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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이 두 곳이나 있던 주말이었다. 부랴부랴 식장에 들렀다가 구 포항역 인근에 있는, 이곳에서 '유일한 헌책방'을 찾아 나섰다. 시내로 가는 도중의 익숙한 길인데 여기에 책방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사실 헌책방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헌책방이란 그저 쓰임이 다한 교재나 아이들을 위한 책들이 거래되는 곳이 아닌가 생각했을 뿐. 특히나 책을 하나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나에게 '읽던 것을 나누는 것'으로 존재하는 헌책방이란 공간이 낯설기만 하다. 종이를 만들기 위해 베어지는 나무들은 걱정하면서도, 책은 새로 사서 '소유'하고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모순이다. 물론 이것만 모순인 것은 아니지만...

지난 일요일, 옛날 포항역으로 가는 길가에 덩그마니 놓여있는 포항 유일의 헌책방에 들러보았습니다. 이런 곳에 책방이 있을 것이라 짐작을 못해서였는지, 그 동안 그냥 지나쳤더군요.
▲ 포항 유일의 헌책방 탐험 지난 일요일, 옛날 포항역으로 가는 길가에 덩그마니 놓여있는 포항 유일의 헌책방에 들러보았습니다. 이런 곳에 책방이 있을 것이라 짐작을 못해서였는지, 그 동안 그냥 지나쳤더군요.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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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밖에서 보기에도 책방 내부는 어두웠다. 매장에 빈 공간이 있나 싶게 가득 차 있는 책들로 조명이 켜져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아직 문을 안 열었나 싶어서 문 앞에서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손잡이에 걸린 작은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주일엔 1시 이후에 오세요.'

시계를 확인하니 다행히 한 시가 넘었다. 다시 한 번 책방 안쪽을 들여다보니 작은 형광등이 몇 개 켜져 있는 것이 보인다. '다행이다' 생각하며 문을 열고 들어가 "안녕하세요" 하고 외치며 '여기 사람 들어왔어요' 선언을 한다. 넓지 않은 공간을 빽빽하게 채운 책들에 압도된다. 사람보다는 책이 주인인 공간이다.

맞이 하는 사람은 아직 없다. 문에 제일 가까운 왼쪽 서가의 원서들이 이날 첫 손님(?)의 어리바리함을 아래위로 훑는 듯하다. 기대하지 못했는데, 학교 다닐 때나 읽었던 외국 출판사의 책들이 가득하다. 원서 한 줄을 읽어내리기 어려워 머리를 싸맸던 20년 전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다. '책들과 함께 시간여행을 한다'는 수많은 영화의 클리셰들이 너무도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근처의 학교에서 학생들이 가져다 둔 책들이라고 하셨어요. 제가 대학다닐때이니, 거의 20년 전에 힘들게 넘기던 페이지가 떠올라서 순식간에 시간여행을 한 느낌이었어요. 공부가 제일 싫었는데, 너무 그리워요.
▲ 헌책방에서 발견한 대학 전공 서적들 근처의 학교에서 학생들이 가져다 둔 책들이라고 하셨어요. 제가 대학다닐때이니, 거의 20년 전에 힘들게 넘기던 페이지가 떠올라서 순식간에 시간여행을 한 느낌이었어요. 공부가 제일 싫었는데, 너무 그리워요.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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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나타난 주인 어르신. 방금 교회를 다녀오셨는지, 편한 옷차림으로 손님을 맞는다. 이런 곳이 있었는지 몰랐다는 말에 "관심이 없었던 거였겠죠" 하신다. '스윽' 던지는 그 말에 마음이 훅 찔린다.

"세상은, 자연은 언제나 있던 그대로 있어요. 인간이 변했을 뿐이지. 하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좋은 것이 더 많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 공간은 내게 그런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가져다주는 곳이에요. 이 곳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좋아요."

넓지 않은 내부는 간신히 발디딜 틈을 제외하고는 책들로 빼곡했습니다. 나름대로 서가별로 장르가 구분되어 꽂혀 있었으나, 책을 빼어 살펴보기엔 편하지는 않을만큼 책들이 점령하고 있었어요.
▲ 책방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책들 넓지 않은 내부는 간신히 발디딜 틈을 제외하고는 책들로 빼곡했습니다. 나름대로 서가별로 장르가 구분되어 꽂혀 있었으나, 책을 빼어 살펴보기엔 편하지는 않을만큼 책들이 점령하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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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책들이 많다"고 혼잣말처럼 책들 앞에서 중얼거렸더니, 이 근처 대학교들에 외국인 학생들이 많아 그들이 종종 책을 가져다 준다며 일화를 하나 얘기해 주신다.

"얼마 전에는 외국 학생이 (서점 안은 좁아서) 한참을 책방 밖 도로에 주저 앉은 채, 책을 보다 가는 거야.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뭔가 '보물'을 찾았다는 걸 표정을 통해 느낄 수 있었지. 그렇게 한참 동안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책을 보는 모습이 자유로워서 보기 좋더라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 눈치 보느라 하고 싶은 것들도 잘 하지 못하잖아."

주인 아주머니는 인천에서 포항까지 오셨다고 했다. 친척이 운영하던 곳이었는데, 일 없이 지내시던 내외분께 이곳을 한 번 맡아 해보겠냐고 제안해 주셨다고. 크게 고민하지 않고, '책이 이끄는 대로' 이곳에 오셨는데, 지금은 여기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에 너무 만족한다고 하셨다.

