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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 한눈에

  • 수십만불 내지 수백만불의 연봉을 받는 엔지니어들에게 기껏 1백만불 정도 하는 집값은 조족지혈에 불과할 수도 있다.
실리콘 밸리라고 하는 지역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시 남부에서 산호세까지 이어지는 비교적 방대한 지역을 통틀어서 지칭한다.(사진은 구글지도 캡처)
 실리콘 밸리라고 하는 지역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시 남부에서 산호세까지 이어지는 비교적 방대한 지역을 통틀어서 지칭한다.(사진은 구글지도 캡처)
ⓒ 구글지도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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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경제가 나쁜 것은 아니다. 창조경제를 캐치프레이즈로 삼은 사람이 누구라고 해서 창조경제 자체를 무슨 문제가 있는 것처럼 간주할 필요가 전혀 없다. 전자, 조선, 화학, 자동차, 철강 등 소위 '5두 마차'로  불리는 우리 경제의 성장 동력은 한계에 봉착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보다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는 새로운 성장모델을 찾아내는 것은 따라서 우리 경제의 밝은 미래를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소위 창조경제의 본산으로 불리는 미국의 실리콘 밸리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몰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일본, 대만, 중국 등 미래의 성장동력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다수의 산업국가들이 실리콘 밸리 모델에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지난 1년간 실리콘 밸리 한복판에 위치한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연구활동을 하며 보낸 시간은 이 점에서 흥미로웠다. 무엇이 실리콘 밸리의 성공을 만들어 낸 것일까? 한국의 실리콘 밸리를 만들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고민을 하던 와중에 맞닥뜨린 실리콘 밸리의 파업은 화두에 몰두한 선승에게 날아든 일갈과도 같았다. 창조경제에는 밝은 앞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이면도 있다는 점. 실리콘 밸리의 한 쪽 면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전후좌우를 두루 살피지 않고는 한국형 창조경제 혹은 우리 식 실리콘 밸리의 창출은 어려울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법원 청사 앞에서 피켓 시위에 돌입한 공무원들

소위 실리콘 밸리라고 하는 지역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시 남부에서 산호세까지 이어지는 비교적 방대한 지역을 통틀어서 지칭한다. 모두 세 개의 카운티에 걸쳐 있는데, 그 중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카운티가 바로 산타 클라라 카운티이다.

산타 클라라 카운티에는 총 11개의 주 지방법원이 위치하고 있다. 민형사에서부터 교통범칙금까지 갖가지 소송이 이 지방법원들을 통해 처리된다. 지난 8월 이 지방법원에 근무하는 총 380명의 법원 공무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한국에서는 공무원의 파업이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실리콘 밸리의 법원 공무원들이 파업하는 모습은 필자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대부분이 중년 여성인 이들은 법원의 기록 관리, 영장이나 판결문 발급 등 업무를 맡고 있었고, 일부는 법원 청사 관리 업무를 맡기도 했다. 투표를 거쳐 조합원들의 압도적인 파업 지지 의사를 확인한 후, 법원 공무원들은 법원 청사 앞에서 피켓 시위에 돌입했다.

주민들에게 바로 피해가 발생한 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민사상의 고소를 위해 법원을 방문했던 한 주민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교통범칙금을 내러 온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살인 범죄 등 몇 가지 흉악범 관련 재판이거나 기타 중대한 재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법원 기능이 사실상 마비되다시피 했다.

공무원이 소위 철밥통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우리나라에서 이런 장면은 생소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아니 철밥통이 웬 파업"이라며 의아해 하는 사람이 다수일 것이다. 그러나 산타 클라라 카운티 법원 공무원들은 전원이 2년짜리 계약직이었다. 매 2년마다 계약이 갱신되며, 보수도 계약 갱신 때마다 새로이 정해진다. 그런데, 무려 지난 8년간 보수 인상이 없었다는 것이다.

살인적인 실리콘 밸리의 주택 가격

이들이 받는 봉급은 그러면 얼마 정도일까? 이들의 평균 연봉은 5만2천불. 한국 돈으로 대략 5700만원에 해당했다. 한국 기준으로 보면 많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 최고 수준의 고액 연봉자들이 몰려 있는 실리콘 밸리에서 이들은 하층 계급에 속했다. 이미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져 있는 바이긴 하지만, 실리콘 밸리의 주택 가격은 살인적이다. 올 들어 산타 클라라 카운티 주택 가격 중간값은 1백만불을 돌파하였다.

