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다른 얘기 하나. <빅뱅 메이드>라는 영화가 있다. 10주년을 맞은 아이돌 '빅뱅'의 월드투어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관련 기사 : 10년차 빅뱅이라면, 좀 다를 줄 알았다) 이 영화를 영화적 완성도로만 평가하면 여러모로 아쉬울 수밖에 없다. 영화를 끌고 가는 서사가 딱히 없다보니 집중하기 어렵고, 중구난방으로 나오는 각자의 목소리가 잘 엮이지 않아 깊이가 얕다. 하지만 빅뱅의 팬이라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콘서트 실황 영상도 훌륭한데, 중간중간 자유롭게 나와서 무대 뒤의 일상을 담백하게 풀어내는 이들의 모습까지 곁들여지니 팬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봐야만 하는 영화였다.

또 다른 얘기 하나. 2013년에 있었던 MBC <무한도전> '응원' 특집을 기억하는가?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 응원단과 함께 <무한도전> 멤버들은 응원 구호와 동작을 땀 흘리며 연습했다. 그리고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의 정기전에 직접 무대 위에 올라 양교의 학생들과 함께 호흡했다. 학생시절, 모교가 지상파 예능의 소재가 되어 몇 주간 전파를 타니 짜릿하고 재미있었다. 유재석과 함께 내가 언제 "필승 전승 압승"을 외쳐보겠는가.

그러나 이 응원 특집은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의 학생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희대의 '노잼' 특집이었다. 이후 더 큰 국민적 축제에도 함께하려고 했던 이 장기 프로젝트는 결국 2013 고연전(홀수해의 정식 명칭은 고연전, 짝수해는 연고전이다)을 끝으로 중단됐다. 다수의 대중을 상대로 웃음을 줘야 하는 공중파 예능에서 특정한 경험을 공유하는 소수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고, 이를 보편적 이야기로 확장하는 데 실패한 셈이다. 양교의 학생들은 '민족의 아리아'와 '원시림'을 부르며 환호를 보냈지만(나를 포함해), 예능 프로그램 차원에서는 분명 아쉬움이 많은 기획이었다.

<빅뱅 메이드>와 <무한도전> 응원 특집은 비슷한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전자는 과오가 작고 후자는 크다. <빅뱅 메이드>는 기획 단계부터 철저하게 빅뱅이라는 아이돌과 이들을 오랫동안 응원해 온 팬들 사이를 연결해주는 작품이다. 빅뱅과 VIP에게 헌정하는 작품을, 빅뱅의 팬이 아닌 사람이 보고서 "빅뱅 팬만 좋아할 수 있는 작품이네"라고 비판하는 건 다소 어폐가 있다.

반면 <무한도전> 응원 특집은 다르다. 학벌 구조 피라미드의 정점에 속하는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 이 두 학교에 적을 두고 있는(혹은 뒀던) 학생들만 열광하고 이 두 학교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함께 즐기기는 어려운 문화가 공중파를 탔다. 일종의 공공재 개념이 포함된 지상파에서, 특정한 사람들만 희열을 느낄 내용을 구성하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일까. 물론, 그 특수성을 모두가 함께 웃고 즐기며 감동할 수 있는 보편적 감정으로 연결해 나간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당시 특집은 실패했다. 오랫동안 <무한도전>을 사랑한 팬들 입장에서는 왜, 내가 사랑하는 저 남자 연예인들이 응원복을 입고 땀을 흘리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레슬링 특집에서 그들의 뼈를 깎는 노력에 감동하며 울었던 시청자들이지만, 응원 특집에는 감정 이입이 쉽지 않았다.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가 딱 그런 작품이다. <빅뱅 메이드>처럼 김준수의 팬들만을 위한 뮤지컬이었으면 모를까, 아니면 김준수의 콘서트 내에 한 꼭지로 삽입된 연출이었다면 모를까. 연극·뮤지컬 장르를 전반적으로 좋아하는 마니아들에게는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다.

불협화음이 된 비빔밥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의 공연 장면 지난 3일, 씨제스컬쳐의 창작뮤지컬 <도리안 그레이>가 경기도 성남아트센터에서 개막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원작으로 삼은 이 뮤지컬은 유미주의에 관한 철학적 주제를 던지려고 시도하지만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김준수만이 돋보이는 이 극은, 정작 김준수의 잘못된 용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오는 10월 29일까지.

