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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오후 강원 춘천시 한림대학교 국제회의실에서 새누리당 소속 유승민 의원이 '왜 정의인가?'를 주제로 특강을 하고 있다.
 7일 오후 강원 춘천시 한림대학교 국제회의실에서 새누리당 소속 유승민 의원이 '왜 정의인가?'를 주제로 특강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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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병제 하면 가난한 집 자식들만 군대에 가게 될 것이다."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이 모병제 도입을 주장한 남경필 경기도지사를 반박한 말이다. 모병제를 도입하면 사람들이 군대를 피하려 할 것이고, 결국에는 '가난한 집안의 자식'들만 입대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유 의원은 모병제가 "정의의 관점에서 용납할 수 없는 제도"라고 비판했다.

전역한 지 채 2년이 되지 않은 나의 기억을 되짚어보면, 군대는 이미 그런 곳이다. 군대를 온 사람들 대부분 "부자들은 군대에 안 오잖아"라고 생각했다. 사실 군대를 왔다는 것은 당시 우리에게 어떤 '증명'이었다. "너도 군대를 피할 수 있는 집안은 아니구나"라는 증명.

이미 '가난한 집 자식들'은 군대에 가고 있다

이미 '가난한 집 자식들'은 군대에 가고 있다.
 이미 '가난한 집 자식들'은 군대에 가고 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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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로 국민의당 의원이 지난 11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일반 병역면제비율은 0.3%였지만, 고위공직자 직계비속 병역면제자 비율은 4.4%였다. 10배 넘게 차이 나는 수치다. 사실, 친구들과 "누구는 아버지가 높은 자리에 가야 해서 (군대에) 간다"거나 "이미 빠질 수 있는 애들은 해외 국적을 빌미로 다 빠졌다. 공직자들은 별수 없겠지만, 그냥 돈 많은 집안은 군대에 가지 않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곤 했다. 그런 우리가 느끼는 체감 병역면제율은 4.4%보다 훨씬 높다.

이런 상황은 젖혀두고서라도, 유승민 의원을 비롯해 모병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요 논리인 '가난한 집 자식만' 타령의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가난한 집 자식만' 얻는 직업은 이미 우리 사회에 충분히 많다.

우리나라는 최저임금을 받지 못하고 일하는 사람의 비중이 11%를 넘는다.(국회예산정책처) OECD 국가 중 3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2016년 2월 통계청 통계에 따르면 국내 전체 취업자는 2500만 명인데 고용보험 순수피보험자는 1200만 명이다.

산재 제도도 부실하다. 고용노동부의 공식자료에 따르면 2014년 재해율은 0.53%이다. 하지만 단순히 근로자 만 명당 사망자 수를 나타내는 사망 만인율은 같은 해에 1.08%이다. <한겨레>의 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재해율은 OECD 평균의 1/4 수준이지만 사망만인율은 1등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산재 처리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누락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처럼 최저임금도 고용보험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근로자의 사망률도 OECD에서 제일 높은 나라에서 마치 '군인만' 위험하고 안 좋은 직업인 양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 우리나라 청년들은 위험하고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직업의 귀천'이 있고, 가난한 집일수록 '좋은' 직업을 가질 기회는 적어진다.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고졸 취업자 중 4대 보험 가입자가 2013년에서 2015년 사이에 30.4%에서 26.4%로 떨어졌다. 자의든 타의든,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바로 돈을 버는 청년들이 4대 보험조차 제대로 적용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정의' 운운하기 전에 해야할 일

이미 우리나라는 가지지 못한 사람일수록 더 좋지 않은 대우를 받고, 더 '좋지 않은' 직업을 구하고 있다. 사진은 드라마 <청춘시대>의 한 장면.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 중 한명인 윤진명은 가난 때문에 저임금 아르바이트를 전전한다.
 이미 우리나라는 가지지 못한 사람일수록 더 좋지 않은 대우를 받고, 더 '좋지 않은' 직업을 구하고 있다. 사진은 드라마 <청춘시대>의 한 장면.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 중 한명인 윤진명은 가난 때문에 저임금 아르바이트를 전전한다.
ⓒ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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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 일자리 박람회의 행사를 돕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20대들은 박람회 부스와 팸플릿에 적혀 있는, 낮은 임금을 보고는 "대체 누가 지원하겠어?"라고 이야기했다. 허나 행사가 시작되자 많은 구직자들이 일자리를 문의했다. 그게 '현실'이다. 이미 우리나라는 가지지 못한 사람일수록 더 좋지 않은 대우를 받고, 더 '좋지 않은' 직업을 구하고 있다.

그러한 현실을 외면한 채 군대에 대해서만 '가난한 집 자식일수록' 타령하는 것은 위선에 불과해 보인다. 평소에는 "공부를 안 했으니까", "노력을 안 했으니까"라고 더 안 좋은 환경의 직업을 가진 이들을 폄하하다가 이제 와서 "정의"를 운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의를 운운하기 전에 노동 환경을 개선해야 하지 않을까. 그 안에는 당연히 군대도 포함된다. 가난한 집 자식 운운하기 전에 군대를 애초에 좋은 직장으로 만들면 될 것이 아닌가. 오히려 군인이라는 직업은 가난한 집 자식이 안정의 기틀을 마련할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현재의 군대가 어느 정도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 부정할 순 없다.

당장 모병제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모병제는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를 지속해야 할 문제다. 모병제의 반대 이유가 단순히 "가난한 집안의 청년들만 가게 될 것"라는 게 문제다. 우리나라의 현실을 모르고 나온 발언이다.

'가난한 청년'이라고 그들을 쉽게 대상화하지 말아야 한다. 정말로 그들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모병제가 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도록 현실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들이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떤지 살펴보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런 현실 자각 없는 '정의' 타령은 공허하다.


태그:#모병제, #징병제, #유승민, #남경필, #최효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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