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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일을 하면서도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일을 아주 피곤해 했다. 그러다 육아 8년, 막내가 네 살이 되자 그림책이 눈에 들어왔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까꿍이가 자신만의 그림책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를 짓는 엄마로서 삼남매만의 그림책 한 권 지어주고 싶은 꿈도 꾸게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꿰고 그림을 수놓아 멀지 않은 날 꼭 만들고 싶은 그림책을 위해 함께 읽어가는 책에 대한 기록을 지금부터라도 남겨두려 한다. - 기자말

1800년대 식물 세밀화를 바탕으로 한 따뜻한 그림
▲ <산딸기 크림봉봉> 1800년대 식물 세밀화를 바탕으로 한 따뜻한 그림
ⓒ 씨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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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글로 배운 베이킹이라 정교한 손맛이 떨어지지만 시간이 날 때면 빵과 과자를 구워 아이들에게 먹이기를 좋아한다. 사실 아이들보다 내가 더 빵과 과자를 좋아한다. 길 가다 빵집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갓 구운 빵 냄새를 맡으며 빵실빵실한 빵들을 구경하노라면 구름을 타고 하늘을 누비는 듯하다. 평생의 숙제인 다이어트 때문에 양껏 먹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지만 어제도 오후 9시에 빵을 두 개나 먹었다. 

굳이 '2015 뉴욕타임스 선정 올해의 그림책'이란 타이틀 없이도 표지와 제목만으로 빵순이 나를 끌어당긴 책 <산딸기 크림봉봉>. 음식에 관한 책을 여러 권 봤던 터라 그 비슷한 내용이겠지 생각하며, 그저 맛있는 상상만을 하며 책을 펼쳤다. 그런데 책은 기대 이상, 상상 이상! 정수기와 밥솥 사이 가계부 꽂아두는 곳에 함께 꽂아두고 수시로 꺼내 보고 싶은 책이었다.

'수백 년이 흘러도 한결같은 맛 산딸기 크림봉봉의 비법을 공개합니다'라는 책 표지에 적힌 문장처럼 수백 년이 흘러도 내 아이의 아이, 그 아이의 아이들에게도 바람의 속삭임으로 들려주고 보여주고 싶다.

300년을 이어 온 행복한 맛

"디저트라는 소재를 통해 어른과 어린이 독자 모두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었"다는 글작가 에밀리 젠킨스는 16세기부터 이어져 온 과일 크림봉봉(fruit fool) 중에서도 블랙베리 크림봉봉을 소재로 삼아 300년의 시간 동안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음식이 어떻게 연결되어 흘러왔는지 보여 준다.

1710, 1810, 1910, 2010년 총 4부분으로 나뉘어 보여주는 시대의 변화는 건축양식과 복장, 조리도구와 냉장기술, 가족구성과 가족 내 가사노동의 풍경으로 보여준다. 글 작가의 성실한 자료 조사는 그림 작가 소피 블래콜에게도 이어진다.

300년 전 조리도구를 직접 만들어 크림을 휘저어 보고, 박물관에 직접 가 옛날 옷감을 관찰하고 노예를 부리던 가족의 일기까지 찾아 읽으며 일상을 세세하게 재현했다는 두 작가의 후기는 산딸기 크림봉봉만큼 맛있는 디저트이다.

1800년대 식물 세밀화를 바탕으로 한 따뜻한 책 표지를 넘기면 짙은 보랏빛 면지가 나온다. 그림책 작가가 보물찾기 하듯 면지에 담아놓은 의미 찾기를 즐기는데 처음엔 선뜻 보이지 않았다. 그림책 작가의 후기를 읽고 나서야 마지막 그림의 채색을 마친 뒤 블랙베리를 으깨고 체에 걸러낸 보랏빛 즙으로 면지를 칠했다는 알게 됐다. 달짝지근한 냄새가 손에 묻을 것만 같았다.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으로 시작하는 이야기. 영국의 라임이라는 마을, 갓난아기를 업은 엄마와 일곱 살 쯤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덤불을 헤치며 산딸기를 딴다. 당시 복장사를 알려주는 풍성한 치마가 산딸기 덤불에 툭툭 걸린다.

300년 전엔 엄마가 우유를 짜고 나뭇가지로 만든 거품기로 15분을 저어 폭신한 크림을 만든다. 수도가 없어 딸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고, 냉장고가 없어 언덕배기에 있는 얼음 창고에 산딸기를 넣은 크림을 얼린다.

