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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훠이~ 물렀거라! 주상전하 행차시다!"

화려한 전통복식을 한 대규모 행렬이 한강을 건너는 이색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221년 만에 최초로 재현되는 정조대왕 능행차 행렬이었다. 행렬에 참여한 인원만 1239명에 동원된 마필만 168필에 이르렀다.

수원화성 축성 220주년을 맞아 지난 8일 열린 이번 행사는 창덕궁에서부터 수원화성에 이르는 45km 전 구간을 재현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를 보고 온 것도 아니었을텐데 221년 전의 어가행렬을 어떻게 고증·재현할 수 있었던 것일까.

221년 만에 재현된 <2016 정조대왕 능행차>. 어가행렬이 육군 공병부대가 설치한 부교를 통해 한강을 건너고 있다. 221년 당시에는 정약용이 고안한 '배다리'를 통해 어가행렬이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
 221년 만에 재현된 <2016 정조대왕 능행차>. 어가행렬이 육군 공병부대가 설치한 부교를 통해 한강을 건너고 있다. 221년 당시에는 정약용이 고안한 '배다리'를 통해 어가행렬이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
ⓒ '2016 정조대왕 능행차' 공식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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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에 새겨진 정조반차도

답은 청계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울 청계천 광교와 장통교 사이로 188m에 걸쳐 새겨진 도자벽화. 1795년(을묘년) 윤 2월 9일부터 16일 사이까지 8일 간에 걸친 정조의 화성 행차를 기록한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국왕 정조부터 하급 군졸에 이르기까지 행차에 참가한 모든 인원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221년 전 모습 그대로 각기 다른 옷을 입고, 개성 있는 표정을 지으며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우리는 이 그림을 '정조대왕 능행반차도'(아래 정조반차도)라고 부른다.

서울 청계천 광교와 장통교 사이에는 정조의 화성행차를 그린 반차도가 새겨져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의 흑백 그림에 채색을 하여 복원한 것이다.
▲ 청계천 <정조대왕 능행반차도> 서울 청계천 광교와 장통교 사이에는 정조의 화성행차를 그린 반차도가 새겨져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의 흑백 그림에 채색을 하여 복원한 것이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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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반차도는 독립된 그림이 아니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수록된 그림이다. 의궤는 조선시대에 국가적인 행사가 열릴 때마다, 후세에 참고할 수 있도록 행사의 내용을 기록한 것을 말한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1795년에 열린 정조의 을묘원행에 대한 기록을 뜻한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택일(擇日: 날짜별 행사의 주요 일정), 좌목(座目: 자리의 차례), 군령(軍令) 등 원행에 관한 제반 절차와 형식이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반차도는 행사에 관한 그림 자료들을 모은 도식(圖式) 편에 수록되어 있다. 선조들이 남긴 의궤 덕분에 우리는 221년 전 그날의 어가행렬을 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차도에는 무려 1779명의 사람과 779필의 말이 등장한다. 주어진 임무와 관직에 따라 명칭도 제각각이다. 심지어 말들조차도 싣고 있는 물자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의궤를 제작한 선조들은 친절하게도 그림마다 관직명과 숫자를 명시했다. 좌마(座馬), 군뢰(軍牢), 인마(印馬), 별기대팔십사오마작대(別騎隊八十四五馬作隊). 하지만 역사를 전공하는 이가 아닌 이상, 한자투성이의 반차도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정조의 을묘원행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
 정조의 을묘원행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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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참여형 가이드북으로 읽는 정조반차도

이번에 출간된 <정조반차도 - 8일간의 화성행차>는 누구나 쉽게 반차도를 읽을 수 있도록 쉽게 풀어 쓴 가이드북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저자가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보통 문화해설에 관련된 서적들은 저자가 일방적으로 독자들에게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구조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저자가 진행하는 방식이 아니라 카페 회원들과 퀴즈 형식을 통해 독자 및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수용했다. 처음에 카페에서 시작한 것이 SNS와 블로그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교류의 범위가 확대됐다" - 머리말

정조반차도를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 시도했던 실험은 총 63회의 연재물로 마무리됐다. <정조반차도 - 8일간의 화성행차>는 바로 그 연재물들을 한 데 묶은 것이다. 그래서 책은 독자들이 품을 법한 의문을 먼저 제시하고, 그에 대해 답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정조반차도 - 8일간의 화성행차> 표지
 <정조반차도 - 8일간의 화성행차> 표지
ⓒ 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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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보면 지위를 가늠할 수 있다

책은 어가행렬의 선두부터 후미까지 행렬 전체를 순서대로 따라간다. 경기감사, 훈련대장, 정가교(정조), 자궁가교(혜경궁 홍씨), 장용대장 그리고 도승지와 병조판서까지. 행차의 핵심인물들을 중심으로 6개의 대목으로 나눴다. 대목마다 중심인물과 함께 호종하는 인물들과 마필, 의장물 하나하나까지 세세히 분석하고 있다.

