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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레(35)는 귀국을 하루 앞두고 이주노동자 쉼터를 찾았다. 처음 한국에 오자마자 복막염으로 생사를 헤매며 사십일 가까이 입원했을 때 도움을 받았던 곳이다. 그는 쉼터에서 항암치료 중이라는 유디(가명)와 이야기를 나누며 만감이 교차했다.

그는 외국인 고용허가제로 입국하여 업체를 배정받고 일도 시작하기 전에 공장에서 쓰러졌었다. 그때 가까운 병·의원과 장기 전문병원을 거쳐 복막염 수술을 받기 전까지 병원을 네 번이나 옮겨야 했다. 수술에 앞서 열흘 동안 병원을 전전하며 '사람이 이렇게도 죽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게 벌써 8년 전 일이다.

솔레는 입원할 때 담당 의사로부터 "생사를 가늠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솔레는 입원할 때 담당 의사로부터 "생사를 가늠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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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레는 입원할 때 담당 의사로부터 "생사를 가늠할 수 없다"는 말을 들으면서 기를 쓰고 한국에 오고자 했던 자신이 그렇게 어리석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는 세계문화유산인 보로부두르 사원이 있는 인도네시아 마글랑에서 농사를 짓다가 한국에 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따라 10년 가까이 논농사를 지었다. 친구들은 도회지로 외국으로 떠난 시골에서 나름대로 많은 애를 써 봤지만 언제나 수익은 변변치 않았다.

농사라지만 볍씨만 뿌려놓으면 자라는 논에서 붕어와 메기도 길렀고, 논 위에 양계장을 지어 닭도 기르며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돈이 모이지 않았고, 가끔 이주노동을 갔던 친구들이 돌아올 때면 소외감이 들기도 했다. 결국 어렵사리 아버지로부터 허락을 받고 27살이 되던 해에 출국할 수 있었다.

사십여 일 동안 죽을 고비를 넘기고 퇴원할 때만 해도 뼈만 앙상하게 남아 일이나 제대로 하겠나 싶던 그였다. 하지만 처음 배정받은 회사에서 8년을 꼬박 일했다. 그 회사 사장은 솔레가 입원할 때 지급보증을 서고, 퇴원할 때는 병원비 전액을 선납해 줬던 생명의 은인 같은 사람이다.

"송장 치우나 싶었는데, 그래도 사람 하나 살렸으니 됐다"며 허허 웃던 사장은 당시만 해도 병원비를 한꺼번에 낼 형편이 못돼서 분할 지급을 약속하고 퇴원수속을 했을 정도로 형편이 궁했다. 안성에서 자동차부품업체를 운영하던 사장은 갑자기 닥친 세계경기 둔화로 생산 주문도 안 들어오고, 수금조차 되지 않아 부도를 걱정해야 할 때였다. 사장은 그런 형편에 지급보증을 할 때는 정말 막막했다고 고백했다.

"평상시 같으면 크게 신경 쓸 금액은 아닌데, 숨 한 번 크게 쉬고 결제해야 했지... 일하라고 데려 왔더니, 회사에 온 날 바로 벽에 손 짚고 비실대더니, 그냥 쓰러지더라고. 여기 저기 열흘 동안 병원 데리고 다닐 땐 정말 이러다가 송장 치우는구나 싶었지."

계약서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생면부지의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던 솔레를 위해 사장은 백방으로 뛰었다. 경기가 좋지 않아 여윳돈은 없지만, 사람은 살리고 보자는 게 그의 소신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주노동자쉼터를 소개받고 간병인과 행정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회사의 터줏대감으로 남은 솔레

우여곡절 끝에 건강을 회복하고 퇴원한 솔레는 깡말랐지만, 시골에서 자란 사람답게 일을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 사장은 그런 솔레를 아꼈다. 해당 이미지는 자료사진.
 우여곡절 끝에 건강을 회복하고 퇴원한 솔레는 깡말랐지만, 시골에서 자란 사람답게 일을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 사장은 그런 솔레를 아꼈다. 해당 이미지는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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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건강을 회복하고 퇴원한 솔레는 깡말랐지만, 시골에서 자란 사람답게 일을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 사장은 그런 솔레를 아꼈다. 덕택에 근로계약을 연장하고 재입국까지 할 수 있었다.

8년 동안 회사는 부침이 많았다. 직원들이 많을 때도 있었지만, 1년 이상 일하는 한국인은 없었다. 가장 오래 일했던 운전기사가 겨우 1년을 채웠을 정도였다. 반면, CNC 선반가공 작업을 하는 현장에서 솔레는 터줏대감이었다. 다른 회사와 달리 잔업이 없어 급여가 적었고, 최저임금이 정한 월급이 보통 그가 받는 급여의 전부였다. 하지만 솔레는 사장과의 의리를 굳게 지켰다. 심지어 한 달 넘게 전혀 일감이 없었을 때도 회사를 지켰다. 그렇게 일이 없을 땐 텃밭을 가꾸며 고향 생각을 했다.

같이 일하던 동료 인도네시아인들 중에는 회사를 옮기자고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럴 수 없다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려운 처지에 있던 자신을 위해 선뜻 돈을 내줬던 것을 생각하면 남들처럼 야박하게 사장을 등질 수 없었다. 덕택에 출국하기 전까지 자신을 포함해서 다섯 명의 인도네시아들인이 회사 일을 도맡다시피 했다.

솔레는 지난 8년간의 일을 유디에게 털어놓으며 항암치료가 잘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눈 그는 얼마 후, 손에 가득 장을 봐 왔다. 닭고기와 야채, 과일 등이 가득 들어있는 비닐봉지를 양손에 들고 쉼터로 돌아온 솔레는 "잘 먹어야 빨리 낫는다"며 씨익 웃었다. 박봉에도 8년을 한 회사에서 일하며 사람 사는 도리를 다했던 '의리남'은 아픈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태그:#이주노동자, #의리남, #인도네시아, #복막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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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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