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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두어 달을 배신감에 치를 떨며 보내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앉아서 세월을 죽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두어 달을 배신감에 치를 떨며 보내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앉아서 세월을 죽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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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기사] 뒤통수, 또 뒤통수... 부도덕한 식당주인이 됐다

그렇게 두어 달을 배신감에 치를 떨며 보내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앉아서 세월을 죽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친구는 베꼈건 어쨌건 방송 덕을 톡톡히 보며 대박 행진인데, 우리도 하루빨리 재오픈을 해야만 했다. 우리는 다시 집과 땅을 알아보러 다녔다. 원래 계획대로 작은 텃밭이라도 가꾸며 식당을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제주의 부동산 시세는 이미 가파르게 오르고 있었는데, 그래도 우리가 마련할 수 있는 돈으로 구옥 한 채는 장만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부동산 업자들이 너무 장난을 쳐댔다.

매물을 사겠다고 업자에게 전화하면 집주인과 연락이 안 된다고 차일피일 미루기 일쑤였고, 한 달을 미루다 통화가 되었다며 들려주는 대답은 매매가를 대폭 올려야 한다는 식이었다. 그렇게 물 건너간 집이 몇 채였고, 아주 저렴하게 나온 어느 구옥은, 물론 수리비가 몇 배로 더 들어갈 판이었지만, 집주인이 배 타러 갔다며 최소 서너 달 뒤에 돌아온다는 식이었다. 그래도 우리에게 맞는 집을 사기 위해 여유롭게 기다렸을 것이다. '착한 짬뽕' 사건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우리는 마음이 급해져 임대 자리를 알아보기로 했다. 이것이 첫 번째 오판이었다. 다 쓰러져 가는 옛날 집이라도 우리 소유의 집이 필요했다. 지금도 땅을 치며 후회하는 결정이지만, 그때 그 상황은 우리가 현명한 판단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우리는 제주 시내로 들어가기로 했다. 관광객뿐만 아니라 제주도민들도 '착한 짜장면'을 먹으러 오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이것이 두 번째 오판이었다. 얼마나 크나큰 오판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세를 얻은 가게는 제주 구시가지에 있었다. 원도심 또는 구제주로 불리는 지역으로 약간 한적한 서민 동네였다. 제주의 강남으로 불리는 신제주와는 20~30분 거리에 있었다. 신제주의 상가 임대 가격은 우리가 '피 빨리던' 평택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선택의 여지 없이 우리는 구제주에서 상가를 물색하러 다녔는데, 빈 상가가 드물었고, 그 드문 상가에서 그나마 마음에 든다고 고른 곳이 하필이면 2층이었다. 2층이라도 바깥에서 잘 보이면 괜찮겠지만, 2층부터 4층까지 칸칸이 불투명 유리창으로 덮인 옛날 건물이라 전면에 간판 달 자리도 없었고, 오래된 가로수 덕에 반 이상이 가려져 스티커라도 붙여본들 잘 보이지도 않을 상황이었다.

오픈을 앞두고 생긴 두 가지 사건, 아득했다

2층에 위치한 새 가게는 간판을 두 개나 달고도 사람들이 잘 찾지 못했다.
 2층에 위치한 새 가게는 간판을 두 개나 달고도 사람들이 잘 찾지 못했다.
ⓒ 류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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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뷔페 식당을 하던 자리였고, 그 뷔페 식당의 돌출형 간판에 우리 가게 이름을 덧씌울 수밖에 없었다. 영업 기간 내내 가게 앞까지 와서도 가게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전화를 걸 정도로 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악수를 두고도 그 상가를 임대한 것은,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방송 때문이었다. 우리 방송을 본 수많은 사람들의 응원에 감격에 감격을 느꼈었기에 어느 구석에서 문을 열어도 우르르 몰려와 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약속했던 재촬영만 이루어진다면 우리도 '착한 짬뽕'처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손님들이 열렬히 줄을 서서 먹어줄 것만 같았다.

