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920년대. 반도의 민중은 일제의 통치 아래 떨어지고 시류에 부합한 친일파가 세를 얻었다. 조선조 500여 년 역사는 오간 데 없고 나라 곳곳엔 피처럼 붉은 일장기만 펄럭인다. 의기와 열의가 땅에 떨어진 세상, 빼앗긴 조국의 독립엔 아무런 기약도 없다. 일제의 추적과 압박 속에서 자본조달까지 여의치 않게 된 무장독립단체 의열단은 조선의 부자들과 접촉, 골동품을 팔아 자금을 융통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핵심대원 김장옥(박희순 분)까지 희생당한다.

도주 끝에 일제의 포위망 가운데 떨어진 김장옥은 자신을 설득하러 들어온 조선총독부 경부 이정출(송강호 분) 앞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이정출은 김장옥의 옛 친구로 서로가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길을 걸게 되며 관계가 끊어진 상태. 김장옥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이정출은 악질 경찰 하시모토(엄태구 분)와 함께 상부의 지시를 받아 의열단의 뒤를 쫓는다.

압도적인 오프닝 누가 뭐래도 밀정의 압권은 오프닝. 그 오프닝 시퀀스를 장악한 건 독립운동가 김상옥을 모델로 한 김장옥(박희순 분)이었다. 그의 삶과 죽음이 관객에게 남긴 건 무엇일까.

▲ 압도적인 오프닝 누가 뭐래도 밀정의 압권은 오프닝. 그 오프닝 시퀀스를 장악한 건 독립운동가 김상옥을 모델로 한 김장옥(박희순 분)이었다. 그의 삶과 죽음이 관객에게 남긴 건 무엇일까.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밀정>은 친일경찰 이정출의 이야기다. 이야기에 굴곡이 생기는 순간마다 다른 무엇보다 그의 감정변화를 세심하게 내보이는 것만 봐도 그렇다. 매 순간 관객은 그의 말을 듣고 그의 표정을 살피며 그의 행동에 주목한다. 영화의 가장 큰 관심은 이정출과 같은 친일경찰이 어떻게 의열단과 같은 편에 서는지 이며, 그 과정에서 그의 내면에 일어난 변화를 내보이는 게 영화의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1930년대 만주벌판을 무대로 한 편의 활극을 그렸던 김지운 감독은 <밀정>에선 시계를 거꾸로 되돌려 독립운동과 친일행위에 투신한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한 편의 드라마를 빚어냈다. 두 영화 모두 열차가 주요한 소재로 등장하고 영상과 음향에 신경 쓴 흔적이 역력하며 송강호와 이병헌이 함께 출연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김지운 감독은 전형적 오락물이었던 <놈놈놈>과 달리 <밀정>에선 친일을 선택한 한 인물의 내면을 깊이 있게 표현하는데 노력을 집중했다.

영화는 비슷한 배경과 캐릭터로 같이 놓여 비교되는 최동훈 감독의 <암살>과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암살>이 전형적인 범죄 액션물이라면 <밀정>은 장르적 특성과 드라마의 이점을 누아르의 분위기 아래서 동시에 잡으려 한 욕심 많은 작품이다. <밀정>의 오프닝시퀀스와 기차 안에서의 에피소드는 전형적 범죄 액션물에 가깝게 연출됐지만, 그밖에 장면은 이정출의 내면 변화에 주목한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일제 앞잡이가 변화하는 모습

밀정 <밀정>의 주인공이었던 이정출(송강호 분). 일제에 부역하는 편한 길을 놔두고 독립에 투신하는 험로를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밀정 <밀정>의 주인공이었던 이정출(송강호 분). 일제에 부역하는 편한 길을 놔두고 독립에 투신하는 험로를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회색분자의 내면 변화를 끌어내고 이를 포착해 전면에 드러내는데 집중하다 보니 카메라는 이정출을 연기한 송강호의 얼굴에 자주 카메라를 가져다 댄다. <조용한 가족>, <반칙왕>, <놈놈놈>에 이어 김지운 감독 영화에 4번째 출연한 송강호지만 <밀정>에서의 연기는 달성하기 쉽지 않은 과제였을 것이다. 이정출은 체포해야 할 대상으로써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독립운동가들과 대면하게 되며 딜레마에 빠진다. 과연 나를 신뢰하는 이를 배신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는 악질 친일파라기보다 회색분자에 가까운 이정출을 전면에 내세워 그의 인간적 면모를 드러낸다. 성공을 위해 독립운동가 검거에 앞장서지만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독립운동가들과 엮이고 그들에게 인간적인 애정과 연민을 갖게 된 이정출. 그의 갈등으로부터 <무간도>, <도니 브래스코> 등에서 보인 이중간첩의 딜레마를 발견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자신을 믿어주는 이를 처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극 중 히가시 부장(츠루미 신고 분)의 "어려운 시기에 친구가 따로 있나. 손을 내밀면 친구지"하는 대사는 곧 영화의 주제와도 통한다. 먼저 손을 내밀고 기꺼이 그를 맞잡고, 그렇게 생긴 신뢰와 유대 속에서 함께 뜻을 지켜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희망 없는 세상 가운데 독립이란 커다란 뜻을 향해 한 보씩 전진하게 하는 원동력이 아니겠는가. 때로 커다란 뜻은 이와 같은 자그마한 유대로부터 시작되기도 하는 법이다.

