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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28일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서울 종로구 청계천 평화시장 앞 '전태일 다리'를 찾아 전태일 동상에 헌화하고 있는 도중 김정우 쌍용자동차 지부장이 바닥에 누워 헌화를 막자, 경찰이 김 지부장의 멱살을 잡고 저지하고 있다.
 2012년 8월 28일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서울 종로구 청계천 평화시장 앞 '전태일 다리'를 찾아 전태일 동상에 헌화하고 있는 도중 김정우 쌍용자동차 지부장이 바닥에 누워 헌화를 막자, 경찰이 김 지부장의 멱살을 잡고 저지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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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전태일, 대구가 낳은 인물 가운데 이토록 대척점에 선 사람이 또 있을까. 한 사람은 1961년부터 1979년까지 18년 동안 장기집권하면서 대한민국을 통치했던 대통령이었지만 유신독재로 치닫다 측근에 의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22년의 짧은 생애를 가난한 노동자로 살면서 열악한 노동 환경 개선과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노동조건 준수를 요구하면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근로기준법> 책을 안은 채 불꽃으로 산화한 사람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은 환경에 살았지만, 두 사람은 1970년 동시대에 이른바 경제성장 위주 개발 정책을 구사해 그 시대의 노동자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던 대통령과 그에 맞서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죽음으로 고발하는 노동자로 조우했었다. 이 사건으로 전태일을 알게 된 박정희는 이듬해 1971년 연두교서에서 노동 문제를 언급한다.

"근로자들의 노동 조건 문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관심을 갖고 다뤄야 한다. 첫째는 근로자의 노동 환경과 복지 향상 문제이고, 둘째는 노동 환경·복지 향상도 중요시하면서 경제 발전 문제를 고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임금의 높은 상승률은 한국 경제의 발전을 위축시킨다. 또한 제품의 국제경쟁률을 약화시킨다. 그 경우 피해는 기업가만이 아니라 노동자에게도 간다. 근로자의 복지를 기업의 생산과 함께 점진적으로 향상시켜 나갈 작정이다."

정치적 감각이 동물적이라 할 만큼 뛰어났던 박정희는 전태일의 분신이 자기 권력 공고화에 미칠 부정적 파장이 예감했던 것 같다. 그해 대선에서 김대중을 간신히 누르고 3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이듬해 노동운동을 폭력적으로 탄압하는 유신체제를 출범시켰다. 전태일이 죽음으로 외친 바람을 짓밟고 절대권력의 길을 추구했던 박정희는 그 스스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다.

진보와 보수, 대구의 양면성

대구가 낳은 인물 박정희와 전태일은 그렇게 역사 속에서 화해하기 어려운 사이로 만났지만, 박정희와 전태일은 대구가 지닌 동전의 양면이라고 본다. 그것은 대구의 해방 후 현대사가 지닌 양면성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구는 흔히 이야기하지만, 해방 후 '동양의 모스크바'로 불릴 만큼 진보적 도시였다. 물론 1946년 미군정이 실시한 국민여론조사에 따르면 당시 국민 중 약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지만, 특히 대구는 1946년 10월 항쟁에서 드러나듯 체제저항적인 반골 기질이 두드러졌던 고장이었다.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두 달 뒤 이승만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4.19 혁명의 전초였던 2.28 민주항쟁은 또 어떠한가. 2.28 대구가 없었으면 3.15 마산이 없었고 3.15 마산이 없었으면 4.19도 없었다. 그처럼 대구는 진보의 메카요 민주주의의 성지였다. 그런 대구가 지금은 보수의 본산이 되었다. 심지어 2.28시위에 앞장섰던 경북고 출신들이 박정희 정권 시절 장기집권을 뒷받침했던 정관계의 핵심 브레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대구가 박정희에게 미쳤던 영향, 박정희가 대구에 미쳤던 영향

정수회 주최로 지난 2015년 10월 25일 대구사대부고 강당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36주기 추모제에서 행사 도중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정수회 주최로 지난 2015년 10월 25일 대구사대부고 강당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36주기 추모제에서 행사 도중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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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대구의 이런 이념적 변화가 인간 박정희의 개인적 족적과 묘하게 일치하고 있다. 박정희는 이념적 궤적으로 살펴볼 때 극좌에서 극우까지 오간 대단히 모순적인 야누스적 인간이었다. 집안 자체는 부친이 동학혁명에 가담했고, 큰형 박동희가 월북, 박상희는 대구항쟁 때 구미지역 지도자로 활약하다 진압 과정에서 피살당하는 등 대단히 반체제적이었다.