▲ 도리안과 헨리 헨리는 도리안을 통해 무엇을 보고 싶었던 걸까. 구체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인간은 어떤 존재였을까. 아마 헨리 스스로도 몰랐을 것이다. 신이 만든 게 초인이 아니라 괴물이었음을 깨달았을 때의 절망도 컸을 터이다. ⓒ 씨제스컬쳐


지난 3일 경기도 성남아트센터에서 개막한 <도리안 그레이>의 면면은 훌륭하다. 이지나 연출이 추구했던 미장센은 매혹적으로 무대 위에 구현됐다. 김문정 음악 감독의 고심이 엿보이는 넘버들은 음악적 완성도가 매우 탄탄하다. 조용신 작가가 선택하고 다듬은 어휘들은 그 선율 위에 유기적으로 붙어서 철학적 메시지와 시적 운율을 동시에 붙잡으려 한다. 김준수, 박은태, 최재웅 모두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각자의 캐릭터에 숨을 불어 넣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모였을 때, 엄청난 무게감으로 충돌하는 웅장하고 거대한 '불협화음'이 일어났다. 이 조합에서 3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별다른 재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각 요소는 훌륭한데 한 데 모아놓고 보니 별로인 극은 안 그래도 우리 뮤지컬 시장에 많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극 중에서도 <도리안 그레이>는 정점에 속하는 극이다. 이천 쌀로 지은 밥에 값비싼 로브스타와 횡성 한우를 얹은 뒤 덜 익은 김칫국물을 부어서 비벼버린 느낌이랄까.

특히 원작과는 다른 모호한 결말은 이 극이 지금까지 무엇을 추구했는지 의심케 한다. 극단적 탐미주의의 추락 그리고 인간의 한계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우리를 옥죄는 도덕과 관습이 여전히 인간이 더 아름다운 존재로 비상하는 것을 막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건지. 이도 저도 아니고 그저 작품 전체가 '아름다움'만을 추구한 유미주의인 건지.

<도리안 그레이>는 아름다웠던 청년 '도리안 그레이'가 타락해가는 이야기이다. 누구보다 잘생기고 아름다웠던 그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화가 배질은 도리안의 초상화를 일생의 작업으로 생각하여 완성한다. 그리고 헨리는 인간이 인간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더 나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헨리는 도리안에게서 바로 그 가능성을 엿본다. 도덕이라는 룰을 깨야 인간이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 그는 도리안을 죄의식 없는 존재로 만들려 한다.

도리안이 자유로워질수록, 도리안의 영혼을 담았던 초상화는 점점 추하게 일그러진다. 헨리는 결국 도리안이 초인이 되는 걸 보지 못하고, 도리안 역시 파멸하고 만다. 배질은 도리안의 타락을 막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실패한 건 이 세 남자만이 아니다. 제작진도 이 이야기가 파멸로 좌초하는 걸 막는 데 실패했다.

조용신 작가는 기자간담회에서, 계급적인 문제를 논하는 극이 많은데 그 외의 이야기도 표현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계급의 문제를 고발하는 뮤지컬 작품이 과연 국내에 많은지는 의아하지만, 그 외의 이야기를 한다는 건 충분히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다. 더 다양한 소재, 더 다양한 메시지를 장르 안에서 소화해야만, 그 장르 자체가 보다 넓어지고 성장한다. 난해할 수 있는 철학적 주제의식을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통해 구현하려고 한 건 박수 받아 마땅하다. 다만 그 결과물이 목적에 위배될 뿐이다.

강 대 강으로 충돌하는 배우들의 대사와 노래는 하나하나 무겁다. 곱씹으며 소화시켜야 하는데 이 극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소화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명언들이 사방팔방으로 튀어나오지만 그 어느 것도 가슴에 닿지 못하고 무대 위 허공을 맴돌다가 사라진다. 그래서 대사는 현학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멈추고 만다.

나중에는 결국, 저들이 왜 그토록 싸우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배질은 왜 그토록 기존의 전통과 도덕에 얽매여 있는가. 헨리는 왜 그토록 그 틀을 깨고 인간을 더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고 싶어 하는가. 그 실험대상은 왜 도리안이었으며, 도리안을 통해서 헨리는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배질은, 그런 헨리를 막아서고 죽는 순간까지 도리안의 회심을 믿었던 걸까. 그래서 도리안은 결국, 무엇이 되었던 걸까. 인간인가 혹은 괴물인가.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의 공연 장면 지난 3일, 씨제스컬쳐의 창작뮤지컬 <도리안 그레이>가 경기도 성남아트센터에서 개막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원작으로 삼은 이 뮤지컬은 유미주의에 관한 철학적 주제를 던지려고 시도하지만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김준수만이 돋보이는 이 극은, 정작 김준수의 잘못된 용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오는 10월 29일까지.