특히 조선의 군사체계에 대해서는 유난히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 저자는 "반차도를 구성하는 인원의 대다수가 군사들인 관계로 조선의 군사체계를 모르면 반차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최고 지휘관인 대장부터 말단 병졸에 이르기까지 군사들의 행군 모습을 따라가며 보직을 파악하다보면 당대 조선의 군사체계가 절로 이해된다.

예나 지금이나 의전서열은 명확하고 엄격하게 지켜져야 하는 관례다. 군에 갔다온 이들이라면 사단장(투스타)과 참모총장(포스타)의 의전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의전은 매우 중요했다. 반차도에서도 지위고하에 따른 의전서열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외양만 보고서도 대강 그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주위를 호위하는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하면 답이 나온다"고 말한다.

반차도 속 행렬을 크게 구분 지으면 말을 타고 행차하는 이들과 걸어서 이동하는 이들로 나뉘는데, 말을 타고 가는 이들이 더 높은 지위에 있다는 것. 더 나아가 말을 타고 있는 이들조차도 지위 구분이 가능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말을 탄 이들도 말구종(견마잡이)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말구종은 지금으로 치면 운전기사다. 말구종이 붙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지위가 더 높은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군뢰(軍牢: 헌병), 서리(書吏: 기록을 담당하는 하급관리) 등 호종하는 인물들의 의장이나 서열, 숫자에 따라 등장인물들의 지위를 가늠해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을묘원행의 총책임자였던 총리대신 채제공(蔡濟恭)의 행렬. 채제공이 탄 말에는 말구종이 있지만 그를 호위하는 장교와 녹사가 탄 말에는 말구종이 없다. 이처럼 말구종의 유무에 따라 지위구분이 가능하다.
 을묘원행의 총책임자였던 총리대신 채제공(蔡濟恭)의 행렬. 채제공이 탄 말에는 말구종이 있지만 그를 호위하는 장교와 녹사가 탄 말에는 말구종이 없다. 이처럼 말구종의 유무에 따라 지위구분이 가능하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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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차도를 읽으면 조선이 보인다

저자는 "단순히 그림만 보는 것보다 당대 사회를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며 "반차도를 제대로 이해하면 18세기 조선 사회를 이해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반차도에서 최대 규모의 의전을 자랑하는 이는 당연히 국왕 정조와 모후 혜경궁 홍씨다. 정조의 가마를 의미하는 정가교(正駕轎)는 모후 혜경궁 홍씨의 자궁가교(慈宮駕轎)에 앞장서고 있다. 그런데 정작 정조는 정가교에 타고 있지 않았다. 효성 깊은 정조는 자궁가교 뒤에서 가마가 아닌 말을 타고 뒤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자궁가교 뒤로 등장하는 좌마(座馬)가 그것이다.

그런데 정작 말 위에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시종들은 빈 말에 일산(日傘)과 부채를 씌워주며 호종하고 있다. 초상화인 어진을 제외하고는 임금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국왕의 용안이 널리 알려져 경호에 문제가 생길 것을 대비하기 위한 이유와 국왕에 대한 경외감을 조성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반차도를 따라가다 보면 당대 조선의 사회풍습과 정치체제의 특성까지 파악할 수 있다.

정조반차도에서 가장 화려한 의전을 자랑하는 국왕 정조의 행렬. 좌마(座馬)는 정조가 탄 말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작 정조는 그림에 나타나지 않는다. 어진을 제외하고는 국왕을 그리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반차도에서 가장 화려한 의전을 자랑하는 국왕 정조의 행렬. 좌마(座馬)는 정조가 탄 말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작 정조는 그림에 나타나지 않는다. 어진을 제외하고는 국왕을 그리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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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과 신권의 파워게임이 그대로 드러나

그렇다면 국왕 정조 다음으로 가장 화려한 의전을 자랑하는 이는 누구였을까. 당연히 행사의 총책임자였던 총리대신(總理大臣) 아닐까. 그러나 총리대신보다도 의전에서 앞섰던 이가 있었다. 도대체 정1품 재상보다도 화려한 의전을 받았던 이가 누구였을까. 바로 장용영(壯勇營)의 지휘관인 장용대장(壯勇大將)이었다.