박정희 개인도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나 1960년 3.15 부정선거 직전에도 쿠데타를 모의했으며, 군 내부에서도 정군(整軍)운동을 내세운 하극상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다 끝내 1961년 5.16쿠데타를 성사시킨다.

그 전에 만주군관학교 출신 황군장교로 해방을 맞은 박정희는 1946년 형 박상희의 죽음과 함께 남로당에 가입해 남로당 군사총책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1948년 여수사건 후 좌익분자 색출 과정에서 체포되자 군대 내부의 남로당 조직을 밀고해 목숨을 건지는데, 대통령이 된 후 그가 유독 좌익 사범을 혹독하게 다룬 것은 이런 레드콤플렉스 때문이었다. 그는 과거를 세탁해 흔적을 지우기 위해 극단적으로 흘러갔다. 형 박상희의 친구로 5.16쿠데타 후 북한에서 밀사로 내려온 황태성을 사형시키는 등 반공주의자로 변신한다. 국시도 반공으로 삼았다.

결국 체제저항적인 도시 대구를 체제순응적인 도시로 변화시킨 요인이 개인 박정희라면 그의 생애적 변화와 대구의 현대사적 이념 변화가 겹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도시가 한 인간에 의해 이리 큰 영향을 입을 수도 있는가 싶을 정도로 인간 박정희는 대구라는 도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처음에는 대구라는 도시가 인간 박정희에 영향을 주었다면, 5.16을 기점으로 인간 박정희가 대구 변화에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경제발전 화두로 대구를 잡은 박정희

켄 로치 감독은 영화 '빵과 장미(Bread and Roses, 2000)'에서 인간에게는 물질적인 것(빵)과 아울러 인간적 존엄성의 가치(장미)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구는 빵을 위한 싸움에 있어서도 해방 후 첫 번째 민중봉기인 1946년 10월항쟁으로 앞서 나갔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그 몸부림에 담긴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갈망을 경제발전 화두로 돌리며 눌렀고, 결국 대구가 거기에 호응하면서 일단 빵을 위한 싸움에선 현실적으로 박정희의 승리로 끝났다.

대구의 보수화 그 변곡점이었다. 인간다움보다는 우선은 먹고 사는 것에 피땀을 쏟으면서 대구는 박정희의 길을 따라갔다. 대구는 마치 조공하듯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면서 산업화 주역으로 인력공급지역으로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그 수십 년 성과물이 지금의 우리 사회의 기득권 집결지로 물신의 바벨탑인 강남이다.

강남 지역민 상당수가 대구경북 출신이듯, 강남이라는 숙주를 탄생시킴으로써 대구는 자신의 혼을 잃고 어느덧 중앙만 바라보는 서울바라기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물신에 눈먼 대구는 박정희 장기집권 특히 유신독재까지 옹호하며 자신을 바쳤으며, 장기집권의 토대인 영호남 지역감정의 본산이 되기도 하였으니, 그 발언의 원조 이효상은 대구 사람이었다(1971년도 대선때 이효상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은 "박 후보는 신라 임금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다. 이제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을 천 년만의 임금으로 모시자").

