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혐의로 한 소년이 기소되었다. 소년은 법원 판결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최종적으로 배심원 12명 전원이 유죄나 무죄 중 하나로 의견을 모아야 한다. 그에 따라 소년은 사형되거나 풀려나게 될 것이다.

배심원들 첫 투표에서 11명의 배심원이 유죄로 뜻을 같이하였으나 한 명이 무죄를 주장하였다. 무죄를 주장한 한 명의 배심원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이 한 명으로 인해 배심원들은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짚어보게 된다.
지난 19일 대학로 미마지아트센터 물빛극장에서 '12인의 성난 사람들(극단 산수유, 10월 30일까지 공연)'을 관람했다. 연극은 12명의 배심원이 유죄 또는 무죄 중 하나를 선택하기까지 배심원 방에서 나갈 수 없는 것으로 시작된다. 과연 진실이란 무엇이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알 수 있는 것인지 연극은 보여준다.

연극의 무대가 배심원 방이 되었고, 그렇게 연극은 2시간가량 배심원들 간의 분노와 삿대질, 질타, 설득, 호소로 진행된다. 살인 사건에 대한 전체적인 내용이나 소년이 유죄를 받은 이유는 배심원들 대화 중간마다 드러난다. 그래서 관객은 주어진 것 없는 조건 속에서 배심원들의 말만으로 전체적인 사건을 종합해 보아야 했다.

유죄 판결에 반기를 든 한 배심원

 배심원들이 소년의 유무죄에 대해 토의하고 있다.

배심원들이 소년의 유무죄에 대해 토의하고 있다. ⓒ 극단 산수유


법원이 소년에게 유죄를 선고하게 된 큰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소년은 사건 당일 아버지에게 상당히 강한 수준의 구타를 당하였고 이에 충동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했을 것이다. 둘째, 소년의 집 위에 거주하던 노인이 "죽여 버릴 거야"라는 소리와 함께 "쿵"하는 소리를 들었고, 놀라 현관으로 가 문을 여니 소년이 계단을 황급히 내려가는 걸 봤다고 증언했다.

셋째, 철로를 사이에 두고 소년 집과 마주 보는 건너편 여인이 지하철이 막 지나가던 때 소년이 아버지를 칼로 찌르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고 증언했다. 넷째, 소년이 범행 전날 독특한 문양의 칼을 샀는데 바로 그 칼이 범행 현장에 있었다. 다섯째, 소년이 범행 당시 새벽 3시 심야에 영화를 보았다고 했는데, 경찰이 어떤 영화를 보았고 누가 나왔고 내용은 어떠했는지 심문하자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또한, 영화관 직원들도 소년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배심원들은 처음엔 소년의 과거 행실을 내세우며 유죄라고 주장했다. 소년은 자동차 절도, 선생님 폭행 등으로 전과 5범이었다. 배심원들은 처음부터 소년에게 편견을 가지고 사건을 보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구타에 소년이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보았다. 유죄를 주장한 배심원들은 이러한 증거와 증언들을 토대로 소년의 유죄가 확실하다며 무죄를 주장하는 남자에게 유죄로 생각을 돌리길 요구했다. 이때 무죄를 주장한 남자의 석연치 않은 점을 나열한다.

정말로 확실하고 정확하며 부정할 수 없는 크나큰 증거들이 소년을 유죄로 가리키고 있었음에도, 무죄 측 남자는 한 편으로는 '만약 그가 유죄가 아니라면'을 생각했다. 그리고 판결과 증언에 대해 자신만의 생각으로 사건을 다시 인식하기 시작한다. 무죄 측 남자가 인식한 생각들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서 유죄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심한 마찰이 생겼다.

배심원은 연극 상연 중간중간 유·무죄 투표를 4~5번 정도 했다. 그럴수록 무죄로 옮겨가는 배심원들이 하나씩 생겨났다.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유죄 두 명과 무죄 열 명으로 비율이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관객들은 배심원들이 하나씩 무죄로 생각을 돌릴 때마다 환호하고 손뼉을 쳤다. 그러나 중요한 건 다수결이 아니었다. 만장일치였다.

유죄 판결의 석연치 않은 점들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베를린 국제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동명의 영화를 연극으로 재탄생시켰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베를린 국제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동명의 영화를 연극으로 재탄생시켰다. ⓒ 극단산수유


배심원들은 옥신각신하는 중에 자신들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을 의심하게 된다. 생각해보니 석연치 않은 점들이 많았다. 무죄로 갈아타는 배심원들이 낸 다섯 가지 큰 석연치 않은 점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시고 소년을 구타해왔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과거에 유치장 신세를 진 적이 있고, 도박하여 쫓기는 신세였기에 그와 관련된 다른 사람이 살인범일 수 있다.

