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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는 아주 작은 섬나라지만 프로 레슬링 경기도 열렸다. ⓒ 한성은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이대로

- 이상은, '언젠가는' 노랫말 중에서

얼티밋 워리어, 헐크 호건, 홍키동키맨, 밀리언 달러맨... 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들의 경기 장면은 생생하게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 비디오 대여점에서 WWF 경기 테이프를 빌려다가 친구들과 모여서 참 열심히도 봤었다. '진짜다, 아니다'를 두고 심각한 언쟁을 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프로 레슬링 경기를 제대로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WWF는 슬램덩크와 월드컵에 밀려 나의 관심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WWF 섬머슬램 88'을 오래된 놀이공원에 방치된 녹슨 범퍼카처럼 기억하고 있는 내가 몰타에서 프로레슬링(아래 PWM) 챔피언을 만났다. 우리는 어학원의 사제지간이었다.

프란체스코 : 한국에서는 문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구칸 : 제가 만약 선생님처럼 문신이 있었다면 저는 교사 생활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프란체스코 : 나는 프로레슬링 챔피언이야. 이 정도는 필수지!
발렌티나 : 문신이 얼마나 멋진데! 자기를 표현하는 멋진 방법이야.
구칸 : 그렇긴 한데 나는 아직까지 문신한 소아과 의사를 만난 적은 없어.
발렌티나 : 우크라이나에서는 문신 없는 사람 찾기가 더 어려울 걸?
서로 자기 문신이 더 멋지다며 자랑하던 발렌티나와 프란체스코 ⓒ 한성은
"Super Cool!(진짜 멋지다!)"

2016 PWM 챔피언 프란체스코(Francesco)와 우크라이나의 의과대학에서 아동 의학을 공부하는 발렌티나(Valentina)가 서로의 문신을 보여주며 외쳤다. 문신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서 문신이 있는 어학원 선생님과 의사 선생님에 대해서 아무런 편견이 없다는 그 사회가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지? 몰타 프로레슬링

이번 주말에 PWM 경기가 열린다고 했다. 프란체스코 아니 챔피언 돈(Don)의 경기는 챔피언 벨트를 걸고 벌어지는 메인 매치였다. 발렌티나가 "Super Cool!"을 외치며 다 같이 응원을 가자고 난리다. 이 조그만 나라에서 프로 레슬링 경기라니. 몰타에는 정말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었다.

경기는 몰타 국제공항 바로 옆에 있는 '몬테크리스토(Monte Kristo Estate Malta)'에서 열렸다. 몰타 어디나 그렇듯 경기장은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건물 안에 있었다. 평소에는 고급 레스토랑으로 운영하지만, 합창 대회나 콘서트도 열리는 다목적 공간이라고 했다.

경기장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 단위 관객들이 많았다. 경기 시작 전에 '어린아이들이 이런 폭력적인 스포츠를 봐도 되는 거야?'라고 했다가 일행들에게 노인네라며 놀림 받았다. 스포테인먼트(Sportainment)라고 했다.

내가 초등학교 때 헐크 호건을 응원했던 것은 생각도 못 하고 속된 말로 '꼰대' 같은 생각이 앞섰다. 그런데 경기가 시작되고 아이들이 "You suck!"이라고 외치기 시작할 때에는, 옆에 발렌티나도 깜짝 놀라며 이건 아닌 것 같다고 같이 꼰대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다음 수업 시간에 우리는 챔피언 선생님과 'Suck'의 의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했다.

화려한 조명 속에서 선수들이 입장하고 경기가 시작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링이었다. 폭력을 조장하거나 미화하는 모든 걸 아주 싫어해서 프란체스코가 나오지 않았다면 아마 프로 레슬링 같은 것을 보러 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본 프로레슬링 경기는 생각만큼 폭력적이거나 잔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코믹한 요소가 더 많았다. 물론 폭력을 바탕으로 한 스포츠임은 분명하지만, 관객과 배우들 모두 이것이 실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공유하면서 즐기고 있었다. 폭력에 대해서 찬성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적어도 UFC 경기를 보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날 경기중 하이라이트였던 챔피언 ‘DON’의 타이틀 매치 ⓒ 한성은
프로 레슬링 경기는 코미디 프로그램처럼 경기 내내 웃음을 주었다. ⓒ 한성은
그리고 프로 레슬링 경기에는 이야기가 있었다. 무턱대고 두 명이 나와서 경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매 경기 선수들이 맡은 역할과 경기 구성이 인상적이었다. 첫 경기는 초보자들의 대결이었다. 실제로 첫 무대라고 했다. 관중들은 어느 쪽이든 경기 형세가 불리한 쪽을 응원했다.