대구의 기백을 죽인 박정희 정권의 '인혁당 사건'

경제발전이라는 화두가 박정희 대통령이 대구에 내민 당근이라면 지난 5월 31일 대법원에서 반세기 만에 무죄 확정된 두 차례 인혁당 사건은 채찍이었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엮인 자들 가운데 도예종 송상진 여정남씨 등 대구경북 출신들이 많은 것에서 보듯 대구의 기백을 결과적으로 꺾으려 박정희 정권이 만든 용공조작사건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기습 공격으로 대구의 정신은 결국 꺾여버렸다. 특히 2차 공격은 1차 공격으로도 꺾이지 않는 대구 주류 양심 세력에 대해 극단적이고 충격적인 방법(사형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집행)을 쓴 확인 사살이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보도한 1974년 5월 27일자 경향신문 1면
▲ 대구지역 반독재 세력에 대한 확인사살인 인혁당 조작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보도한 1974년 5월 27일자 경향신문 1면
ⓒ 오마이뉴스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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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꺾여버린 대구는 박정희 신화 그 박정희교의 신도가 되어갔고, 박정희의 깃발만 꽂으면 막대기도 당선된다는 몰이성적 지역으로 굳어져 버렸다. 거기에다 대구 출신 극우 군벌 세력들이 제3공화국 이후 연이어 정권을 잡게 되면서 대구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처럼 정신마저 혼탁해진다. 한쪽 날개를 완전히 잃어 극도로 편향되어 버린 대구는 지극히 배타적인 지역색과 몰가치적인 권력지향적 성격만 드러내며 어느 순간 씻을 수 없이 상처받은 외로운 도시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형성된 대구의 정치적 단일 지배 구조는 지역사회를 경직시키는 가장 근본 원인이 되었다. 대구의 정치·행정 권력이 단일 정당에 의해 장악되면서 시민사회의 정치∙행정 권력에 대한 견제를 취약하게 만들었다. 도시의 창조성과 시민적 생명력을 죽이는 경직성은 경제적 침체까지 가져와 대구는 16개 시도 중 지역총생산(GRDP)이 꼴찌를 달릴 만큼 지역경제도 바닥을 치고 있다.

청년이 탈출하는 도시 대구, 대구에 남게 되는 것을 루저처럼 생각하는 열패주의에 젖은 도시, 진보의 옛꿈을 되돌아보기엔 상흔이 너무 깊고 보수적 지역 정서를 자랑하기엔 스스로도 부끄러운 자아분열 상태, 그것이 박정희 유산의 현주소다.

박정희로 인한 대구의 이념적 자아분열, 통합과 치유의 길은 어디인가

극좌와 극우 사이를 오간 박정희 개인 안에 있는 모순된 이념적 자아분열에 통합과 화해가 필요하듯이, 박정희와 함께하면서 겪게 된 대구 역시 이런 극단적 자아분열 상태의 이념적 화해를 통한 통합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해방 후 비극적 이념 대결 사건들, 10월항쟁이나 인혁당 사건들에 대해 오로지 사실에만 입각해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고, 4.3제주항쟁이 그러하듯 역사적 화해를 이루어야 한다.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는 직면할 때 일어난다. 이제 대구의 아픔을 직면하고 그 근본적인 치유에 나설 때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치유는 빵을 위한 싸움에서 장미를 위한 2.28운동, 특히 1970년대 가난 속에서도 인간다운 삶을 꿈꾸며 박정희의 대척점에 섰던 대구 청년 전태일에 닿아 있다.

철학자 김상봉의 "대구는 박정희의 도시가 아니라 실은 전태일의 도시다. 전태일이 누구인가? 그는 슬픔의 예수와 분노의 예수, 눈물의 예수와 빛의 예수를 자기 속에 하나로 구현한 영혼이었다"는 규정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 이유다.

1912년 로렌스시에서 여성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서 "우리는 빵과 함께 장미도 원한다"고 외쳤듯이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시간을 단축하라! 일요일은 쉬게 해 달라!"며 노동자의 인간 존엄을 외치며 분신했다. 박정희는 수많은 전태일을 희생시키며 외형적 경제발전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 사회의 바탕을 닦아놓고 말았다. 전태일의 요구가 지금도 정당하고 유효한 까닭이다. 전태일의 영혼 그 소리를 들어보자.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중 분신 장면.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중 분신 장면.
ⓒ 영화 전태일 제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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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현실을 바꾸기 위해 자기 한 몸 바치기로 결심하면서 하늘나라로 가기 석 달 전에 삼각산에서, 고통과 번민 속에서 전태일 열사가 썼던 어느 날의 일기이다. 이보다 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절절할 수 있을까. 진보란 무엇인가. 그것이 인간다움에 대한 갈망이요 실천하려는 의지라면 이 이상 더 진보적일 수 있을까. 전태일, 그에게 이념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겠지만, 그는 누구보다 진보사회를 꿈꾸고 그를 위해 자신을 송두리째 바친 청년이었다.