"책을 좋아하셨나봐요."
"아니에요.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어. 지금도 책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닌데, 어떤 책이 귀한 책인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 그 책을 내놓는 사람들이 책을 대하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지. 그러고보니, 책이 좋다기보다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좋다고 해야 하나."

책장을 열고보니, 누군가가 써 놓은 메모가 나타났어요. 96년이면, 20년 전. 누군가의 마음을 가득채웠던 고민들을 훔쳐보고 있자니, 일기장을 들여다본 것처럼 쑥쓰럽기도 하고, 수 많은 영화들이 스쳐가기도 하네요.
▲ 20년 전의 메모, 누군가의 고민 책장을 열고보니, 누군가가 써 놓은 메모가 나타났어요. 96년이면, 20년 전. 누군가의 마음을 가득채웠던 고민들을 훔쳐보고 있자니, 일기장을 들여다본 것처럼 쑥쓰럽기도 하고, 수 많은 영화들이 스쳐가기도 하네요.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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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 구석구석을 조심하며 돌아보았다. 주인 어르신이 나름대로 구획해 놓은 '질서'가 짐작되기는 했으나, 공간의 여유는 사치라서 원하는 책을 찾아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책장에 꽂혀 있지 않은 채, 바닥에 놓여있는 무더기에서는 책 한 권을 뽑아 드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조금 더 공간의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것까지 신경쓰실 여유를 내는 것이 쉽지는 않을 듯하다.

하지만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오래된 종이의 냄새, 책의 표지에 적어둔 젊은 날 고민의 흔적, 누군가의 서가에서 통째로 나왔음이 짐작되는 취향까지 쉽게 느껴졌다. 흡사, 아무렇게나 배열된 것처럼 보이는 책들이 쉴새없이 얘기를 걸고 있는 것 같아서, 어떤 얘기를 먼저 들어줘야 하는지 생각하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겠더라.

거의 20년 전 대학원 때, 지도교수님께서는 학생들에게 생일 선물로 책을 주셨어요. 이 책도 제가 받았던 책들 중 하나였습니다. 아직도 인상적인 문장이 떠오르는데, '네가 지금 하는 고민이 10년후에도 의미가 있을지를 생각해봐!' 아마, 얼마간 제 고민을 털어내는데 중요한 모토였네요.
▲ 교수님의 생일선물 거의 20년 전 대학원 때, 지도교수님께서는 학생들에게 생일 선물로 책을 주셨어요. 이 책도 제가 받았던 책들 중 하나였습니다. 아직도 인상적인 문장이 떠오르는데, '네가 지금 하는 고민이 10년후에도 의미가 있을지를 생각해봐!' 아마, 얼마간 제 고민을 털어내는데 중요한 모토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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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내가 교수님께 받았던 책도 발견했고, 지금 읽고 있는 책의 저자인 임철우 작가의 90년대 작품의 초기 판본도 한 권 챙겼다. 뭔가 보물을 찾아낸 느낌이라 뿌듯했다.

"종종 너무 귀한 책들을 깨끗하게 보고나서,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다며 주고 가시는 분들이 있어요. 정말 고맙지. 많은 사람들이 책을 파는 물건으로 생각하지만, 그런 분들은 나누는 것으로 생각하니까 나도 소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어."

요즘엔 책이 너무 쉽게 만들어지고 버려지는 것 같았는데, 사람과 사람에게로 전달되는 이야기들을 생각하니 책이 단지 '버려지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한다. 우리도 책을 '나누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면, 좀 더 풍성한 이야기로 채워질 수 있지 않을까? 나부터도 생각을 바꿔봐야겠다.

"책을 빼서 보셨으면, 가능하면 그 자리에 꽂아주세요. 제가 그대로 정리하는 게 쉽지 않네요."

책들 사이에 힘들게 몸을 구겨 넣고 뒤져보는 동안 주인 어르신이 조심스럽게 부탁을 하신다. 그리 작지 않은 내 키도 훌쩍 넘어가는 책장이니, 어르신이 다시 챙겨 넣으시기엔 쉽지 않다는 게 이해가 간다.

책방을 한참 돌아보고 나오는 길, 주인어른이 아쉬운 표정으로 배웅을 해 주십니다.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인사를 드리며, 사진을 한 장 부탁드렸더니 쑥쓰러운 미소를 지으시네요. 꼭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분명 좋은 사람 책방을 한참 돌아보고 나오는 길, 주인어른이 아쉬운 표정으로 배웅을 해 주십니다.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인사를 드리며, 사진을 한 장 부탁드렸더니 쑥쓰러운 미소를 지으시네요. 꼭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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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여진 책들이 넘어질까 두려워, 구겨 넣었던 몸을 힘들게 펴고 일어서면서 공간의 불편함이 계속 아쉽기는 했다. 어른께 다시 오겠다는 인사를 하며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책방을 뒤로 하고 나오면서도, 여전히 책을 소유하는 방식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지는 못했다. 나의 욕심이겠지만 여전히 '물건'에 대한 애착을 쉽게 거두지 못하는 듯하다. 그러나 가끔은 나의 보물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를 비워야만, 새로운 것이 채워질 수 있다고 했던가? 포항에서 유일한 헌책방이 좋은 놀이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에겐 나무들도 귀한 세상이 다가오고 있으니 말이지.


태그:#책방탐험, #동네책방, #헌책방 이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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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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