두 번째는 남자와 여자의 대결이었다. 경기 내내 여자 선수를 무시하던 남자 선수가 결국 여자 선수에게 패배했다. 관중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자 선수를 응원했다. 세 번째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대결이었다. 아이들은 악역을 맡은 선수에게 'You suck!'을 외쳐댔다. 결국 착한 사람이 이겼다. 마지막 경기는 챔피언과 도전자의 경기였다. 네 경기 중 가장 화려한 기술들을 주고받은 끝에 프란체스코 선생님이 PWM 타이틀을 지켜냈다.

모든 경기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선수들이 관중들과 기념 사진을 찍고 있었다. 선수들은 땀을 그야말로 비 오듯이 흘리고 있었다. 이 경기를 위해서 선수들은 체육관에 모여서 매일 운동을 한다고 했다. 특히 경기 전에는 동선 하나하나를 점검하며 수십 번씩 리허설을 한단다. 부상 위험이 크기 때문이었다. 그냥 몸 좋은 사람들이 링 위에 모여서 대충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히 예술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선수들은 어린 팬들을 위한 서비스도 잊지 않았다. ⓒ 한성은
프로 레슬링이라고는 하지만 선수들이 정말로 레슬링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프란체스코 선생님처럼 다들 직업이 있었다. 이를테면 투잡(two jobs)이었다. 프로 레슬링은 그들의 여가 활동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실력은 미국의 프로 레슬링 선수들 못지않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열정을 갖고 사는 모습이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동심으로 돌아가는 '뽀빠이 빌리지'
지중해를 배경으로 그림처럼 자리 잡은 뽀빠이 빌리지 ⓒ 한성은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몰타에는 테마파크도 몇 군데나 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뽀빠이 빌리지(Popeye Village)'이다. 시금치를 먹으면 힘이 난다는 올리브의 남자 친구, 바로 그 뽀빠이다.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영화 <뽀빠이>(1980)의 세트장이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어 테마파크로 이용되고 있었다. 지은 지 40년 가까이 된 세트장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도 대단했고, 여전히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는 것도 대단했다.

사실 어릴 때 뽀빠이 만화 영화를 본 적이 있긴 하지만, 뽀빠이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은 없었다. 입장료도 비쌌다. 하지만 어학원 친구들이 보여 준 뽀빠이 마을의 사진이 너무 예뻐서 도저히 안 갈 수가 없었다. 에메랄드빛 바다 곁에 동화 속 집들이 서 있는 풍경은 모두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몰타에서는 웨딩 사진 촬영지로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했다.

마을에는 만화 속에 나오는 집들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에메랄드빛 바다를 끼고 있어서 참 예뻤다. 뽀빠이 테마파크답게 뽀빠이와 올리브가 서서 사람들을 반겨주었다. 같이 장난치며 사진도 찍고 있으니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아이들을 위한 인형극도 있었고, 매시간 울리는 음악 소리에 맞춰 다 같이 건강 체조도 췄다. 뽀빠이 빌리지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상영하고 있었다.

마을은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다. 애초에 테마파크가 아니라 영화 촬영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긴 세월 탓에 대체로 많이 낡아 있었다. 하지만 영화 개봉이 1980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모든 시설이 관리가 참 잘 되고 있었다. 동화 속 마을이니까 낡은 것은 또 낡은 것대로 멋스러웠다. 사진으로 봤던 마을 전경이 그렇게나 아름다웠던 것은 긴 세월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뽀빠이와 올리브가 살고 있는 동화 속 마을에서 모두가 동심으로 돌아갔다. ⓒ 한성은
“좀 깎아주세요~” 발렌티나와 구칸의 즉석 상황극 ⓒ 한성은
느긋하게 즐기는 테마파크 뽀빠이 빌리지 ⓒ 한성은
사실 사람들이 뽀빠이 빌리지를 찾는 이유는 뽀빠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을 안에 작지만 정말 멋진 해변이 있었다. 해변이 절벽 아래에 숨어 있어서 비밀스러운 느낌도 들었다. 입장료에 선베드 이용료도 포함되어 있어서 나는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그늘 밑에서 낮잠을 잤다.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 친구 클로이(Cloe)는 고등학생답게 책을 펼치고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 수영을 잘하는 플로리안(Florian)과 발렌티나(Vallentina)는 물 속에서 나올 생각을 않았다.

테마파크라고 하면 늘 놀이기구를 떠올렸는데, 느긋하게 쉬면서 즐기는 테마파크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몰타는 테마파크도 야간 개장 같은 것이 없었다. 한여름에는 해가 밤 9시는 되어야 지는데, 뽀빠이 빌리지의 폐장 시간은 오후 5시 30분이었다. 해는 여전히 중천에 떠 있는데 다음에 다시 보자는 작별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참 몰타다운 폐장 시간이었다.