조선 후기 중앙군은 훈련도감으로 대표되는 오군영 체제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오군영은 집권 세력인 노론의 사병(私兵) 집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이는 국왕 정조에게 크나큰 위협이 됐다. 결국 정조는 병권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호위부대인 장용영을 창설한다. 정조의 신임을 등에 업은 장용영은 삽시간에 오군영을 압도하는 최대 규모의 군영으로 발전했다. 이후 장용영은 정조의 개혁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지원세력이 됐다.

조선의 관직체계상 훈련도감의 수장인 훈련대장과 장용대장은 동급이다. 그러나 장교 3명의 호위를 받는 훈련대장에 비해 장용대장은 장교 4명, 서리 2명, 아병(牙兵: 대장 곁에서 군무를 수행하는 병사) 10명의 호위를 받고 있다. 반차도 속 장용대장 행렬은 당시 장용영에 대한 정조의 신임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장용영은 정조를 호위하기 위해 창설된 조선 후기 특수부대였다. 그리고 그 수장 장용대장은 을묘원행 당시 정조 다음으로 가장 화려한 의전을 자랑했다. 이는 장용영에 대한 정조의 신임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장용대장(壯勇大將)의 행렬 장용영은 정조를 호위하기 위해 창설된 조선 후기 특수부대였다. 그리고 그 수장 장용대장은 을묘원행 당시 정조 다음으로 가장 화려한 의전을 자랑했다. 이는 장용영에 대한 정조의 신임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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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반차도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 중 하나로 병조판서의 존재를 꼽는다. 병권을 상징하는 병조판서는 통상 왕의 가마 바로 뒤를 따르는 것이 관례나 정조반차도 속 병조판서는 예외인 것. 행렬의 가장 후미에서 따라올 뿐만 아니라 자신의 휘하인 훈련대장보다도 의전이 초라하다. 오늘날로 치면 국방부 장관이 육군참모총장보다 못한 의전을 받는 셈이다.

이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분석은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나, 저자는 "당시 병조판서를 맡고 있던 심환지는 정조의 최대 정적인 노론 벽파의 영수였다"며 "공식적인 행사에서 그의 지위를 격하시킴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고 조심스레 추측한다. 정조와 노론 벽파의 대립으로 대변되는 18세기 후반 조선의 정치상황이 반차도에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병조판서는 조선시대 병조의 수장으로 군권을 좌지우지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호위는 휘하 장수인 훈련대장보다도 못하다. 오늘날로 치면 국방부 장관이 육군참모총장보다 낮은 의전을 받는 셈이다. 저자는 "노론에 대한 정조의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이 아닐까" 추측한다.
▲ 휘하 장수보다 초라한 의전의 '병조판서' 병조판서는 조선시대 병조의 수장으로 군권을 좌지우지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호위는 휘하 장수인 훈련대장보다도 못하다. 오늘날로 치면 국방부 장관이 육군참모총장보다 낮은 의전을 받는 셈이다. 저자는 "노론에 대한 정조의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이 아닐까"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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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오군영을 대표하는 훈련도감의 수장 '훈련대장'의 행차 장면. 상관인 병조판서보다 화려한 의전을 자랑한다.
▲ 훈련대장의 행렬 조선 후기 오군영을 대표하는 훈련도감의 수장 '훈련대장'의 행차 장면. 상관인 병조판서보다 화려한 의전을 자랑한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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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차도에 깃든 개혁군주의 꿈

정조의 수원 행차에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깃들어 있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비명에 간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강화된 왕권을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실제로 정조는 화성에 도착한 뒤, 황금갑주를 갖춰 입고서 서장대(西將臺)에 올라 군사 훈련을 진두지휘했다. 신하들은 그런 임금을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신하들에게 왕권을 과시하려는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끝내 개혁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구상했던 개혁정책은 모두 폐기됐다. 정조의 개혁을 뒷받침해주던 장용영 역시 혁파됐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은 정조의 개혁을 두고 '미완의 꿈'이라 말한다.

정조의 개혁 정책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평가가 분분하다. 그 실체가 드러나기도 전에 개혁 주체였던 정조가 스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주로서 조선의 폐단을 인식하고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반차도 속에는 그러한 정조의 의지가 담겨있다. 이제 반차도를 따라 그가 품었던 원대한 꿈의 길을 되짚어보는 것은 어떨까.

덧붙이는 글 | <정조반차도 - 8일간의 화성행차> / 최동군 저 / 담디 / 2016.09.20 / 360p / 16,000원



8일간의 화성행차 정조반차도

최동군 지음, 도서출판 담디(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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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 수료(독립운동사 전공) / 형의권·팔괘장·활쏘기(국궁) 수련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2021년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2019년 성교육 전문가와 함께 하는 대화집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2017년 그림책 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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