저녁 식탁엔 (일 할 땐 보이지도 않던) 양복을 입은 아빠와 무려 네 명이나 되는 오빠들이 앉아 촛불을 켜고 음식을 먹는다. 오직 엄마와 딸만이 일어나 부엌과 식탁을 오가며 음식을 나른다. 딸은 식탁에 앉지도 못하고 부엌에 앉아 양푼에 남은 산딸기 크림봉봉을 긁어 먹는다.

그로부터 100년 후, 1810년 미국 찰스턴 도시 변두리로 간다. 역시 엄마와 딸이 산딸기를 딴다. 앞의 이야기와 다른 것이 있다면 흑인 모녀라는 것, 숲 속이 아닌 농장에서 재배한 산딸기를 따고 있다는 것.

100년 동안 기술은 발전해, 젖소 농장에서 우유크림을 집으로 배달을 해주고 쇠로 만든 거품기로 10분을 저으면 크림을 부풀어 오른다. 언덕배기에 있던 얼음창고는 지하실의 얼음을 채운 나무 상자가 되었다. 자신들이 만들었지만 흑인모녀는 주인집 식사가 모두 끝난 늦은 밤에야 "벽장에 숨어" 양푼에 남은 산딸기 크림봉봉을 긁어 먹는다.

주인집 식구들을 위한 요리, 10분동안 거품기를 저어야 해요, 고단한 아이의 표정이 짠하다.
▲ 1810년대 노예의 딸 주인집 식구들을 위한 요리, 10분동안 거품기를 저어야 해요, 고단한 아이의 표정이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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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노예 모녀는 시중을 들고, 노예아들은 천장에 달린 부채의 줄을 당겨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 8살 딸아이 눈엔 화려한 궁전 같아 보이는 1810년대 미국 상류층 식탁풍경 흑인 노예 모녀는 시중을 들고, 노예아들은 천장에 달린 부채의 줄을 당겨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 씨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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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미국 보스턴의 도시에서도 산딸기 크림봉봉은 이어진다. 도시는 농장 대신 아침 시장에서 산딸기를 판다. 어린 아기는 유모차를 타고 있고 엄마는 굽이 있는 구두를 신고 넓은 챙의 멋진 모자를 쓰고 있다.

살균한 우유크림은 유리병에 담겨 현관 앞으로 배달되어 오고 엄마는 요리책을 보고 손잡이가 달린 거품기로 5분을 젓는다. 드디어 수도가 부엌에 놓이고 배달 얼음으로 가득한 아이스박스도 생겼다. 식탁 위에 놓여있던 촛불 대신 환한 전등 아래서 저녁 식사를 한다. 여전히 식탁을 차리는 일은 엄마와 딸이 하지만 모두가 함께 식탁에 앉아 산딸기 크림봉봉을 먹는다.

아마도 엄마 없이 아빠와 아들만 사는 가정의 모습. 200년전 주인집을 위해 요리하던 흑인이 친구가 되어 놀러왔다.
▲ 드디어 부엌에 등장한 남성 아마도 엄마 없이 아빠와 아들만 사는 가정의 모습. 200년전 주인집을 위해 요리하던 흑인이 친구가 되어 놀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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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가까운 몇 년 전, 미국의 샌디에이고. 드디어 여성이 아닌 남성, 아빠와 아들이 슈퍼마켓에서 산딸기와 유기농 크림을 산다. 아빠는 인터넷으로 요리법을 찾고, 아들은 전기 거품기로 300년 전 15분 동안 힘들게 저어야 부풀어 오르던 크림을 단 2분 만에 폭신하게 올린다. 냉장고에서 산딸기 크림봉봉이 차게 식을 동안 다양한 인종, 계층의 이웃들이 찾아온다. 이웃들과 함께 정원의 긴 식탁에서 산딸기 크림봉봉의 맛있는 행복을 나누는 저녁식사.

300년이 지나서야 남성이 요리를 하고 식탁의 상석에 여성이 앉을 수 있고, 흑인과 백인이 평등한 가정을 이루고 부모와 아이들이라는 구성이 아니어도 아빠나 엄마 혹은 조부모와 아이만으로도, 때론 혼자라도 '가정'의 울타리로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되었다.