▲ 환락의 시대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쾌락의 향연. 술과 약에 취한 이들이 정말 도덕의 경계선에서 인간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던 것일까. ⓒ 씨제스컬쳐


작품 속 세계는 퇴폐적이다. 세기가 바뀌고,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인간은 이전에 신의 영역으로 치부했던 자리를 조금씩 넘보기 시작한다. 기존의 관습이나 도덕은 지배자들이 지배 체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조장하고 재생산한 문화이다. 정치권력 혹은 종교권력이 세상에 군림할 때는 인간이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족쇄를 부수고 도덕의 경계선에서 예술의 영토를 확장할 때 인간은 보다 인간다워진다. <도리안 그레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그런 의미의 인간 해방일 것이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그냥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들만이 돌아다닐 뿐 어디에도 인간의 해방은 보이지 않는다. 시대적 고민도, 철학적 성찰도,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탐구도 담지 못했다.

기자간담회에서 니체의 초인 얘기가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기대감은 하늘 끝까지 치솟아 있었다. 인간은 과연 인간이라는 한계를 넘을 수 있는가. 무엇이 가장 인간다운 것인가. 절대적 선이란 존재하는가. 무엇이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규정하는가. 그래서 우리는 우리보다 더 아름다운 존재, 초인이라는 그 영역에 닿을 수 있는 것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처음 읽었을 때의 혼란스러움과 생경함 그리고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신선함을 기대했다. 하지만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못한 채,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는 원작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보다도 지루했다. 감정이입이 안 되는 채로 인물들은 논쟁만 하고, 주인공은 점점 타락하는데 그 서사가 딱히 치밀하지도 않다. 그러니 시계만 볼 수밖에.

잘못된 김준수 사용법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의 공연 장면 지난 3일, 씨제스컬쳐의 창작뮤지컬 <도리안 그레이>가 경기도 성남아트센터에서 개막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원작으로 삼은 이 뮤지컬은 유미주의에 관한 철학적 주제를 던지려고 시도하지만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김준수만이 돋보이는 이 극은, 정작 김준수의 잘못된 용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오는 10월 29일까지.

▲ 김준수의, 김준수에 의한, 김준수를 위한 김준수의 과용으로 김준수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김준수를 빼면 볼 게 없는 극인데, 정작 그 김준수 때문에 극이 어그러졌다. ⓒ 씨제스컬쳐


"김준수는 까는 거 아니야"라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동료 기자가 했다. 동의한다. 김준수의 잘못은 아니다. 김준수라는 배우가 '하드 캐리'하는 이 극은 김준수를 빼면 별로 볼 게 없다. 그런데 동시에 바로 그 김준수 때문에 극이 망가져 버렸다.

김준수가 노래한다. 김준수가 춤을 추고, 김준수가 연기를 한다. 김준수가 키스를 하고, 김준수가 잠자리를 갖는다. 김준수가 땀을 흘리고, 김준수가 눈물도 흘린다. 김준수가 잘하는 것, 김준수가 할 줄 아는 것, 김준수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다 극에 쏟아 부어졌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 과용된 김준수가 극을 망쳐버렸다. 저 배우가 <모차르트!>의 모차르트와 <엘리자벳>의 토드(죽음)로 분해 나에게 충격과 감동을 선사했던 그 배우가 맞는지 눈과 귀가 의심스러웠다. 특히 1막 마지막 곡에서 보여준 안무는, 김준수가 얼마나 춤을 잘 추는지 모두가 아는 사실을 굳이 재확인해줄 뿐 별다른 감흥이 없다. 전체 작품의 톤에서 튀기만 할 뿐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버리면 냄새도 맡기 싫어진다. 아무리 맛있는 양념이어도 정량을 초과하면 음식 전체를 해친다. 김준수라는 좋은 재료를, <도리안 그레이>는 과용했다. 굳이 김준수의 모든 것을 무대 위에 보여줄 필요는 없다. 김준수라는 배우는 그 분량이 많지 않아도 충분히 빛난다. 그런데 선장도 김준수, 1등 항해사도 김준수, 갑판장도 김준수, 측량사도 김준수를 세워놨다. 배가 제대로 순항할 수 있을리가 없다.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의 공연 장면 지난 3일, 씨제스컬쳐의 창작뮤지컬 <도리안 그레이>가 경기도 성남아트센터에서 개막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원작으로 삼은 이 뮤지컬은 유미주의에 관한 철학적 주제를 던지려고 시도하지만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김준수만이 돋보이는 이 극은, 정작 김준수의 잘못된 용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오는 10월 29일까지.

