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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 한눈에

  • 서라벌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 전역 후 1년간 부천 중앙극장에서 일했다. 북부역 근처에 있던 1000석이 넘었던 극장이었다.
조점용(72) 전 '추억극장 미림' 영사기사. 제대하고 1년 뒤 인천 미림극장에 왔다. 여기서 결혼하고 자식 셋 낳고, 얼마 전 그만두기까지 35년을 일했다. 이곳에서 평생 영사기를 돌렸다. '요즘은 노는 게 일과'라고 하지만 지난 1월, 추억의 영사기와 필름을 기증, 극장에서 전시하고 11월 20일까지 열리는 인천시립박물관 기획특별전 '인천, 어느 날 영화가 되다'에도 참여했다.

"처음엔 색소폰을 불고 싶었어요. 캄보밴드라고 그러죠, 네다섯 명이 모여서 하는 거. 그걸 하려고 보니까 지금 같지 않고 색소폰을 살 돈이 없더라고. 별 지랄을 다해도. 부모님이 사주지도 않고 학교 다니는 놈이 벌어서 살 능력도 안 되고. 정 하고 싶으면 빚을 내서라도 사줄 테니 아버지가 폐활량을 보자 그래요.

그래서 보니까 폐활량이 나빠. 어릴 때 폐렴에 걸렸는데 죽는다고 그랬대요. 항생제를 못 구해서 가망이 없다고 했다고. 100일도 안 돼서 죽을 고비를 넘기니, 폐가 색소폰 불 만한 힘이 없는 거야."

그는 충북이 고향이다. 중학교 졸업생 180명 중 5명만 고등학교에 갔다. 그 시절 서울로 유학 온 건 대단한 일이었다. 서라벌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 제대 후 1년간 부천 중앙극장에서 일했다. 북부역 근처에 있던 1000석이 넘었던 극장이었다.

"발전기로 영화를 튼 거야... 무지하게 고생했지"

추억극장 미림 2층에서 인터뷰를 하는 모습
 추억극장 미림 2층에서 인터뷰를 하는 모습
ⓒ 고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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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걸 하는 거 알고 선배가 우리 극장에 와서 영화 좀 돌려줘야겠다 그래요. 짓기만 하면 하겠다고 했지. 군대 가기 전부터 짓기 시작했는데 휴가 때마다 나와서 봐도 아직 멀은 거야. 돈이 없어서 찔끔찔끔 짓다 보니까. 전역할 무렵 가보니까 어느 정도 완성이 됐더라고요. 장내 의자랑 영사기만 놓으면 된대요."

다 된 것이었을까.

"안 된 거지. 의자랑 영사기가 핵심이거든. 극장에 장내 의자가 없고 영사기가 없으면 어떡해요. 그걸 여적 준비 안 하면 어떡하냐, 3년이나 걸리지 않았느냐, 서두르자 해서 의자랑 영사기를 외상으로 들여놨어요. 

극장에 전기도 없었어. 그거 놓는 게 비싸거든. 세운상가에서 발전기를 하나 사다 놨어요. 발전기로 영화를 튼 거야. 고생 무지하게 했지. 군대 갔다 와서 군인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했지, 못 해요. 또 선배가 하는 거니까, 죽어도 일으켜야겠다 하는 마음이 있었지. 아침에 나가서 밤 10시, 11시까지 발전기를 돌리는 거야. 매일 돌리니까 시동도 잘 안 걸려. 집에 가면 잠이 안 와. 내일은 걸리려나... 영화는 11시에 시작하는데 8시에 극장에 나가서 시동을 거는 거야. 일단 걸어놓으면 그날 영화 상영하는 데 큰 지장이 없거든. 

그런데 1년을 견뎌보니까, 툭 하면 의자 업자가 와서 돈 안 준다고 의자를 죄 접어놓고 틀 떼어가고. 영사기도 못 돌리게 해서 영사실 문 잠그고 영사기 창에 불빛만 나가게 하고 창 밑에 숨어 있고 그랬어요."

