림으로 '비와 당신'을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 준 것이다. 오랜 팬을 위한 미니콘서트는 중년의 사내를 소녀로 만들었다. 한 달 넘게 연습한 나의 기타실력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민망한 수준이었다. 각본에 없었던 라이브 무대를 그는 즐기며 이끌어 갔고, 나는 터질 것 같은 감동의 눈물을 속으로만 삼켰다.

서너 시간 가량의 만남은 지진처럼 나의 심장을 흔들었다. 아직까지 여진이 남아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복받쳐 오른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배우 박중훈과의 만남을 복기해본다. 먼저, 그는 영락없는 배우였다. 주체할 수 없는 끼와 에너지로 자리한 모든 이들을 쥐락펴락하는 그의 광대 기질은 일반인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였다. 아, 최고의 배우는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구나, 감탄 할 수밖에 없었다.

박중훈, 그리고 그는 진심 어린 사람이었다.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는 아버지를 그리워 할 때나 소중한 팬들과의 자리가 영화제 시상식보다 뜻 깊다는 말을 할 때, 그에게서 짙은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관상학적으로 두툼한 턱은 주변에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는데, 사람을 모으는 그의 힘은 턱뿐만 아니라 그의 인간적이고 소탈한 매력 탓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중훈과 친한 동생, 즉 필자 만난 지 30분만에 형님 동생으로 다시 태어난 중훈 형님과 나

▲ 박중훈과 친한 동생, 즉 필자 만난 지 30분만에 형님 동생으로 다시 태어난 중훈 형님과 나 ⓒ 이정혁


앞으로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할 것만 같다

마지막으로 그는 노력하는 프로였다. 배우는 관객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보여주는 것이고, 감독은 자신의 생각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게 그의 영화 철학이다. 생각을 조금 더 가다듬고 입체화시키기 위해 수없이 공부한다는 그. 후배인 봉준호 감독도 감독으로서 노력하는 박중훈을 인정해주었다고 했다. 데뷔 후, 안 되는 것도 무조건 되게 하는 것이 삶의 방식이었다는 그의 말은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험난한 시간이 짧지 않았음을 짐작케 했다.

무엇보다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든 말은 내가 쓴 기사를 읽고 배우로써 에너지를 받아 차기작을 힘차게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잘 것 없는 나의 글 한편이 톱배우에게 미약하게나마 보탬이 되었다는 사실은 내겐 더할 나위없는 찬사이자 영광이었다. 만남의 시간 동안 그의 모든 에너지를 집중해서 내게 행복과 감동을 준 것도 고마워 미칠 지경인데, 그는 내게 마지막 선물까지 챙겨주었다.

"정혁아, 네 꿈이 배우였다고 했었지? 다음에 내가 감독할 때, 단역배우 자리 하나 만들어 볼 테니 그 꿈을 실현시켜보자."

나는 앞으로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할 것만 같다. 끝으로 지면으로 옮기지 못한 영화계의 비화들을 나만의 비밀로만 간직하게 된 점, 독자들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박중훈 비와_당신 톱스타 지금_만나러_갑니다 드디어_박중훈을_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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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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