실리콘 밸리 현지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이번에 파업에 나선 법원 공무원 중 한 사람은 두 명의 자녀 그리고 한 명의 손자와 함께 방 3개 짜리 집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소득 수준이 올라가지 않자, 생활비 보충을 위해 그 중 방 2개를 세 주었다. 결국 두 명의 자녀와 한 명의 손자는 나머지 방에서 생활하고, 자신은 차고에서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법원 공무원 한 명은 자기 연봉의 70%를 집세로 내고 있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실제로 실리콘 밸리에서 허름한 방 2개짜리 아파트의 월세는 3000달러를 가볍게 넘어선다. 일년에 4만 달러가량이 집세로 나가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법원 공무원은 자신이 노숙자 보호 시설에서 살고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주택 가격이 미친 듯이 올라가는 와중에 결국 법원 공무원들은 하나씩 둘씩 직장을 그만두거나 다른 카운티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렇게 8년이 흘러가는 동안 법원 공무원의 3분의 1이 줄어들었지만, 인력 충원은 없었다. 당연히 1인당 업무량은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참다못한 법원 공무원들은 계약직이라는 신분상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계약 갱신을 거부한 채 파업에 나선 것이었다. 파업은 길게 가지 못했다. 법원 행정처로서는 사법 서비스의 중단을 감내하기 어려웠다. 결국 8일만에 법원 행정처 측이 노조측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는 선에서 파업은 마무리되었고, 법원 공무원들은 일자리로 돌아갔다.

21세기 아메리칸 드림이 살아 숨쉬는 곳

실리콘 밸리는 인류 창의성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전 세계의 천재들이 몰려들어 각축을 벌이며, 최첨단 기술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 백만장자, 억만장자가 속출한다. 전세계의 천재들이 실리콘 밸리 한 복판에 있는 스탠포드 대학교에 몰려든다. 이들 중 일부는 졸업하자마자 억만장자의 대열에 합류한다.

매년 스탠포드 대학교에 입학하는 약 1700명의 신입생들 중 절반 이상이 컴퓨터 공학 전공을 희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리콘 밸리는 그야말로 21세기 아메리칸 드림이 살아 숨쉬는 곳인 것이다.

그러나, 실리콘 밸리의 창조 경제는 빛나는 창의성과 고도의 첨단 기술이라는 밝은 면 못지 않게 어두운 이면 또한 안고 있다. 수십만불 내지 수백만불의 연봉을 받는 엔지니어들에게 기껏 1백만불 정도 하는 집값은 조족지혈에 불과할 수도 있다. 실리콘 밸리의 대기업들은 유능한 직원들을 끌어 들어기 위해 더 큰 청사를 짓고, 더 넓은 직원 주택을 마련하려고 경쟁적으로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실리콘 밸리의 주택 가격은 더 올라가기 마련이다. 반면, 다른 한 편에서 그냥 보통 수준의 연봉을 받으면서, 그다지 창조적이지 않은 업무에 종사하는 일반 노동자들은 상대적 빈곤에 빠지고, 심지어는 차고로, 혹은 노숙자 숙소로 내몰리게 된다.

실리콘 밸리 방문하는 사람들, 진정 배워야 할 것

현재 한국사회에서 창의성, 창업, 도전 등의 단어는 일종의 사회적 열풍을 낳고 있다. 젊은이들은 거의 매일 같이 여러 매체에서 창의적일 것을 요구받고, "창업하라", "도전하라"는 권유를 받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창의적 도전이 가져올 긍정적 결과의 모범 사례가 바로 실리콘 밸리인 것이다.

이것은 비단 한국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매년 수천명의 일본인 기술자와 사업가들이 성공적인 창조경제의 비결을 배우고자 실리콘 밸리를 방문한다. 그들의 목적은 명확하다. 일본판 실리콘 밸리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박근혜 대통령이 내세운 "창조경제"의 모토 하에 전국에 18개의 창조경제 혁신센터가 세워져 있다. 이 창조경제혁신센터 역시 그 성공의 모델은 실리콘 밸리이다.

실리콘 밸리 그리고 미국의 창조경제, 혁신, 창의적 교육으로부터 배우자고 하는 이 학습의 열풍은 마치 19세기 서구의 근대화를 따라잡고자 했던 동아시아 여러 국가들의 처절한 노력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는 물론 동아시아 여러 나라를 휩쓸고 있는 소위 창조경제 붐 혹은 실리콘 밸리 학습 열풍은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놓치고 있다.