우리는 다시 두 달 동안 인테리어에 매달렸다. 20년 동안 한 주인이 운영하던 식당이라 낡고 촌스러웠다. 그 식당은 무척 넓었다. 최대 100명까지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그렇게 큰 식당을 원했던 건 아니었는데, 당시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었다. 너무 작거나 너무 크거나. 중식당을 고를 때 우선적으로 봐야 할 조건은 주방이었다. 중식당의 주방은 최소 10평은 차지했다. 너무 작은 식당은 주방이 코딱지만 했으니, 결국 너무 큰 식당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공간이 넓어 인테리어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 사이에 우리 신변에도 큰일들이 일어났다. 조용히 가게 오픈에만 전념하며 시간을 보냈으면 좋았으련만, 인생사 마음대로 되는 게 몇 가지나 있겠나. 한 가지 큰일은 둘째 임신이었다. 아이야 건강하게 잘 낳아서 애지중지 잘 키우고 있지만, 그땐 오로지 가게 일에만 매달려야 했을 때였다. 인테리어는 거의 내 손으로 해결해야 하는 종목이었다. 남편은 주방을 뜯어고치는 데에만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온갖 힘을 써야 하는 일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는 판국에 아이라니, 임신 사실을 알고서는 앞이 깜깜했다.

또 다른 큰일은 10년 키우던 개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우리는 그 무렵 가게에서 몇 달을 살았다. 따로 살림집도 세를 얻었으나, 이사 기간이 맞지 않아서 가게에 딸린 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결혼 전부터 키우던 세 마리 개 중에서 한 마리는 마라도에서 평택으로 이사한 그해 겨울에 1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나머지 두 마리는 다시 제주로 함께 이사를 왔다. 그 중 한 마리는 걸어다니는 법이 없이 전속력으로 뛰기를 좋아하는 여우 사냥개 종이었다. 온종일 공사 소음과 먼지 속에 있다 하루 한 번 잠시 산책을 다녀오는 게 고작이었으니, 그 아이들 일생 중 가장 답답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유난히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매달리기에 남편이 데리고 나갔다가 그만 사고가 났다. 어쩌다 남편과 '싸인'이 맞지 않아 도로로 뛰어든 녀석은 저편 사거리에서 신호를 받고 빠르게 달려오던 차에 치어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가게에서 일을 하던 나는 공기를 찢어놓는 급브레이크 소리에 깜짝 놀랐다가 거의 5초 만에 그 굉음이 내 개와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달려 내려갔다. 계단 아래에서 나를 본 남편은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하게 말렸다. 남편의 표정은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계단에 털썩 주저앉은 채 나는 울부짖기 시작했고, 도로로 나간 남편은 개를 안고 가게로 올라가서 상자에 담고는 나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다.

오른편에 있는 방에 두 달 사는 동안, 둘째를 가졌고, 개를 잃었다.
 오른편에 있는 방에 두 달 사는 동안, 둘째를 가졌고, 개를 잃었다.
ⓒ 류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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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이란 걸 나는 처음으로 해보았다. 그 개, 봄이의 죽음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서울에서 외롭고 힘들게 직장생활을 했을 때 곁에 있어 준 녀석이었다. 우리 할매 아파 시골에 내려가 살 때도 곁을 지키던 녀석이었고, 내가 결혼을 해서 제 바로 옆자리를 뺏기고도 착하게 살아준 녀석이었다. 내 첫 아이에게 순하디순한 친구가 되어 주었고, 장사하느라 매일 밤늦게 귀가하는 우리를 하염없이 기다려준 녀석이었다.

그렇게 늙어 죽을 때까지 함께할 줄 알았는데, 죽어 버리다니. 나는 땅바닥에 널브러진 채 울부짖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뱃속에 든 아이가 생각나 그만 울어야 하는데 싶으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바로 다음 날이면 살림집으로 옮기기로 했는데, 그날을 하루 앞두고 그렇게 가 버리다니, 미안하고 미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모든 일상사를 블로그에 올리던 때였음에도 나는 봄이의 죽음은 알리지 못했다. 그 후 1년이 넘도록 봄이를 잘 아는 지인들에게조차 알리지 못했다. 말을 하는 그 순간에 몰려들 슬픔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액운을 이겨내고 우리 힘으로 다시 서 보려고 애를 쓰던 그 봄에 그렇게 한 생명이 오니, 한 생명이 가는 거였다.

그 사고 일주일 후에 가게를 열었다. 뱃속 아이로 몸은 천근만근 힘들고, 죽은 개 때문에 마음도 천근만근 힘들었지만, 어쨌든 방송 덕은 좀 보겠거니, 기대 만발하여 문을 열었다. 그러나 웬걸, 블로그에서 우리를 열렬히 응원하는 사람들은 다 멀리 살았고, 심지어는 해외 교포도 많았다. 제주에 사는 소수의 팬들만 오픈을 기다렸다 달려와 주었을 뿐, '오픈빨'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거니 기다렸지만 때때로 일시적인 쏠림 현상만 있을 뿐, 대체로 한산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우리는 또 실패했음을 알았다.