아프리카 느낌이 물씬! 마샬 슬록
아프리카의 작은 항구를 옮겨 놓은 것 같은 마샬 슬록 ⓒ 한성은
몰타는 옐로우 스톤으로 지은 집과 알록달록 몰타 발코니만으로도 이국적이지만, 아프리카의 작은 항구를 닮아 특히나 더 이국적인 풍경을 가진 곳이 있다. 몰타의 푸른 바다 위에 몰타 발코니만큼 알록달록한 전통 배 '루쯔(Luzzu)'가 떠 있는 항구 도시 마샬 슬록(Marsaxlokk)이다.

그리고  멋진 항구 옆으로 매주 일요일 몰타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 선데이 피쉬 마켓(Sunday Fish Market)이 열린다. 시장에는 상어, 참치, 연어 같은 생선뿐만 아니라 과일부터 생활 잡화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몰타에 그야말로 없는 것 빼고 다 파는 시장이었다.

수산 시장 옆으로는 유명한 레스토랑도 줄지어 있었다. 이국적이고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맛있는 생선 요리를 먹고 싶다면 평일에 가면 되지만, 북적거리는 재래시장의 활기를 느끼고 싶다면 일요일에 가야 한다. 시장에는 관광객도 많지만, 몰타 현지인들도 많았다. 덕분에 대부분 영어를 사용하는 발레타나 슬리에마와 달리 마샬 슬록에서는 몰타어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마샬 슬록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루쯔'였다. 작고 알록달록한 루쯔의 뱃머리에는 '루쯔 아이(Luzzu eye)'라고 부르는 눈이 그려져 있는데, 이 눈이 거친 바다로부터 배를 지켜 준다고 한다. 루쯔 아이는 오시리스의 눈(eye of osiris)이라고도 불렀다. 몰타는 지리적으로 아프리카와 가까워서 아프리카의 흔적을 가진 문화가 많았다. 루쯔 아이는 몰타 십자가와 함께 몰타를 대표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몰타의 기념품 가게에 가면 루쯔 아이를 이용한 다양한 상품을 쉽게 볼 수 있다.
거친 바다로부터 배를 지켜주는 ‘루쯔 아이’ ⓒ 한성은
일요일마다 열리는 수산 시장에서는 싱싱한 해산물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 ⓒ 한성은
우리나라 시골 장터 같은 마샬 슬록의 수산 시장 ⓒ 한성은
시장 풍경은 우리나라 시골 장터와 비슷했다. 작은 가판 위에 커다란 참치부터 새우, 오징어, 홍합 등을 놓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상어도 팔고 있었는데 익숙하지 않은 생선이라 좀 무섭기도 했다. 재래시장답게 대체로 일반 마트보다 가격이 저렴했다. 문제는 구입을 하더라도 숙소까지 가져가는 것도, 가져가서 요리를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서 눈독만 들이다가 결국은 포기했다.

수산물 외에도 다양한 간식, 옷, 기념품 심지어 전자제품이나 주방용품도 팔고 있었다. 그냥 눈으로 훑어도 대체로 품질이 좋지 않았다. 전자제품은 유명한 상품을 외형만 그대로 흉내낸 복제품들이었다. 시장에서 파는 상품들보다 시장에 모인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광장의 노천카페에는 빈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일요일은 모두 마샬 슬록 가는 날! 어디나 사람들이 많았다. ⓒ 한성은
마샬 슬록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쉬워서 작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한국에서는 맛보기 힘든 황새치(Swordfish) 구이와 새우, 참치요리를 주문했다. 몰타에 오는 관광객들이 '일요일은 모두 마샬 슬록 가는 날!'을 외치며 다니는지 어디나 인산인해였다. 덕분에 주문한 음식이 나올 때까지 한 시간이나 기다렸다. 원래도 몰타에서 음식을 주문하면 참 오래 걸렸는데, 마샬 슬록의 한 시간은 그중에서도 단연 1등이었다.

게다가 몰타 사람들은 간을 아주 짜게 해서 음식을 먹기 때문에 해산물 요리도 당연히 엄청 짤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요리들이 모두 담백하게 조리되어 나왔다. 재료가 싱싱해서인지 아주 맛있었다. 그야말로 분노가 사라지는 맛이었다. 다만 해산물 요리라는 게 양이 참 적어서 일행들은 음식이 나오자마자 게눈 감추듯 접시를 비워버렸다. 한 시간을 기다린 음식은 십 분 만에 뱃속으로 사라졌지만, 마샬 슬록의 해산물 요리는 엄지척! 이었다. 역시 여행에서 식도락만큼 즐거운 일은 없었다.
엄지척! 게눈 감추듯 뱃속으로 사라진 요리들 ⓒ 한성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블로그 '타박타박 아홉걸음' http://ninesteps.tistory.com에도 동시에 게재되었습니다.

태그:#타박타박, #아홉걸음, #배낭여행, #세계일주, #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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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란 저에게 아이들이 "선생님"이라고 불러줍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은 성실한 여행자가 되어야겠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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