19세기 서구 열강의 대형 해군 함정이 동양 세력의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동양의 많은 대중과 지식인들은 그 강대한 군사력에 놀랐으며, 그 놀라운 군사적 힘을 흉내내고자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동양인들은 서구 열강의 강력한 물질적 힘이 사실은 그들의 사회정치적 시스템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즉, 서구의 군사력만을 복사하려고 해서는 성공할 수 없으며, 그들의 사회정치적 체계 전체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실리콘 밸리의 창조 경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 우리는 미국판 창조경제의 밝은 면, 즉 자유경쟁과 혁신이 가져오는 놀라운 성과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실리콘 밸리의 창조경제는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정치적 시스템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창조경제는 홀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여러 사회적, 정치적 요인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한다. 실리콘 밸리의 법원 공무원들이 그저 성실히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게 살아왔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본의 아니게 직장을 떠나게 되고, 차고에서 잠을 청하거나 혹은 심지어 노숙자 숙소로까지 밀려나게 되는 것이 바로 그러한 부작용의 한 사례인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실리콘 밸리의 창조경제로부터 제대로 배워서 우리 땅에, 우리의 손으로 제2의 실리콘 밸리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저 실리콘 밸리의 눈부신 성과에 감탄하기만 해서는 안된다. 창조경제의 부작용이 사회정치적 불균형을 낳을 때 그 불균형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상대적 빈곤이 해결되긴 어려워

산타 클라라 카운티 법원에는 지난 14년간 파업이 없었다고 한다. 법원 공무원들은 더 큰 단위의 공무원 노조에는 포함되어 있었지만, 자기들만의 독자적인 단체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금 동결이 계속됨에 따라, 법원 공무원들은 스스로를 규합하기 시작했고, 결국 협상 결렬과 투표를 거쳐 파업에 나선 것이다.

계약직 신분인 이들 미국 공무원들과 정년이 보장되고 매년 자동적으로 임금이 오르는 우리나라 공무원들을 일률적으로 비교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산타 클라라 카운티의 법원 공무원들이 스스로 뭉치고, 자신들이 겪는 어려움을 표출하지 않았다 해도 그냥 저절로 임금이 오르고, 사직한 인력이 보충되었을까?

모든 법원 공무원들이 동결된 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에 직면하여 그냥 직장을 떠나 다른 카운티로 이사 가버리기만 했다면, 결국 문제가 개선되었을까?

이번 파업을 통해 법원 공무원들의 임금이 몇 퍼센트 정도 오르고, 또 추가적인 인력 충원을 통해 근로조건이 다소 개선되었다 해도 이들의 상대적 빈곤이 근본적으로 해소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창조경제의 승리자들이 받는 것과 같은 수십만 내지 수백만불의 연봉을 받는 날은 아마 절대 안 올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미국판 창조경제의 이면에서 배워야 할 한 가지 교훈은, 창조경제의 본산인 미국에서도, 심지어 파업이나 노조와는 가장 거리가 멀어보이는 것 같은 점잖은 법원공무원들에게 마저, 그들이 고통받을 때, 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당한 기회를 허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혁신과 경쟁, 창조경제의 양대 기둥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창조경제가 장기적으로 성공하려면, 혁신과 경쟁이 낳는 상대적 빈곤과 박탈이라는 부작용을 해소할 장치가 필요하다. 혁신과 경쟁이 낳는 부작용의 피해자들에게 자신들의 불만을 토로하고 해소할 합법적인 통로를 허용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 역시 스스로를 규합하고 자신들의 불만을 정당한 경로를 통해 표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창조경제, 중요하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창조경제의 빛과 어둠으로부터 두루 배워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창조경제를 창출하는 길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 본 기사의 영문 버전은 대만에서 발간되는 영자 신문 Taipei Times에도 게재 예정입니다.
* 장부승 박사는 2000년도 외무고시 합격후 2015년까지 외교관으로 근무한 전직 외교관이다. 2014년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 취득후, 작년도에 외교부를 사직하고 금년 8월까지 약 1년간 미국 스탠포드대 쇼렌스틴 아태연구센터 연구원으로 현대 아시아 정치에 대해 연구하였다. 현재는 미국에서 북한핵 문제 및 동아시아 비교정치 및 국제관계를 중심으로 연구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태그:#실리콘밸리, #창조경제, #파업, #공무원, #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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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수.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스탠포드대학교 쇼렌스틴 펠로우, 랜드연구소 스탠턴 펠로우를 거쳐 현재는 일본 오사카 소재 관서외국어대 교수 재직중. 일본 및 미국, 유럽,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다양한 학생들을 상대로 정치학을 강의하고 있다. 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booseung.chang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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