당시 <먹거리X파일>에 방영된 '착한 식당'을 순례하는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아왔다가 이렇게 한산한 '착한 식당'은 처음이라며 놀라워했다. 다 줄 서서 먹는데 여기는 왜 이러냐고 안타까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순례까지는 아니더라도 조미료 안 넣고 장사하다 쫄딱 망한 사연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방송에서 재오픈 소식만 기다리다 검색에 검색을 해서 겨우 찾아왔다며, 왜 재촬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우리도 알고 싶은 일이었다.

방송은 우리를 철저히 외면했다. 제주 오픈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딱 한 번, 팀장 피디가 전화를 했다. 여전히 '착한 짬뽕'에 대한 입장이나 요구사항이 변함이 없냐는 질문이었다. 당연히 없다고 했다. 그는 '착한 짬뽕' 사장에게 의사를 다시 물어보겠다고 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두 번 다시 전화도 오지 않았다. 우리 가게에 대한 재촬영 문제가 '착한 짬뽕'의 의사에 달린 일이었다니! 방송에서 재촬영을 하자고 하면 못 이기는 척 하려고 했지만, 자존심 구겨가며 재촬영해 달라고 매달릴 수는 없었다.

이영돈 피디에게 찍혔던 것은 아닐까. '착한 짜장면' 주인과 '착한 짬뽕' 주인과 방송 책임 피디, 이렇게 만나기로 했던 3자 대면이 이영돈 피디의 일방적인 약속 취소로 물거품이 되었고, 그 사실을 블로그에 공개해 이영돈 피디는 비난의 화살을 맞았다. 우리는 피해자로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먹거리X파일>은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약속했던 제주 오픈 후 재촬영도 하지 않았고, '착한 식당' 인증패도 주지 않았다.

'착한 짬뽕'이 그렇게 오픈만 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여타의 '착한 식당'처럼 돈 좀 벌었을 텐데 말이다. 그 돈으로 최소한 빚은 다 갚지 않았을까 말이다. 지금도 빚 갚느라 허덕이는 일은 없지 않겠느냐 말이다. 우리가 한 유일한 조치는 톳짜장면에 대한 특허를 등록하는 일이었다. 특허 등록도 직접 하면 어렵다 해서 정말 없는 살림에 변리사에게 백만 원도 넘는 돈을 주고 등록을 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었지만, 왜 특허도 안 했냐는 사람들의 걱정에 그거라도 해야 우리의 권리를 되찾아올 것만 같았다. 그 뒤 '착한 짬뽕'에서는 밀가루 반죽에 넣던 톳가루 대신 천년초 선인장 가루로 바꿨다나 어쨌다나.  

점점 줄어드는 손님... 자신감을 잃었다

60여 평의 오래된 가게를 손수 리모델링하는 데 큰 공을 들였으나, 가게는 자주 한산했다.
 60여 평의 오래된 가게를 손수 리모델링하는 데 큰 공을 들였으나, 가게는 자주 한산했다.
ⓒ 류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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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을 들은 동네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왔다가 다시는 오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조미료가 안 들어갔으니, 입맛에 안 맞는 걸 어떡하나. 우리는 제주도 사람들의 입맛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나마 단골이 되고 싶어하며 자주 찾아오던 손님은 20분 거리에 사는 신도심 사람들로 대부분 육지 이주민들이었다. 그러나 섬 생활은 20분 거리도 멀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몇 달만 살아보면 다 비슷해진다. 서울에서는 한 시간 거리도 마다않고 맛집을 찾아가지만, 제주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감탄을 하며 먹던 사람들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제주도민을 위해 시내에 가게를 차렸건만 도민은 외면하고, 애써 찾아오려는 여행객들에겐 여행 코스와 너무 동떨어져 있어 귀한 시간을 쪼개지 않으면 접근조차 어려웠다. 여행객들에겐 시골 구석은 찾아가기 쉽지만, 시내 구석은 큰마음 먹어야 가능한 곳이었다. 알고 보니 우리는 제주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고작 마라도에 살았을 뿐인데, 제주를 다 아는 듯이 오만을 부렸던 것이다. 그리고 방송에 너무 기댔던 것이다. 비록 망했어도 자존심으로 버텼는데, 그렇게 서서히 자신감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경제매거진 <이코노믹리뷰>에도 함께 실립니다. 이 이야기는 2013년에 일어난 일이며, 현재 '마라도에서온자장면집'은 평택이 아니라 제주도 화순에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착한식당 , #자연주의짜장면, #마라도에서온자장면집, #NON-GMO, #NO-M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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