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희망의 종이학 프로젝트>는 후쿠시마 참사 5주기,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투하 71주기를 맞아 기획된 탈핵을 위한 프로젝트로, <희망의 종이학 프로젝트> 노동당 참가단은 후쿠시마와 히로시마 등 핵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지난 8월 3일부터 8일까지 6일간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인터뷰로 연재합니다. - 기자 말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졌을 때 유일하게 남겨진 건물. '히로시마 원폭돔'으로 불리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됨.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졌을 때 유일하게 남겨진 건물. '히로시마 원폭돔'으로 불리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됨.
ⓒ 정상훈

관련사진보기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투하되었고, 순식간에 10만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3일 뒤인 8월 9일 나가사키에도 핵폭탄이 떨어졌다. 히로시마-나가사키 핵폭탄 투하 71주기를 맞아 참가단은 히로시마 평화공원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재일교포 학교인 '우리학교'에서 교직을 맡고 있는 이승훈 선생님과 함께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을 둘러보았다.

폭심지에서 반경 2km까지 남아있는 건물이 거의 없는 당시 히로시마 시가지 모형, 피부가 녹아 내린 생존자들. 자료관에서 우리는 1945년 말까지 약 14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핵무기의 끔찍함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충분한 것일까.

"히로시마 핵폭탄 투하는 철저하게 준비된 실험"

"미군은 히로시마에 우라늄 폭탄, 나가사키에는 플루토늄 폭탄을 각각 투하했다. 굳이 두 가지 종류의 핵무기를 사용한 것이다. 또한 히로시마는 일본의 여러 도시 중에서 여러 차례 심사 과정을 거쳐 신중하게 선정된 곳이다. (나가사키는 기상 상황 때문에 8월 9일 즉흥적으로 선택되었다.) 미군은 일본 본토 폭격 와중에서도 히로시마는 그대로 남겨 두었다. 핵폭탄의 위력을 온전하게 평가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핵폭탄 투하 모습이나 폭발 직후 히로시마의 참상은 모두 미군 소속 사진사가 카메라에 담았다. 일본에 연구소를 세워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인체의 영향을 세밀하게 연구하기도 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었다는 미국의 주장과 달리, 히로시마 핵폭탄 투하는 철저하게 준비된 실험이었다."

핵폭탄 투하 당시 히로시마 모형. 붉은구는 핵폭탄이 폭발한 위치를 가리킨다.
 핵폭탄 투하 당시 히로시마 모형. 붉은구는 핵폭탄이 폭발한 위치를 가리킨다.
ⓒ 정상훈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왜 히로시마가 미군에 의해 핵무기 실험 장소로 선정되었을까. 2차 세계대전은 약 5천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다. 당시 히로시마는 태평양전쟁을 수행하는 군수공장이 밀집해 있었고, 일본군 사령부가 위치한 곳이기도 했다. 히로시마는 청일전쟁의 전초기지로 시작해서, 일본 제국주의 시대까지 '침략전쟁'의 도시였던 것이다. 

"모든 강이 사람과 동물의 시체로 뒤덮였다"


이어서 참가단은 조선인피폭자협회 김진호 협회장과 교류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핵폭탄 투하 당시 히로시마에 있었던 모친의 뱃속에서 피폭을 당한 피폭 1세대로, 조선인 피폭자들의 인권을 옹호하기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1945년 당시 히로시마에는 약 8만 7천 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 대부분 징병이나 징용된 이들이었다. 핵폭발과 피폭으로 약 3만 명의 조선인이 사망했으며, 나가사키에서는 약 1만 명의 조선인이 사망했다.

김진호 협회장은 71년 전의 끔찍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히로시마를 가로질러 흐르는 7개의 강에는 둥둥 떠다니는 사람과 동물의 시체로 가득 차 있었다. 피폭 이후 타는 듯이 목이 말라 물을 찾아 강으로 온 이들이었다."


"죄 없는 동포들이 그렇게 죽었으니, 얼마나 억울한가?"


"지난 5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했을 때, '수천 명의 조선인'을 추모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다. 우선 실제 피해 규모와 너무 다르다. 그리고 왜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미군이 투하한 핵폭탄의 피해자가 되어야 하는가. 일본인 피폭자와 조선인 피폭자는 본질이 다르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었다면, 이러한 비참한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지금까지 피폭 조선인들에게 사과한 적이 없다. 피폭 1세대의 평균 연령이 80살이 넘었다. 이제 얼마 후면 살아남은 사람들이 거의 없을 것이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안에 위치한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안에 위치한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 정상훈

관련사진보기





일본인만을 위한 피폭자 원호법


해방 직후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조선인 약 2만 5천 명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국으로 2만 3천 명, 북한으로 2천명. 그리고 5천 명의 조선인은 일본에 남았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에 대해서, 조선인 피폭자들에 대해서 사과하고 보상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전혀 그러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피폭자 원호법'을 만들었지만, 이는 오직 일본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1971년에 한국 피폭자인 손진두 씨가 일본으로 밀항했다. 그리고 후쿠오카 재판소에 '피폭자 원호법'을 한국 피폭자에게도 적용하라는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일본 정부가 인정하는 일본 내 의료기관에서만 검사를 통해 피폭자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일본 안에서만 '원호수당' 등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피폭자들의 계속된 법정 투쟁을 통해 2003년에는 한국에 거주하는 피폭자 약 천 여명에게 원호수당을 지급하란 판결이 났으며, 2008년 '피폭자 원호법'이 개정됐다.

현재는 해외에 거주하는 피폭자가 일본에 직접 가지 않아도 대사관 등을 통해 '피폭자 건강관리수첩'을 발급받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북한에 거주하는 피폭자들은 '북한과 국교가 없다'는 이유로 여전히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듯 조선인 피폭자들은 오직 투쟁으로만 자신의 권리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일본 정부가 그냥 준 권리는 하나도 없었다."

나아가 피폭 2, 3세대 문제도 남아 있다. 일본 정부는 '유전적 영향은 입증된 바 없다'며 이들에 대한 지원을 회피하고 있다. 이는 한국 정부 또한 마찬가지이다.

노동당 참가단과 교류회를 갖고 있는 조선인피폭자협회 김진호 협회장
 노동당 참가단과 교류회를 갖고 있는 조선인피폭자협회 김진호 협회장
ⓒ 정상훈

관련사진보기


반성 없는 추모는 잘못의 되풀이를 막을 수 있을까?

김진호 협회장은 교류회를 마무리하며 말했다.

"2009년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미국과 유럽연합 특별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핵무기 없는 세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선언했다. 그 이후 미국은 핵 없는 세상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지난 5월 오바마 대통령은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방문했다. 이곳에서 연설과 자료관 방문으로 30분 정도 보내고, 곧바로  이와쿠니 미해병대 기지로 돌아가 버렸다. 피폭자들을 만나 잘못했다고 사과하지도 않았다."

히로시마 평화의 공원에 있는 희생자 추모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쓰여 있다.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겠습니다.'

과연 어떤 잘못일까. 추모비도 일본이나 미국 정부도 어떤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말하지 않는다. '반성 없는 추모'는 '잘못의 되풀이'를 막을 수 있을까.


태그:#히로시마, #핵폭탄, #원자폭탄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