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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 바다가 있다면 이런 풍경이 아닐까? ⓒ 한성은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 밥 딜런, 'Knockin' on heaven's door' 노랫말 중에서

"천국의 주제는 하나야. 바다지."

나는 인류 보편적으로 보았을 때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하지만 현대 의학의 자비로움으로 아직 시한부 선고를 받지는 않았다.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의 루디와 마틴처럼 의학적인 사형 선고를 받지는 않았지만, 평소에도 말이 많은 나는 천국에서도 수다를 멈출 수 없기 때문에 바다에 가야 했다. 우선은 천국에 갈 만한 삶을 살아야겠지만, 멋진 바다를 보지 못했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것도 천국에 모인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만한 바다가 나는 필요했다.

관광객들이 코미노 섬을 찾는 이유 '블루 라군'
코미노 블루 라군으로 가는 작은 페리 ⓒ 한성은
블루 라군(Blue Lagoon)은 몰타에서 가장 멋진 해변이다. 이 멋진 해변은 몰타(Malta) 섬과 고조(Gozo) 섬 사이에 있는 무인도인 코미노(Comino) 섬에 있다. 관광객들이 코미노 섬을 찾는 이유는 오직 블루 라군 때문이다. 그래서 블루 라군의 수온이 낮아져 해수욕을 할 수 없는 겨울에는 코미노 행 페리를 운행하지 않는다. 블루 라군을 보기 위해서는 5월부터 10월 사이에 몰타를 방문해야 한다.

몰타에서 222번 버스를 타면 북쪽 끝 치케와(Cirkewa) 항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고조 행 페리와 코미노 행 페리를 탈 수 있다. 치케와를 출발한 작은 보트는 15분 정도면 코미노 섬에 도착한다. 코미노 섬으로 가는 뱃길은 파도가 생각보다 거칠어 보트는 그야말로 나는 듯이 앞으로 나갔다. 보트가 파도를 올라탈 때마다 승객들은 공중부양을 했다. 블루 라군은 코미노 섬의 서쪽 끝 해안 절벽 사이에 꼭꼭 숨어 있어서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다. 해안선을 따라 한참을 가다 보니 에메랄드 해변이 그야말로 짠! 하고 나타났다.

천국에도 바다가 있다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블루 라군은 수심이 얕고 파도가 거의 없어 커다란 실내 수영장 같았다. 새하얀 모래로 된 바닥에는 산호초 같은 수생식물이 전혀 없어서 물고기도 별로 없었다. 지중해의 작렬하는 태양 빛을 받은 바다는 스스로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물빛을 본 적은 없었다. 물빛도 아름답지만, 반대편에 있는 코미노토(Kemmunett) 섬이 지중해를 막고 서 있어서 더욱 비밀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예상은 했지만 관광객도 정말 많았다. 아침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파라솔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돌섬이라 블루 라군에는 그늘이 전혀 없었다. 무인도인 데다 여름 시즌에만 사람들이 찾기 때문에 편의 시설이 거의 없고, 간단한 간식을 파는 작은 매점이 전부였다.

그리고 어디나 그렇듯 여름 대목을 노리는 상인들은 파라솔과 선베드를 비싼 가격에 대여하고 있었다. 처음 블루 라군을 갔던 날은 적당한 바위 위에 자리를 펴고 온종일 놀았다. 파라솔을 대여할 돈도 없었지만, 온종일 바닷속에서 물놀이를 하느라 물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었다.
블루 라군의 전경(위)과 코미노 선착장(아래) ⓒ 한성은
블루 라군의 바다는 파도가 없고 수온이 높아서 물놀이 하기에 딱 좋았다. ⓒ 한성은
블루 라군은 하늘빛을 가진 바다와 바다 빛을 가진 하늘이 맞닿아 있었다. 요트들이 한가롭게 떠 있고, 제트 보트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지중해로 내달렸다. 물놀이를 즐기지 않는 사람들은 저마다 언덕 위에 커다란 수건을 펼쳐 놓고 피부를 구릿빛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제 나도 천국에서 할 이야기가 생긴 것이다.

이때까지는 몰랐다. 몰타의 햇볕은 지금껏 보던 그것과 차원이 달랐다. 몰타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서 나는 용감했다. 아니 무식했다. 원래 까만 피부를 가진 데다가 여행을 시작하고 이미 햇볕에 그을릴 만큼 그을려서 자외선 따위는 무섭지 않았다. 심지어 어학원에서 만난 콜롬비아 친구들보다 내가 더 까맸다.