사실 전태일의 사람 사랑은 예사 사랑이 아니었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라는 고백에서 드러나는 그 마음으로 전태일은 버스비를 털어서, 점심을 굶고 있는 시다들에게 1원짜리 풀빵을 사주고 청계천6가부터 도봉산까지 두세 시간을 걸어가기도 했는데 이런 일은 버릇처럼 되어 그 뒤 그가 죽을 때까지 3~4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전태일 평전>은 전한다.

그것은 전태일이 가난한 이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태일이 지닌 다른 사람의 고통과 슬픔에 함께하려는 동정과 공감의 열린 마음에 바탕하고 있었다. 그것이 전태일로 하여금 노동 현실을 비롯한 비판적 사회의식에 눈뜨게 만들었고, 실천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한 것이었다.

전태일을 부르는 부우빈홀의 사회현실

하지만 전태일이 불꽃으로 산화한 지 반 세기, 다시 노동 현실은 곤두박질치고 있다. 600만 명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해고의 칼날에 피 흘린 노동자들이 굴뚝 위로, 크레인 위로, 광고판 위로, 철탑 위로 올라가고, 농성 텐트 속에 2000일, 3000일 넘게 갇혀 있는 노동 현실. 거기에다 대부분이 서민들인 소자본 자영업자들의 폐업률이 80%를 넘는 현실은 또 어떠한가.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 심화에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가난한 이들이 죽음의 유혹에 흔들리고 실제로도 죽어 나가는 민생 도탄 시대. 한번 무너지면 다시는 일어날 수 없게 패자부활전조차 용납하지 않는 승자 독식 사회, 없는 자들을 더욱 힘없게 만들고, 아픈 사람들을 더욱 아프게 만들고, 소외된 자들을 더욱 소외시키는, 곧 가진 자는 우대하고 가난한 자는 홀대하는 부우빈홀(富優貧忽)의 정책 기조 아래, 서민들의 삶의 질은 급전직하 추락하고 있는 현실이 다시 전태일을 불러내고 있다.

전태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박정희의 산업화 과정에서 잃어버렸던 우리 사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특히 박정희의 개발독재 정신을 높이 받드는 이 대구에, 전태일의 살신성인 영혼을 되살리는 일은 대구를 다시 살리는 의미 있는 작업이다.

대구, 빵을 얻기 위한 싸움에서 장미꽃을 피우는 싸움에 나서야

그렇게 전태일과 박정희는 공동체성 회복을 통한 복지사회 실현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다. 빵을 얻기 위한 산업화 과정에 기여한 그만큼 이제 대구와 대구시민은 장미꽃을 피우기 위한 복지사회 실현에 앞장서야 한다. 그를 통해 박정희와의 유착관계로 물신에 찌들었던 대구 지역 정서를 극복하고, 오랜 시간 동면에 들어갔던 고결한 기백을 다시금 되찾으며 대구를 인간다운 삶을 향유할 수 있는 도시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지난 10월 28일 대구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서 '기억과 재생의 인문도시 대구 중구, 근대로 열린 인문학' 주제로 개최된 '2016 인문주간, 도시교류포럼 Inter-local : 대구의 전태일, 광주의 윤상원을 만나다'에서 필자가 '사람을 기억하는 도시'라는 제목으로 기조 발표한 것입니다.



태그:#박정희,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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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정권교체동행위원회 장애인복지특별위원장,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부소장,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맹 수석부회장, 지방분권운동대구경북본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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