둘째, 노인은 중풍으로 한쪽 다리가 불편한 상태였다. 법정에서도 부축을 받을 정도였는데 방에서 복도를 지나 자물쇠 열고 현관문을 여는 데 15초가 걸렸다는 건 정상인에게도 빠듯한 시간이다. 또한, 노인은 소년이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아닌 단지 사람의 실루엣을 보았을 것이고, 이를 소년으로 착각해 진술했을 수 있다. 특히 사건 당시 열차가 지나가고 있어 '죽여 버릴 거야'라는 소리를 노인이 뚜렷이 듣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셋째, 여자는 증인석에서 안경을 끼지 않고 있었지만, 안경 낀 사람만 할 수 있는 특유의 콧잔등 올리기를 여러 번 했다. 자다가 일어나 무심코 철로를 본 여자는 누워 있는 동안 분명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여자는 살해 장면을 목격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장면인지에 대해서는 뚜렷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넷째, 아들은 주머니에 생긴 구멍으로 칼을 잃어버렸다고 진술했었는데, 배심원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아들의 살해 도구였던 칼은 수평으로 찌르는 단도였다. 아들은 그 칼을 잘 다루었고 위에서 아래로 찌르는 피해자 상처는 이에 맞지 않았다.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칼의 지문을 깨끗이 닦은 아들이 도망친 후 3시간 뒤 다시 범행 현장에 돌아왔다는 건 이상했다. 또한, 아들이 산 독특한 문양의 칼은 알고 보니 어디서나 파는 문양이었고,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다섯째, 소년은 아버지의 구타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와 영화관에 왔기에 영화에 집중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소년은 아빠가 죽어 있는 거실 바로 옆방에서 경찰에 심문을 받았다. 제정신이 아니어서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으로 배심원들이 내린 판결

변호사조차 소년을 제대로 변호하지 않은 사건이다. 배심원 모두가 유죄를 주장할 때 단 한 명의 무죄 측 남자는 "소년이 무죄라는 게 아니라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니 한 번 더 생각을 정리해보고 유죄가 정말로 확실한지 생각해보자"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말을 내뱉는 것만 해도 다수에 맞서야 했고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이 남자 덕에 다수의 배심원은 자신들이 판사와 증인들 말만 믿고 정작 아들의 말은 들어주거나 믿어주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자신들이 아들에 대한 편견으로 처음부터 사건에 색을 입혔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마지막 배심원 투표를 앞둔 때였다. 많은 정황과 근거가 '소년이 유죄가 아닐 수도 있다'고 가리킴에도 두 명의 배심원은 소년이 유죄라는 생각에서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남은 두 유죄 배심원 중 하나는 소년과 같은 아이들을 개·돼지 부류로 생각하는 어른이었다. 오래전부터 심어진 편견을 고수한 채 소년과 같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회가 만든 주체 없는 인격체이기도 했다. 내 가족, 지인이 아닌 '남'이라는 소년이기에 소년의 목숨을 쉽게 결정하고 방조해도 될 존재로 여겼다.

이 남자가 저급한 주장을 하기 전 유죄 의견에 원래 세 명이 남아 있었다. 나머지 둘은 안경 쓴 남자와 땅딸막한 남자였다. 안경 쓴 남자가 개·돼지를 외치는 남자의 주장에 누구보다 크게 분노하며 호통을 쳤다. 같은 유죄 편이지만 사회 편견에 휩싸인 개·돼지 남자와 달리 자신은 검찰이 제시한 증거에 기반을 둔 착실한 유죄 주장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결국, 남의 의견을 자신의 의견인 양 받아들인 건 두 남자 모두에서 같았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다가 안경 쓴 남자와 개·돼지 남자는 무죄 측 사람들이 보내는 침묵의 시선을 느낀다. 그리고 무엇을 깨달았는지 둘 다 무죄로 생각을 바꾸고 만다.

땅딸막한 남자만 유죄에 남았다. 땅딸막한 남자는 18살이던 자기 아들에게 폭력을 당한 아버지였다. 땅딸막한 남자는 토론 중간중간 자신의 경험을 여러 번 사람들에게 말했다. '어찌 아버지를 죽일 수 있는가 아버지인데!'를 외치며 무의식중에 자신의 경험을 말했다. 후에 무죄 측 배심원들은 땅딸막한 남자가 소년을 자기 아들로 착각하여 유죄 판단을 내렸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마지막에 가서 무죄 측 배심원 하나가 땅딸막한 남자에게 "그 아이는 당신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 아이는 전혀 다른 사람이에요"라는 말을 한다. 이 부분에서 소란스러웠던 연극판이 1분여간 아무 대화 없이 침묵에 휩싸인다. 관객들 역시 뒤척임 없이 숨소리도 조심하며 남자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고요 속에서 무죄 측 배심원이 "살려줍시다..."라고 한 번 더 작게 속삭인다. 그 말은 태풍의 눈과 같았다. 땅딸막한 남자는 울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심원들은 마침내 무죄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그들은 공연장을 빠져나간다. 관객이나 배심원이나 소년이 정말로 살인을 저질렀는지, 죄가 없는지 사실은 모른다. 한 사람의 삶에 한 번쯤 기회를 주기 위해 배심원들이 무죄 쪽으로 일부러 증거들을 맞추려 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유죄가 되었건 무죄가 되었건 그것이 진실이건 아니건 확실한 것은 없다는 점이다. 기존 자신이 가진 편견을 배제하고 순수한 눈으로 어떤 사건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종이에 쓰인 법이 아닌 인간의 마음과 눈으로 삶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단지 연극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연극 포스터 12인의 배심원들은 과연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까

▲ 연극 포스터 12인의 배심원들은 과연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까 ⓒ 극단 산수유



12인의 성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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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문화, 과학 및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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