돌아온 이튿날부터 피부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스치기만 해도 너무 아파서 옷을 입고 있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같이 갔던 친구의 등을 보고 나서야 몰타의 햇볕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됐다. 등에 손이 닿지 않아서 어깨까지만 자외선 차단제를 바른 친구의 등에 선명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은 두 달이 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던 나는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이후로 나에게 한국 사람이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몰타의 태양은 무서웠지만, 그렇다고 블루 라군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시 블루 라군에 갔던 날은 무엇보다 먼저 파라솔과 선베드를 대여했다. 덕분에 그날은 발가락만 새까맣게 탔다.
몰타에서는 자외선 차단제를 꼼꼼하게 발라야 한다. (사진협조 : 홍광표) ⓒ 한성은
몰타 사람들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고조 섬'

몰타는 유럽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여름 휴양지다. 그런데 정작 몰타 사람들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이는 몰타 섬을 떠나 조용한 고조 섬으로 휴양을 간단다. 고조 섬은 몰타 사람들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곳이라고도 했다. 고조 섬도 최근에는 개발이 한창 진행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몰타 섬에 비하면 30년 정도 늦은 시간 속에 살고 있었다. 몰타의 모든 정치, 경제의 중심이 몰타 섬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몰타 사람들(Maltese)과 고조 사람들(Gozitan)은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도 달랐다. 얼마 전까지는 버스 체계도 달라서 몰타 버스 카드를 고조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단다. 몰타는 세계에서도 가장 작은 나라들 중 하나인데, 그 안에서도 지역감정이 있다고 하니 씁쓸했다. 어쩌면 무리 생활을 하는 인간의 본능인 것 같기도 하다.

몰타에서 고조로 가는 방법은 코미노 섬과 같다. 치케와 항에서 고조의 임자르(Mgarr)로 가는 페리를 타면 된다. 고조 행 페리에는 자동차도 실을 수 있다. 고조가 작은 섬이기는 하지만, 몇 개의 시내버스 노선과 시티투어 버스가 운영하고 있을 정도라서 걸어 다니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몰타로 돌아가는 페리가 늦게까지 운행을 하지 않아서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며 하루 만에 고조 섬 전체를 돌아보는 것은 힘들었다.

그래서 여행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시티투어 버스를 이용했다. 이층 버스에 앉아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다니는 관광객들을 언제나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기만 했는데, 드디어 나도 초호화 관광을 하게 된 것이다.
고조 섬의 임자르 항 전경 ⓒ 한성은
고조 섬 여행은 시티투어 버스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 한성은
첫 번째 목적지는 고조의 행정 중심 빅토리아(Victoria)였다. 발레타와 마찬가지로 빅토리아도 지중해 패권 다툼의 한복판에 있었던 몰타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요새다. 게다가 원래 이름은 라바트(Rabat)였는데 몰타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1887년에 영국 정부가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도시의 이름을 바꿨단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그런 일이 흔했던 시기이니 이해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고유한 지명을 빼앗긴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까?

더 어이없는 일은 다른 데서 생겼다. 빅토리아는 요새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고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그래서 바깥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이층 버스를 타고 신나서 일행들과 웃고 떠들고 있는 사이에 그만 빅토리아를 지나친 것이다. 고즈넉한 도로 위로 다음 목적지였던 타 피누 바실리카 성당(Ta' Pinu Basilica)이 나타나고 나서야 빅토리아를 지나쳤다는 것을 알게 됐다. 버스에서 내리지를 못 해서 빅토리아를 못 갔다. 빅토리아는 인연이 아니었던 것 같다. 다음을 기약하고 타박타박 성당으로 들어갔다.
저 멀리 타 피누 바실리카 성당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빅토리아를 지나친 것을 깨달았다. ⓒ 한성은
아픈 사람을 낫게 해준다는 기적의 성당 ⓒ 한성은
타 피누 바실리카 성당은 아픈 사람을 낫게 해주는 기적의 성당으로 유명한 곳이다. 성모 마리아의 목소리를 듣고 이곳에 성당을 지었는데, 이후로 이곳에서 소원을 빌어 이룬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드넓은 벌판에 혼자 우뚝 선 성당은 그 모습만 봐도 신자들의 소원 하나 정도는 들어줄 것 같았다. 성당 제대에는 일반적인 성당과 달리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 중앙에 모셔져 있었다. 그리고 좌·우측 감실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이 적힌 액자와 그들이 사용하던 의족, 의수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마도 이 성당에서 기도를 하고 병이 나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놓은 것 같았다. 의학의 힘이든, 신의 권능이든 아픈 사람들이 나았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
제대에 모셔진 성모 마리아 그림과 한쪽 벽에 전시된 수많은 사연들 ⓒ 한성은
다시 버스를 타고 고조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아주르 윈도우(Azure Window)로 향했다. 고조를 방문한 관광객들은 반드시 바다에 떠 있는 푸른 창문을 보기 위해서 이곳으로 모였다. 그래서 고요한 섬 고조에서 가장 북적이는 곳이다. 아주르 윈도우 옆에는 블루 홀(Blue Hole)이라는 멋진 수중 동굴도 있어서 관광객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다이버들도 많이 찾는다.