포도밭, 복숭아밭이었던 곳을 밀고 경지정리한 자리에 극장 건물 달랑 하나 있었다. 손님도 별로 없었다. 극장은 안 되고, 줄 돈은 많고, 그는 월급도 제대로 못 받았다. 의리상 버텼지만 빛이 보이지 않았다. 1972년, 다른 선배의 권유로 미림극장에 오니 이곳에는 손님이 너무 많았다.

"영화가 좋으니까 손님이 넘치는 거야. 사장이 미군 수석통역관이었어요. 외국 서적 들여다보면서 어떤 영화가 좋은지, 흥행실적은 어떤지, 유럽은 어떻고 미국은 어떻고를 연구해서 좋은 영화를 잡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지. 영화 볼 줄 아는 사람은 미림극장에 가면 된다는 걸 다 알고 있었어.

이 근처가 다 하꼬방이었잖아. 보고 즐길 게 영화밖에 없었지. 영화비가 아주 싼 건 아니지만 하루 놀러가서 돈 쓰는 것보다는 싸니까. 우리는 환히 알아. 저 새끼가 어제 왔는데 또 왔네, 여자 옆에 앉아서 영화 보려고 오는 것도 알지. 세월 지나고 보면 여자랑 손 붙잡고 다니고, 결혼하고...

결혼해야 하는데 극장을 빌려줄 수 없냐, 그래요. 영화상영이 11시부터니까 11시 이전에 결혼식을 하는 거야. 조화로 화환 만들고, 간판실에 부탁해서 누구누구 결혼식이라고 써서 붙이고. 비용도 안 받았지. 자주 오는 친구들이라 얼굴 아니까 거절도 못했지."

동네 꼬맹이도 다 아는 '조 기사'

그는 반세기를 극장에서 생활했다. 인천은 살기 괜찮은 곳이었다. 서민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 체질에도 맞았다. 당시 동인천은 그 어느 지역보다 교통도 좋았다.

이 동네(동구 송현동)에서 '잘 먹히는 영화'는 이소룡이 나오는 액션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액션보다 서정적인 영화를 더 좋아했다. 소피아 로렌 주연의 '해바라기' 같은 영화. 남자의 고향에 갔다가 그가 유부남인 걸 알게 된 소피아 로렌이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주변이 온통 노란 해바라기 밭이다. 기차 안에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던 여자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최근에 블루레이도 구해 놨다.

'조점용 展' 리플릿에 실린 영사기사의 예전 모습
 '조점용 展' 리플릿에 실린 영사기사의 예전 모습
ⓒ 미림극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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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기사' 하면 동네 꼬맹이들도 다 알았다. 인기도 많았고, 수입도 괜찮았다.

"자격증 따서 처음 간 곳이 충북 보은인데, 지금으로 치면 연예인이 온 거야. 스타지. 나는 희로애락을 주는 생명체나 다른 없는 사람이니까. 길 한복판으로 걸으면 양쪽으로 양장점, 미장원 사람들이 다 나와 있어. 중앙으로 걸어가려면 옷을 잘 입어야 하잖아. 굽 높은 캉캉구두 신고, 아무튼 그때 수준으로 최고 패션이었지. 저녁이면 편지는 또 얼마나 많이 오는지..."

1957년 천막극장으로 출발, 인천을 대표하는 영화관 중 하나였던 미림극장은 경영난으로 2004년 문을 닫았다가 지난 2013년, 어르신을 위한 '추억극장 미림'으로 재개관했다. 처음 영사기사로 일했던 시절 많고 많았던 주변의 극장들은 다 없어졌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극장이 미림이다. 극장 안에 들어서면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켜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가 기증한 추억의 영사기를 볼 수 있다.

"요즘은 그냥 노는 거지 뭐. 인천노인문화회관, 중구문화원, 주민행복센터 등에서 블루레이로 영화 틀어주고 있어요. 딴 건 뭐, 기운이 있어서 노동할 것도 아니고. 내가 하던 일이니까 가끔씩 해줘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in'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미림극장, #추억극장 미림, #영사기사, #조점용,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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