에밀리 젠킨스는 노예제도라는 아픈 역사, 여성이 집안일을 도맡아야 했던 "불편한 진실"들을 지나 마지막 식사 장면인 현대에서 "모두가 어울리는 희망적인 공동체"를 그렸다 한다. 어제와 오늘이 이어져 보다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작가의 소망이 보인다.


맛있게 요리한 디저트의 '불편한 진실'

모습은 달라도 같은 음식을 나누며 행복을 나누는 공동체를 희망한다.
▲ 우리와 같은 사람들의 소박한 저녁 모습은 달라도 같은 음식을 나누며 행복을 나누는 공동체를 희망한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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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대이기에 당연하다고 치부했던 '불편한 진실'들이 마지막 식사 장면에서 각각의 모습으로 빛나는 그림을 보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21세기 시대가 바뀌고 발전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어쩌면 예전보다 더) 세상의 많은 차별과 억울함이 존재한다.

눈에 보이는 기술의 발전과 자본의 논리 덕분에 때론 억울함의 호소마저 불편하게 바라보는 지금. <산딸기 크림봉봉>은 아름다운 그림과 맛있는 디저트로 경계를 풀고 '불편한 진실'을 부드럽고 맛있게 이야기 하고 있다.

아직 노예제도나 성평등에 대한 개념이 없는 여덟 살 까꿍이는 이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했다. 당장 우리도 산딸기 크림봉봉을 만들어 먹자는 까꿍이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을 물어보았다. 아직 핑크공주 감성이 있을 때라 드레스를 차려 입은 장면을 고를까 했는데 맨 마지막 장면을 골랐다.

"이웃들이 다 같이 마당에서 파티하면서 먹는 장면이 제일 좋아. (노예가 시중드는 장면을 넘겨 이건 어떠냐고 물어보니) 여긴 황실 같아. 그릇까지도 다 화려해서 좋기도 한데 (마지막 장면으로 다시 책장을 넘겨) 여기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우리처럼 옷을 입고 편하게 같이 먹으면서 노는 게 더 좋아 보여."

다행이었다. 변두리 도시 동네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여덟 살 아이의 눈에 비친 행복에 안심이 되었다. 아이와 함께 다시 책장을 넘기며 여성의 노동과 노예제도 등을 맛보기로 짚어 주었다. 여덟 살만큼의 생각으로 아이는 그 맛을 보았다. 아이들이 자라면 그 만큼 더 많은 생각의 맛을 나눌 수 있겠다.    

삼남매는 주말에 우리도 산딸기 크림봉봉을 만들자고 야단이다. 4세기에 걸쳐 시대가 변하는 동안에도 변치 않았던 주문을 우리도 외워야겠다. 크림과 산딸기즙을 둥글게 휘젓던 주걱과 차게 식힌 산딸기 크림봉봉을 그릇에 옮겨 담고 양푼에 남은 걸 핥아 먹던 그림책 속 아이들처럼 삼남매도 주걱과 양푼을 싹싹 핥아 먹으며 외치겠지.

"살살 녹아요, 녹아!"

안팎으로 어수선하고 불안한 소식뿐인 요즘이다. 부디 무엇 하나라도 "살살" 녹기를 바란다.

베이킹 도구를 꺼내들고 야단인 삼남매
▲ 엄마 우리도 산딸기 크림봉봉 만들자! 베이킹 도구를 꺼내들고 야단인 삼남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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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A Fine Dessert>에선 'Blackberry Fool'인데 길상효 작가(<골목이 데려다줄 거예요>가 깊이 기억에 남아있다)의 번역 과정에서 우리나라엔 흔치 않은 '블랙베리'를 친숙한 '산딸기'로 바꾸고, 거품 낸 생크림에 과즙을 넣어 차게 먹는 후식인 'fool'의 한국어 통용명칭이 없어 '크림봉봉'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 붙였다고 한다. 지혜로운 엄마이자 힘 있는 이야기를 짓는 길상효 작가의 번역이 새롭게 만들어 낸 <산딸기 크림봉봉>이 책의 맛을 더욱 달콤하게 한다.


산딸기 크림봉봉

에밀리 젠킨스 지음, 소피 블래콜 그림, 길상효 옮김, 씨드북(주)(2016)


태그:#산딸기 크림봉봉,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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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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