▲ 배질과 헨리 배질 역의 최재웅(왼쪽), 헨리 역의 박은태(오른쪽) 모두 기량이 출중한 배우들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별다른 매력이 없다. 배질에게도 헨리에게도 감정이입하지 못하니 두 사람의 충돌에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기 어렵다. ⓒ 씨제스컬쳐


<도리안 그레이>는 본래 헨리와 배질의 사상적 갈등과 논쟁이 극의 중심을 잡았어야 했다. 헨리와 배질은 어느 한쪽도 손쉽게 택할 수 없는 인류의 오랜 갈등을 대변한다. 르네상스의 태동도 그랬고, 휴머니즘의 발아도 여기서 나온다. 그러나 김준수 보여주기에 치중하다보니, 이 논쟁은 그냥 감정싸움이 된다. 악역이 아님에도 헨리는 마냥 나쁜 사람 같고, 배질은 그저 지나치게 착하기만 한 도덕주의자이다.

그토록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김준수인데, 그가 연기하는 도리안 그레이는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의 연기력이나 가창력의 문제가 아니다. 타락한 도리안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보여주는 데는 성공했으니. 하지만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해를 시키고, 감동하게 하고, 객석에 앉은 관객을 (김준수의 팬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도리안 그레이라는 청년의 그릇된 욕망과 불행에 투영시켜야 했다. 그런데 그가 대체 왜 그리고 어떻게 타락해 가는지는 표현이 충분치 않았다. 왜 그토록 늙기 싫어하는지, 아름다움을 유지하려고 하는지조차도. 정작 설명되어야할 부분인데 말이다. 그러니 결국, 아름다웠던 청년 도리안 그레이가 망가져가는 게 별로 안타깝지 않다.

오로지 김준수이기 때문에 유지가 가능한 이 작품을 과연 완성된 극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른 리뷰에서도 쓴 문장이지만, 극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어야 한다. 이 배우가 오든 다른 배우가 오든 극은 극대로 존재해야 한다. 배우라는 선원들의 조합에 따라 다른 매력을 뽐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배우가 아니면 출항할 수 없는 배라면, 애초에 설계도부터 잘못 그린 거다.

예전에 한 말 한 번 더, 없는 개연성을 배우의 열연으로 채워넣는 건 배우가 박수받을 일이지만, 극이 칭찬받을 일은 결코 아니다. 김준수뿐만이 아니다. 박은태·최재웅처럼 재능 있는 배우들이 열연하며 어떻게 어떻게 메워보려고 하지만 말끔하게 가리기엔 이미 이 배의 구멍이 너무 크다.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의 공연 장면 지난 3일, 씨제스컬쳐의 창작뮤지컬 <도리안 그레이>가 경기도 성남아트센터에서 개막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원작으로 삼은 이 뮤지컬은 유미주의에 관한 철학적 주제를 던지려고 시도하지만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김준수만이 돋보이는 이 극은, 정작 김준수의 잘못된 용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오는 10월 29일까지.

▲ 망가진 초상화 시간이 지날수록 타락하는 도리안. 그가 타락할수록 그의 영혼을 담은 초상화도 점차 일그러진다. 이 작품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무너진다. 귀를 사로잡는 듯 했던 넘버들조차 웅웅 울리기만 할 뿐이고, 아무리 열정적으로 대사를 내뱉고 배우가 절규해도 저 멀리서 객석까지 닿지 못한다. ⓒ 씨제스컬쳐


김준수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게 다이다. 청년 '도리안 그레이'는 아름다웠을지 모르지만,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이 그릇된 유미주의적 극은, 그 극단적 '미'만을 추구하다가 결국 추하게 변해버린 도리안 초상화와 꼭 닮은 모양새로 망가진다. 그리하여 끝내, 아름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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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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