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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이 20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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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이 드디어 최순실씨에 대해 입을 열었다. 지난 20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면서다. 지난 9월 22일 미르·K스포츠재단 의혹을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으로 규정한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으니 무려 한 달여 만의 입장 표명이다. 자신에게 불리한 사안에 대해서는 잘 언급하지 않는 대통령이 왜 이례적으로 입장표명을 한 것일까.

그 사이 사태가 커지긴 커졌다. 대통령의 말과는 달리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애초 대통령의 퇴임 이후를 위한 측근들의 공익사업으로 여겨지던 의혹이 최순실씨 개인의 부정축재 사업으로 비화됐고, 여기에 권력지형을 허무는 국정농단의 정황까지 포착됐다. (이 사실을 대통령이 알고 있었는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사정이 이럴지니 아무리 수십 년을 동락한 최측근의 일탈이라 해도 마냥 눈감고 있을 수는 없었을 터다.

게다가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에 대한 이화여대의 특혜 의혹 파문으로 총장이 사퇴하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대통령 지지율이 취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대통령 지지율 급락은 그동안의 국정 난맥에 대한 국민 피로도가 비등해졌다는 방증이다. 이번 의혹으로 국민 여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브레이크를 걸어야 했을 것이다.

"누구라도 불법 있다면 엄정 처벌"이라는 말만

 서울 강남구 학동로 '재단법인 미르'와 강남구 언주로 'K스포츠재단'.
 서울 강남구 학동로 '재단법인 미르'와 강남구 언주로 'K스포츠재단'.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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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대통령의 인식과 태도가 영 이상하다.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자신의 최측근이 개입된 부정축재 의혹으로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있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최순실씨가 굴지의 기업들로부터 단기간에 수백억 원에 달하는 기금을 모금하고, 그의 입김에 정부 부처와 대학이 놀아나는 스캔들이 벌어졌음에도 대통령의 사과는 한마디도 없다.

지나가는 말이라도 '유감' 내지는 '송구' 따위의 말을 섞을 법도 하건만 대통령은 이마저도 생략했다. 그러면서 "만약 어느 누구라도 재단과 관련해 자금 유용 등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면 엄정히 처벌받을 것"이라며 제3자적 관점에서 말했을 뿐이다. 오히려 의혹의 중심에 있는 두 재단과 모금에 참여한 기업들을 변호하고 두둔하기에 급급했다. '역시나'다. 대통령은 이 사태의 본질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다.

대통령의 최측근이 개입된 이번 파문의 원인은 무너진 공직기강과 비선실세의 농단을 막지 못한 청와대 인사시스템에 있다. 대통령은 친인척과 축근의 비위를 감찰하겠다며 자신이 임명한 특별감찰관을 측근 보호를 위해 단호히 내쳤던 사람이다. 자신의 말을 스스로 부정하는 대통령의 이율배반은 공직기강의 해이와 청와대 인사시스템의 허술함을 짐작케 한다. 그렇기에 일개 개인에 불과한 최순실씨가 대기업과 정부 부처, 대학을 마음껏 농락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 아닌가.

청와대 인사시스템의 허술함이 낳은 참극... '비선실세 국정 농단'

딸 마장마술 경기 지켜보는 최순실과 정윤회 박근혜 대통령의 의원 시절 비서실장인 정윤회(왼쪽)씨와 전 부인 최순실씨가 2013년 7월19일 경기 과천시 주암동 서울경마공원에서 딸이 출전한 마장마술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 딸 마장마술 경기 지켜보는 최순실과 정윤회 박근혜 대통령의 의원 시절 비서실장인 정윤회(왼쪽)씨와 전 부인 최순실씨가 2013년 7월19일 경기 과천시 주암동 서울경마공원에서 딸이 출전한 마장마술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 사진제공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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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2014년 정국을 뒤흔들었던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 당시 대통령이 앞장서서 관련 사실을 엄중히 조사하고 책임자를 일벌백계했더라면 이런 사달이 다시 벌어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정윤회씨 감찰보고서를 '찌라시'로, 문서 유출을 '국기 문란'으로 규정했다. 의혹 차단을 위해 강경 대응을 하면서 동시에 검찰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은 그렇게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최순실씨 의혹은 결국 당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비선실세의 국정 농단이 다시 곪아 터져 나온 것이다. 최고통수권자로서 공직기강과 청와대 인사시스템을 바로 세우지 못한 책임이 대통령에게 있음은 불문가지다. 당연히 국민 앞에 사과하고 이제라도 의혹에 대해 진상규명을 철저히 해야 함이 옳다. 그러나 이 나라의 대통령은 이번에도 '역시나'다. 머리 숙여 사과를 해도 모자랄 시국에 딴 세상 보듯 본질과 동떨어진 말들만 늘어놓고 있다.

자신과 관련된 일을 남의 일 말하듯 하는 화법을 가리켜 '유체이탈 화법'이라고 칭한다. 돌이켜 보면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은 그 역사가 꽤나 오래 됐다. 대통령이 되기 훨씬 이전부터 그는 유체가 이탈되는 장면을 자주 연출하고는 했다. 자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정수장학회를 두고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가 하면, 이명박 정부의 국정철학을 공유하고 그에 동조했던 당사자가 어느날 갑자기 "MB정부의 민생은 실패"라고 각을 세우기도 했다. 이 모두 유체가 이탈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장면들이다.

대통령님, 지금은 상황 정리할 때가 아닙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22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2016 국가재정전략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4월 22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2016 국가재정전략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모습.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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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보다 심각한 것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그의 유체이탈 증세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의 '악어의 눈물' 논란을 제외하면 대통령이 자신의 책임을 인정한 경우는 찾으려야 찾아볼 수가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책임 정치가 미덕인 대통령제에서 이 나라의 대통령은 언제나 책임으로부터 비켜나 있다. 책임져야 할 일이 발생할 때마다 대통령은 특유의 유체이탈 화법으로 국민들을 할 말 잃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비선실세인 최순실씨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자 세간에는 대통령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무려 한달여 만에 입을 연 대통령은 '역시나' 유체이탈 화법을 시전하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상황정리에 들어갔다.

이런 대통령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국민들은 대통령의 진솔함과 책임있는 자세를 원하는 것이지, 유체이탈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다. 더 이상 국민들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국민들이 아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민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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