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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사과 직후, 여론이 반영된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사과 직후, 여론이 반영된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 네이버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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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입장표명 시간 오늘 오후 4시 반 봅니다. 그때 독일이 오후 아침 9시 반이거든."

박근혜 대통령이 지극히도 이례적인 대국민사과를 발표하기 몇 시간 전인 25일 오전, 한 트위터 사용자는 이렇게 예언(?)했다. '8선녀', '신정정치' 등 최순실씨의 '대리 국정 운영'에 대한 비판이 들끓는 여론에 합당한 예지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예언은 살짝 빗나갔다. 탄식이 이어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는 오후 4시, 독일 시간으로 오전 9시 즈음 이뤄졌다. 박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를 접한 일부 국민들은 "최순실씨가 밤잠 설치고 연설문을 손 본 건가"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박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는 실로 단순하고 단조로웠다. 과거 최순실씨가 손 본 박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에 등장하는 "통일은 대박"과 같은 미사여구가 전혀 없었다. JTBC <뉴스룸>이 24일 보도한 '대통령 연설문 사전유출' 파문에, 정치권은 물론 여론에서까지 '탄핵'과 '하야'가 거론되는 작금의 분위기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역시나, 독일로 도피 중인 '빨간펜 선생님' 최순실씨의 부재 때문이었을까. 

'진솔하게'란 뜻도 모르는 함량미달 대국민사과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최순실 의혹'에 관해 대국민사과를 하는 모습을 여의도 정치권에서 지켜보고 있다.
▲ 박근혜 "최순실 도움 받았다" 시인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최순실 의혹'에 관해 대국민사과를 하는 모습을 여의도 정치권에서 지켜보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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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최근 일부 언론보도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제 입장을 진솔하게 말씀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박 대통령은 사과문 첫 문장에 등장하는 '진솔하게'라는 단어가 어느 정도의 뜻을 포함해야 하는지 아직까지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용을 보면 '왜'인지 바로 답이 나온다.

"아시다시피 선거 때는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많이 듣습니다. 최순실씨는 과거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으로 지난 대선 때 주로 연설이나 홍보 등의 분야에서 저의 선거운동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전달됐는지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이나 소감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일부 연설문이나 홍보물도 같은 맥락에서 표현 등에서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취임 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 일부 자료들에 대해 의견을 들은 적도 있으나 청와대 보좌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두었습니다. 저로서는 좀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인데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치고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 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께 깊이 사과드립니다."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은 개인사라 치자. 그럼에도 지금까지 명명백백 밝혀진 최순실씨의 국정개입이 "개인적인 의견이나 소감을 전달해주는 역할"이 맞는지, "표현 등에서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로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이해할 국민들이 얼마나 될지 궁금해 지는 대목이다.

더욱이 "청와대 보좌체계가 완비된 이후에 그만두었다"는 대목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이건, 기존 청와대 시스템은 물론이요, 단 한 줄의 표현으로 작금의 국정 운영 체계를 부정하고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순수한 마음"이라는 표현에선, 박 대통령의 대화 수준이 '베이비 토크'라던 전여옥 전 의원의 표현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탄핵" 등장한 여론, '차지철'까지 소환하다

"탄핵", "박근혜 탄핵", "최순실", "박근혜", "차지철".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직후, 포털 네이버의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단어들이다. 여타 포털에 비해 비교적 보수적이고, 또 여당 성향의 사용자들이 도드라진다고 일컬어지는 네이버가 반영하는 여론이 이 정도다. 오죽했으면, '박근혜 번역기'의 개발자는 최순실씨의 '대리 국정 운영' 의혹에 대해 이런 슬픔을 토로했을까. 

"박근혜 번역기 개발자로서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탄핵과 하야 사이, 최순실씨의 국정 개입을 둘러싼 정치권과 여론의 반응은 대략 이 정도로 갈무리 된다. 박 대통령의 그간의 성정과 스타일을 고려한다면 분명 대국민 사과는 이례적이다.

하지만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인식공격"이나 "유언비어" 정도로 치부해 버렸던 박 대통령의 과거 발언을 돌이켜본다면, 박 대통령이 언급한 "송구스럽다"는 표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국민은 없지 않을까.

더욱이, 더민주 김부겸 의원이 자신의 SNS에 언급한 "차지철"이 회자되고 있는 현실 자체가 블랙코미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호실장이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월권으로 유명한 그 차지철 경호 실장 말이다. "최순실은 아무 직함 없이 대통령 배후에서 국정을 좌지우지한 '제2의 차지철'이었다"는 표현은 또 한 번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박근혜 대통령의 단면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2016년 10월 25일이 슬픈 하루인 이유

문재인 전 더민주 대표가 2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특별 성명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이야말로 국민들의 마음을 "진솔하게"를 대변할 수 있는 표현과 내용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 좀 길지만 그대로 인용하는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속속 밝혀지는 최순실 게이트의 실상은 차마 부끄럽고 참담해 고개를 들 수조차 없는 수준입니다. 이건 단순한 권력형 비리가 아닙니다. 국기문란을 넘어선 국정붕괴입니다. 우리 헌정사에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대로 둔다면 정상적인 국정운영이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최순실 게이트는 이제 대통령과 청와대의 비리가 됐습니다. 남은 임기, 정상적인 국정운영을 위해선 박근혜 대통령이 이 사태를 스스로 풀고 가야 합니다. 대통령은 더 이상 뒤에 숨지 말고 직접 국민 앞에 나서야 합니다. 국민에게 모든 진실을 밝히고 사과하기 바랍니다.

최순실씨를 즉각 귀국시켜 수사를 받게 해야 합니다. 우병우 수석을 포함해 비선실세와 연결돼 국정을 농단한 현 청와대 참모진을 일괄 사퇴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청와대도 수사를 받아야 합니다.

우병우 체제의 검찰이 이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입니다. 당장 청와대를 압수수색해 의혹을 밝혀야 할 사안인데도 뒷짐만 지고 있습니다. 국회 국정조사를 통해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필요하면 특검까지 해서 엄정하게 사법처리해야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이렇게라도 분명하게 정리하지 않으면 남은 1년은 국정마비가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더 불행해 지는 것을 막기 위한 유일한 방법입니다. 지금은 국가비상상태입니다. 실로 대한민국의 위기입니다. 오직 정직만이 해법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정치권 일각과 일부 여론에서 목소리가 드높은 '탄핵'과 '하야' 발언은 없다. 하지만 문 대표는 길지 않은 문장 안에 작금의 사태를 함축하고 특검과 국가비상사태 선포 등 향후 대책까지 거론하고 있다.

참담하고 비극적이지만, 현실은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혼자서는, 최순실씨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연설문 하나도 소화해내지 못한, 연설문뿐만 아니라 국정 전반을 '첨삭지도' 받은 대통령이 우리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박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까지 한 2016년 10월 25일은 이 '현실'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슬픈 하루로 기록될 것 같다. 


태그:#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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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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