거대한 석회암이 아치형으로 침식되어 생긴 아주르 윈도우는 창문이라기보다는 다리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바람이 강하고 수심이 깊어 파도가 아주 높게 쳤다. 시퍼런 바닷물과 부서지는 파도가 이대로 나를 삼켜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해안으로 와서 파도가 부서지고 나면 어김없이 투명하게 맑은 에메랄드 물빛이 반짝였다.
고조 섬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아주르 윈도우 ⓒ 한성은
바닥 곳곳이 깊게 침식되어 있어서 발을 디딜 때마다 조심해야 했다. 파도가 거세기 때문에 물에 빠지면 큰일날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파도가 높게 치지 않는 바위 뒤편에서는 사람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바위 아래가 아니라 바위를 타고 위로 올라가는 사람들도 대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같이 갔던 플로리안도 어느 틈에 바위 위에 올라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인생샷'을 찍어 줬다.

아주르 윈도우 앞에 서서 부서지는 파도만 바라보고 있어도 시간이 참 잘 갔다. 아주르 윈도우는 오랜 시간 바라보며 머릿속에 꼭꼭 기억해야 했다. 해풍과 파도에 의한 침식 속도가 점점 빨라져서 수년 내에 아치형 바위가 무너질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수작인지는 모르지만 위태위태한 모습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거센 파도가 쳤지만 바다 빛은 정말 예뻤다. ⓒ 한성은
힘들게 고조까지 왔는데 식도락을 놓치고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고조 투어의 마지막 목적지는 슬렌디(Xlendi)로 정했다. 슬렌디는 고조 섬 남쪽에 있는 작은 휴양 마을이다. 빅토리아를 지나친 우리 일행은 온종일 황량한 벌판만 보고 다녔는데, 호텔과 슈퍼마켓까지 있는 슬렌디에 도착하니 그동안 잊고 있던 허기가 몰려왔다.

워낙 작은 동네라 선택권도 별로 없었다. 이름만 다를 뿐 똑같이 생긴 레스토랑들이 바닷가에 몇 개 늘어서 있었다. 호기롭게 테라스에 앉아 메뉴판을 받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가격이 훨씬 비쌌다. 종일 굶었으니 밀린 식사를 한꺼번에 먹는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추천 메뉴였던 지중해식 한치 요리가 정말 맛있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평소 좋아하지 않던 올리브 절임도 맛있었다.

다만 바다와 맞닿은 테라스는 파도가 치면 바닷물이 튀어 오르고, 바람이 불면 모래가 날리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다고 이 좋은 경치를 두고 실내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요리를 지키느라 우아함은 지킬 수 없었지만 슬렌디에서의 식사는 모두가 만족했다.
고조 섬의 작은 휴양 도시 슬렌디의 전경 ⓒ 한성은
지중해식 세 가지 양념으로 요리한 한치 ⓒ 한성은
하루 만에 고조 섬을 모두 돌아보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어학원 선생님들도 고조 섬은 해 질 녘이 좋다고 1박 2일을 추천했다. 우리가 고조를 찾은 날은 일요일이어서 하루 묵고 가려면 어학원 수업을 빠져야 했기 때문에 아쉬움을 두고 돌아와야 했다. 몰타에서 해 질 녘이라는 것은 밤 9시는 되어야 하는데 고조의 시티투어 버스는 저녁 6시면 운행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고조 섬은 자연경관도 빼어나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주간티아 신전(Ggantia Temples)도 유명하다. 이집트 피라미드나 영국 스톤헨지보다 천 년이나 앞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라는데 못 보고 온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이 아쉬움이 다시 고조 섬을 찾게 되는 이유가 될 테니까 다음을 기약했다.
시티투어 버스 이층에서 바라본 고조의 풍경 ⓒ 한성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블로그 '타박타박 아홉걸음' http://ninesteps.tistory.com에도 동시에 게재되었습니다.

태그:#몰타, #고조섬, #블루라군, #아주르윈도우, #타박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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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란 저에게 아이들이 "선생님"이라고 불러줍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은 성실한 여행자가 되어야겠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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