한 마디 말, 한 개의 상징보다 분위기로 승부한다

공유의 호연 송강호와 이병헌 같은 존재감 강한 배우 사이에서 무난한 연기를 보여준 공유. <부산행>에서 천만 관객의 단맛을 본 그가 <밀정>으로 쌍천만 배우의 영광을 안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 공유의 호연 송강호와 이병헌 같은 존재감 강한 배우 사이에서 무난한 연기를 보여준 공유. <부산행>에서 천만 관객의 단맛을 본 그가 <밀정>으로 쌍천만 배우의 영광을 안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김지운 감독의 영화가 대개 그렇듯 <밀정>도 그 주제를 노골적인 대사나 뚜렷한 상징을 통해 표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상과 음악, 그 전체가 빚어내는 이미지가 영화의 주제에 가깝게 느껴지는 순간도 적지 않다. 이정출이 친구인 김장옥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봤을 때, 그가 죽은 친구의 인명부를 들여다보다 황급히 덮는 장면, 히가시 부장의 말에 응답하던 순간 등이 모두 그렇다.

열차 안에서 배신자를 찾아내 처단하는 장면은 또 어떤가. "그깟 폭탄 몇 개 던지는 걸로 독립이 오겠느냐"는 배신자의 말에 "마치 이문 안 나는 장사를 접듯 말하는구나"라며 총을 빼 드는 김우진(공유 분)의 모습. 그 간결한 대화와 배우들 표정 따위의 것들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거치며 중하고 중하지 않은 것으로 나뉘어 관객들이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난 사람들 말은 물론이고 내 말도 믿지를 못하겠소. 다만 저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정채산의 말을 들으며, 그가 "앞으로 내 시간을 이 동지에게 맡깁니다"라며 시계를 건네던 장면 등에서 보인 이정출의 표정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는 이 같은 장면에서 배우들의 표정과 카메라 안에 담긴 분위기를 통해 말과 상징으로 표현되는 것보다 더욱 많은 것을 화면 안에 담아내려 애쓴다.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인상과 느낌을 구현하는데 역량을 집중한 김지운의 시도가 과연 효과적이며 성공적인가에 대한 평가는 영화를 본 관객 개개인의 몫일 것이다.

중요한 순간마다 등장하는 안이한 설정

이제 단점을 지적할 때가 됐다.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 외국어영화상 한국 출품작으로 선정된 <밀정>이 과연 그만한 작품이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가운데 부정적인 의견으로는 영화의 안이한 줄거리가 반드시 꼽힐 것이다. <밀정>은 그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변곡점을 우연 내지는 우연에 가까운 헐거운 설정을 통해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성에 입국한 의열단 단원들이 위기에 처하는 건 영화 초반부 연계순(한지민 분)을 찍은 한 장의 사진 때문인데 경찰이 그 사진을 어떤 경로로 입수했는지와 같은 맥락은 영화에 완전히 생략돼 있다. 이정출이 정채산과 만나 내면의 변화를 일으키는 장면은 의열단의 은신처에서 가진 술자리와 바닷가에서의 대화로 표현되는데 친일경찰 간부 이정출을 설득하는 과정이 이토록 단순하게 표현됐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이고 안이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이밖에 이정출이 의열단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과정도 생략돼 있어 영화가 그려내는 것의 무게를 충분히 소화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밀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제에 부역한 친일경찰의 인간적 면모와 그가 겪는 딜레마를 관객 앞에 끄집어 내보이는 데 주력한다. 하지만 이 같은 시도가 설득력이 있는가 하는 의문을 지우기 어렵다. 독립운동가를 때려잡은 악질적인 친일파 노덕술과 김창용, 최운하, 원용덕 같은 이들이 과연 이정출과 같은 상황에서 그와 같은 딜레마를 겪었을까? 그들에게 이와 같은 상황을 줬다면 과연 의를 좇았을까? 부정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되찾은 나라에서 의기와 열의를 잃어버린 오늘, 나는 의열단의 이야기가 보고 싶었다. 불행히도 이 영화는 내가 찾는 영화가 아니었다. 나는 <밀정>이 악질적인 친일경찰에 대한 안이한 해석이었다고 생각한다.

<밀정>의 포스터 여러 장점을 지녔음에도, 큰 단점 때문에 빛이 바랜 영화 <밀정>. 이정출을 설득하고자 정채산이 꺼냈던 말을 노덕술이나 김창용에게도 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도 마음이란 것이 있었을까.

▲ <밀정>의 포스터 여러 장점을 지녔음에도, 큰 단점 때문에 빛이 바랜 영화 <밀정>. 이정출을 설득하고자 정채산이 꺼냈던 말을 노덕술이나 김창용에게도 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도 마음이란 것이 있었을까.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밀정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김지운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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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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